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을 이끄는 힘----誠과 敬

    바로 지난 달 동경에서 출간된 “日本의 實力”이란 책의 부제는 ‘日本을 흔들림 없는 국가로 이끄는 6가지 힘’이다.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책의 두번째 장이 “일본의 실력”의 두번째 요소로 ‘誠’이라는 戰略’을 들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전략, 국가흥망사의 전문가로 우파 논객이기도 한 저자(中西 輝政)는 경도대학의 정치학 교수이나, 유학(儒學)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저자는 이 책 속에서 日本이 중국침략을 시작했던 다음 해인 1938년에 설립했던 모략전(戰) 학교인 나까노(中野)학교를 들먹이고 있다. 비밀전사를 양성했던 학교는 ‘모략의 극치는 誠’이다’로 가르쳤다는 것이다.
    눈여겨 볼 것은 21세기 정보화사회의 한 복판에 있는 경제대국 일본에서 국가전략의 전문가가 유교적 덕목인 日本人의 ‘誠’’을 전략차원에서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誠은 敬 가까이에 있는 덕목이라 흥미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日本人을 바꾼 敬

    17세기 초 일본에 퇴계학을 통해 주자학이 퍼지기 시작한 이래, 그 핵심개념인 敬은 日本사회에 수신과 위학의 제일의적 실천요령으로 재빨리 받아 들여졌다. 17세기 중반에 불과한데, 이름있는 禪僧 타꾸앙(沢庵)은 에도막부(幕府)의 검술 지남을 위해 검도의 오의를 해설하는 책(不動智神妙錄)에서 敬의 개념을 원용하고 있다. 그 전 100년 간이 전국시대였던 지라 日人들은 코스트 높은 武가 아니라 文에 의해 질서를 유지하는 방식을 갖는, 대륙으로부터의 신문화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것 같다.

    敬의 덕목이 日本사회에 퍼져나간 정도는 마른 스폰지가 물을 빨아 들이듯 이라 할 만 하다. 주자학의 덕목이 일본인들의 생활 속에 단기간에 받아들여지는 데는, 전란으로 지샌 16세기의 100년간 다음에 찾아온, 평화시대라는 시대 상황도 있었지만, 강렬한 개성의 교조적 기질을 갖는 걸출한 퇴계학자의 존재도 크다 해야 할 것이다.

    그는 야마자키 안자이(山崎 闇斎 1618-82)이다. 역작인 “日本朱子學과 朝鮮”속에서 아베 요시오(阿部吉雄) 교수는 야마자키가 에도시대를 통틀어 최고의 주자학자였고, 퇴계학에 의한 주자학자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요새 와서 日本사상사를 얘기하는 사람들은 퇴계를 별로 들먹이지 않는데, 좀 모자라는 느낌이다. 사상사에서 敬이나 誠 관계를 다룬 東京大學의 사가라 토오루(相良 亨) 교수도 퇴계를 피해가기는 마찬가지다.

    80년대에 획기적인 일이 있었다. UCLA의 헤르만 움스 교수는 “도쿠가와 이데오로기:초기구조”에서 야마자키 안자이가 어떻게 퇴계의 敬을 일본사회, 나아가서는 일본인의 생활 속에 집어 넣었는가를, 그리하여 오늘의 일본인의 성격형성에 영향을 미쳤는가를 분석해 냈다.

    움스교수의 논단을 들어 본다.

    “야마자키는 주자학에서 뭐가 ‘진리’인지를 알게 되었다. …(수다한 저작을 통해) 안자이가 논증한 것은, 자기가 주자학의 ‘정통’의 본질을 체득했다는 것. 그리고 주자학 전통의 위대성, 거기에 부어진 존숭 및 그 보편타당성이었다. … 나아가서 당시의 학적 전통과 정치환경이 그로 하여금 ‘敬’에 눈뜨게 하였다.” 주자학에서 그가 발견한 진리는 敬이었던 것이다.

