• 12월 28일 시내 모처에서 원로급 인사들이 오찬회동을 했다. 그 중 한 분이 화제를 던졌다. “<억지와 위선, 좌파 인물 15인의 사상과 활동>이라는 책을 요즘 봤습니다. 우리 사회의 내노라 하는 좌파 인물 15인의 실명을 들어가며 그렇게 정공법으로 공격한 사례가 있다는 게 우선 놀라웠습니다“ ”아주 깝떼기를 벗겼더군요“ 

    김광동 자유민주연구학회장, 김성욱 자유연합 대표(문필가), 김정호 자유기업원장,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변희재 미디어 워치 발행인, 이문원 실크로드 CEO포럼 전문위원, 정규재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등이 공동 필자다. 

    이들이 다룬 대상은 리영희, 백낙청, 변형윤, 윤이상, 송두율, 박원순, 최열, 서중석, 한홍구, 유시민, 진중권, 박찬욱, 신해철, 장하준, 김용옥. 

    일단의 인사들이 한 시대의 인기몰이를 하는 경우는 언제나 있다. 그들은 학자들일 수도 있고, 평론가일 수도 있고 작가들을 수도 있고 예술가들일 수도 있고 운동가들을 수도 있고, 종교인들일 수도 있고, 프로타고니스트(protagonist)들일 수도 있다. 개중엔 예수님, 부처님, 소크라테스, 세례요한, 사도 바오로, 마르틴 루터, 토마스 페인...처럼, 세인의 지속적인 존경과 신뢰를 확보한 사례도 있다. 

    그러나 그리스의 소피스트(sophist)들, 중세기의 천동설 주창자, 십자군전쟁 당시 정복전쟁을 선동한 로마교황 우르반 2세, 거기에 호응해 이른바 ‘인민 십자군원정대’를 이끌었던 프랑스의 신부 ‘Peter the Hurmit(초가집의 베드로 신부)’ 나치스의 괴뻴스 같은 사람들의 교설(敎說)은 선동적이고 최면적인 궤변과 억지로 한 시절의 끗발과 ‘메뚜기 한 철’을 구가한 적은 있지만 이내 '왕구라‘로 들켜 ’낙동강 오리알‘이 된 사례도 많다.

    예의 15인으로 선정된 인사들은 1960년대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숱한 젊은이들에게 ‘반항의 이유’를 고취하고 일깨우면서 그들을 운동의 역군으로 길러내는 데 상당한 영향력을 끼쳤다. 어두웠던 시절 그들이 금지된 서고를 열어 금지된 책을 꺼내서 금지된 담론을 널리 전파함으로서 ‘세상을 이렇게 볼 수도 있다“고 하는, 일종의 우상파괴적 역할을 한 측면만은 전적으로 폄하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런 우상파괴자들 스스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또 하나의 우상으로 굳어 버렸다는 아이러니다. 그렇게 된 데는 몇 가지 원인이 있다. 

    첫째는 독선과 오만이다. 그들은 부도덕, 무식, 독단에 빠진 '꼴통'들을 자기들의 압도적인 도덕성과 탁월한 지식과 혁명적인 정당성에 기초해서 타도하고 매장하는 정의의 집행관이라고 확신, 또 확신한 나머지, 그들 스스로 어느 틈엔가 그들이 매장하고 거세하고자 한 바로 그 상대방의 독선과 오만을 고대로 닮아간 것이다. 수양이 부족한 탓이다.

    둘째는, 그들 새로운 우상들은 알고 보니 무얼 그렇게 잘 알지도 못하면서 무얼 그렇게 잘 아는 것처럼, 무식한 소리를 유식한 소리인양 떠들어 댔다는 사실이 후학(後學)들에 의해 속속 폭로되고 적발되었다는 점이다.

    예컨대 모택동의 문화혁명을 인류역사 초유의 위대한 변혁이라고 떠들어 댄 사람이 있었지만, 그게 지금 와서 보면 엄청 웃기는 헛소리이자, 사람 죽이는 오진(誤診)이자, 숱한 애들 바보 만드는 사이비 종교의 가짜 주문(呪文) 같은 것 아니었던가? 이 경우는 글로벌 수준의 제대로 된 정통 학문의 세례를 거치지 않은 탓이다.

    결론적으로, 인간적 학문적 수양이 부족한데다 제대로 된 과학적 연구방법론의 세례도 충분히 받지 못한 상태에서 자기들이 임의로 낙인찍은 ‘공공(公共)의 적(敵)’에 대한 숙청, 타토, 제거의 과업에 급급한 나머지, 정교한 연구결과에 기초한 실증적 담론보다는 프로파간다 수준의 어쭙잖고 투박하고 섣부르고 엉성한 정치적 담론으로 상대방을 마치 개 때려잡듯 ‘민족의 적’이니, ‘민주의 적’이니, ’민중의 적‘이니, ‘정의의 적’이니, ‘진리의 적’이니, '통일의 적'이니 하며 제멋대로 재단하고 단죄하고 정신적으로 척살(刺殺)한 데서 오는 그 역풍을 그들 새로운 우상들이 지금 고스란히 되받고 있는 꼴이다. 

    이것은 물론 전반적인 느낌일 뿐, 15인 한 사람 한 사람은 서로 다 경중(輕重)과 스펙트럼에 있어 다를 것이다. 그 차별성을 간파하고 인정하고 존중하는 분별력은 반드시 발휘해야 한다. '도매금'을 '도매금'으로 갚는 것은 그 역시 또 하나의 비(非)학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격과 비판은 좌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민주주의자들도 얼마든지 치열하게 할 수 있고, 당연히 해야 한다는 점을 일깨웠다는 점에 이 책의 중요하고도 일차적인 의의(意義)가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