    여럿있는 성학의 기초개념이나 가치 중에서 敬의 개념이 강화, 확충되는 것은 정자와 주자에 의해서지만, 성학체계화의 키 개념으로서의 결정적 의미부여는 퇴계에 의해서다. 이는 잘 알려져 있다. 야마자키가 발견한 敬은 퇴계의 敬이었고, 퇴계학을 통해서였다. 당연히 퇴계에 대한 崎門(안자이 학파)의 존숭은 대대로 이어졌다.

    고도로 국수적이고 금욕적이고, 고원한 이상에 대한 비타협적 헌신을 제자들에게 요구했던 안자이는 드디어, 사(私)적 차원에서 일본의 전통신앙인 신도(神道)와 주자학의 통합을 시도 하기까지에 이른다. 안자이의 敬에 대한 경도의 정도는 신앙수준이다. 敬을 神道의 교의 속에 집어 넣은 안자이는 드디어 ‘日本에 태어나면서, 敬을 보지하지 않는 자는 일본인이 아니다’고 까지 하게 되었다. 이 말의 당부는 고사하고, 당시 京都와 에도에 학숙을 두고 6천 문도를 거느린 대학자로서, 막부 최고의 실력자를 제자로 둔 안자이의 앞의 언표가 훗날의 일본인의 성격 형성에 미친 영향은 심대해 보인다. 안자이의 敬 이데오로기는 윤리적 정치적 이상으로 당시의 지배계층인 사무라이들에게 제시되기도 했다. 私心의 작은 조짐도 일어나지 못하도록, 자기에 대해 부단히 경계하고 싸우도록, 도덕적 내부 집중이 명령처럼 주어졌던 것이다. 이 같은 윤리적 이상의 배후에 칼이 있는 사회가 형성해 낸 에토스에 한번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움스교수가 崎門의 敬을 분석하면서 ‘道德的 엔트로피 증대의 불가피 법칙’을 원용하고 있는 것은 인상적이다. 敬은 行住座臥,起居語默 삶의 모든 時空에 요청되는 것이기에, 인간의 도덕적 무질서는 다른 작용이 없는 한 증대될 수 밖에 없다는 이 법칙은 敬 철학의 분석용구로 등장하면서 동시에 敬의 功効 를 설득하는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청소년의 공부와 敬

    성장하는 청소년은 누구나 사회화(socialization) 과정 속에 있다. 사회화란 자라고 있는 청소년이 그가 속한 사회의 중심적 가치관을 수용, 내면화 함으로써 성인이 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오늘날의 한국사회의 가정에서는 가치관을 전수해줄 권위의 주체가 사라져 가고 있다.

    핵가족의 진행과 고도산업사회가 불러온 현상이지만, 파더레스(fatherless) 소사이어티가 광범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가정에 친구 같은 아버지는 있어도 가치관을 심어줄 권위의 주체는 없어져 버렸고 대역도 찾을 수 없다.

    욕망을 무한 긍정하는 자본주의 문화의 전달장치 앞에 무차별적으로 노출된 부친부재의 청소년들을 두고서, 학교에 윤리 교육이 있다 한들 효력 있는 접점이나 교육의 입각점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리하여 문명은 발달한다고 하는데 개인이 딛고 설 공동체의 해체-파괴현상은 진행형이고, 자본주의 문화의 챔피언 격인 마이클 잭슨에서 보는 삶 그자체의 황폐화는 정도의 차가 있을 뿐, 한국의 청소년도 피해 가는 것은 아닐 것이다.

    미국 백악관 스태프들이 휴가를 갈 때는 휴대폰 버리고, 전화도 없고, 신문도 안 오고, 라디오, TV, PC도 없는 공간 속으로 떠난다고 들은 적이 있다.

     거기 있는 것은 고요(靜)가 아닐 것인가.

    이제 敬 가까이 온 것 같다. 퇴계의 敬의 교설이 전근대에서 근대에 걸쳐 연면하게 日本人들에 끼친 영향을 보면서, 우리가 그 동안 외면했던 敬이 민족의 DNA속에 그 근기를 더 진하게 담아놓고 있을 것 같기도 하고, 敬이야말로 오늘 황폐해 가고 있는 우리 청소년의 심전(心田)에 구원일수 있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기도 한다.

    오늘의 청소년이 그들의 일상적인 문제관심의 연장선상에서 敬에 접근할 수 있는 입구를 찾아 보았으면 한다. 敬이 거느리는 「심성의 존양」,「미발의 중」,「이발의 화」,「활연관통」,「천인합일」등에 오늘의 청소년의  눈을  처음부터 머물게 하기는 어렵다.

    格物致知론을 유학의 공부론이라 할수 있는지 모르지만, 일본의 다까하시 스스무(高橋進)교수는 朱子의 「大學」格物보전 말미의 부분과, 퇴계의 「성학십도차자(箚子)의 끝부분을 모두 격물치지론의 주석내지 해설로 보고, 양자를 비교하여 그 우열을 따지는 논급을 하고 있다. (『李退溪と敬の哲學』p.170-171). 高橋는, 주자가 실천론적 논리의 틀을 제시하는 것에 그친 데 반해, 퇴계는 거기서 나아가 「持敬專一의 공부노력」이라는 실천의 논리를 제시하고 있다고, 「지극히 특징적」이라며 퇴계 손을 들어 주고 있다.

    퇴계사상은 敬을 통한 인간의 실존적 주체성 확립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지만, 다까하시의 위의 언급은 오늘 수능시험을 쳐야 하는 청소년들이 공부방식에서 퇴계의 敬의 가르침을 따르면 크게 얻는 것이 있을 것임을 느끼게 한다.

    송학에서 제시되었고 퇴계도 수용해 보인 敬 방법으로서의 4조설-整齊嚴肅(자세를 단정히 태도를 근엄히 함), 主一無敵(하나의 일에 전념하고 이것저것으로 왔다갔다 하지 않음), 常惺惺(늘 깨어있음), 其心收斂(마음이 한 점에 완벽하게 모두어 져 어떤 일물도 끼어들지 못하는 상태)를 오늘의 공부하는 학생을 세워 의미를 정돈해 본다. 主一無敵은 정신집중이고, 整齊嚴肅은 집중을 위한 외적 준비태세, 常惺惺은 집중을 위한 내적 준비태세, 其心收斂은 집중달성의 고도화 쯤으로 정리 할 수 없을 것인가. 敬의 4조설이란 결국 몸의 내외의 태세를 가다듬어 정신집중을 고도화하는 것이 敬에 달하는 방법이라고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敬의 4조설을 「집중」으로 의미배열을 해놓고 보면 공부하는 학생들이 敬접근 하기는 한결 쉬워 질 것이다.
     퇴계가 소년왕 선조에게 「차자」를 통해 강조하려 했던 공부방식도 결국 집중이었다. 공부할 때는 후궁 출입이나, 누구한테 무슨 벼슬 줄 것인가 등은 생각지 말고 공부 그 하나에 정신을 집중해야 공부가 된다고 퇴계는 타이르고 싶었을 것이다. 그 집중이 그냥 되는 것이 아니고, 병풍이나 벽에 「敬斎箴」이나 「夙興夜寐箴」등을 써 붙여 놓고, 시시로 눈을 주고 읊어 대면서 그 내용과 지시에 마음을 쏟는 수련을 해야 집중력이 생겨 난다고 알으키려했 을 것이다.

    敬은  「집중」만은 아니고 사람 되게 하는 윤리적 요청과 그 실현방식을 동시에 포괄하고 있어 보이지만, 敬의 「집중」이야말로 오늘의 청소년을 퇴계선생의 가르침 앞에 서게 하는 접근로라 할 것이다. 이제 청소년들 앞에 敬의 실천적 공부 방식을 정리해 보일 때가 되었다.

    퇴계의 가르침과 청소년

    퇴계의 일상 자체가 敬속에 있는 것이었지만, 퇴계는 스스로 정좌법으로 敬공부를 하고 제자들에게도 가르쳤던 것 같다.

    「언행록」(『퇴계선생 언행록』, 홍순균이윤희 공역)의 몇 구절을 모아 본다.

    "평소에  새벽이면 일어나서 반드시 세수하고, 머리 빗고, 의관을 갖춘 다음, 종일토록 책을 보았으며 때로는 향을 피우고 정좌(靜坐) 하기도 하였다. " (p.14)
    "초학자를 위한 계책으로서는 정제엄숙 위에서 공부하는 것 만한 것이 없다. 동(動)과 정(靜)을 겸하고 안과 밖을 함께 갖춘 것으로는 정자의 이른바,
    ‘의관을 바로 하고 생각을 통일하여, 장엄엄숙, 단정한 자세로 속이지 말고 게으르지 말라’고 한 교훈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 이를 마음 속에 깊이 새겨 다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p.37-38)
    "(제자가) 묻기를, 「연평(延平)은 정좌(靜坐) 의 설을 말하였습니다」하니, 선생이 말씀 하시기를 「정좌를 해야 몸과 마음이 수렴되어 도리가 바야흐로 멈추어 정박할 곳이 있는 것이다. 만약 육신이 흐트러져서 방만하여 단축함이 없다면 심신이 혼란해 져서 도리가 다시는 머물러 정박할 곳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고정(考亭)이 연평(延平)을 마주하여 하루 종일 정좌(靜坐)하다가 집에 돌아 와서도 여전히 그렇게 하였다.」"(주: 고정은 주자의 호, 연평은 주자의 스승) (p.40)
     "사람은 사려가 없을 수 없다 . 다만 쓸데 없는 사려를 제거하여야 하는 것일 뿐이다. 그 요결은 敬(敬)하면 곧 마음이 통일되고, 마음이 통일되면 사려는 저절로 고요(靜)하게 되는 것이다."(p.42)

    앞에서 들었던 일본의 퇴계학자 야마자끼(山崎)는 수신의 수단으로서의 정좌법에 관한 앤소로지인 「伊洛三子伝心錄」을 남기고 있다. 이 속에서 야마자끼는 유교의 정좌법이 불교의 좌선(坐禪)에 경사되기 싶다는 우려를 거부하면서, 당시의 日本 유자(儒者)들이 정좌를 게을리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다. 위에든 앤소로지는 정좌법이 어떻게 선의 선정(禪定)과 다른 것인가를 논한 글들이다.(『徳川 이데오로기』p.281)

     퇴계를 자기스승보다 더 존중했던 야마자끼의 고제 사또(佐藤直方)는 『佛者는 사물(死物)의 靜을 닦(修)고 있으나, 정좌가 닦고 있는 것은 活生의 정을 닦는 것. 』이라  잘라 말하고 있다.

     한국에도 禪을 의식하여 정좌법을 적극적으로 수행치 않는 구석이 있는지 모르지만, 좌선이나 정좌법은 모두 근본은 호흡법으로 여겨지는데, 더 올라가면 힌두의 요가에 가서 닿는다.

    영어의 Spirit(정신)은 그 어원이 라틴어의 Spiro(호흡)으로 알려져 있다. 인류가 호흡법으로 정신을 컨트롤하는 기법을 개발한지는 오래되는 일이다. 불교 의식 할 일이 아닌 것 같다.

    정좌법(靜坐法)의 요령

     사랑을 정신분석하여 현대의 고전이 된 (사랑의 기술) 에서 에리히 프롬은 제대로 된 사랑을 위해서는 훈련(discipline) 과 정신집중(concentration)이 불가결하다고 하고 있다. 집중은 쉽지 않아 연습이 필요하다면서 다음과 같이 권하고 있다.

     "편안한 자세로 앉아서, 눈을 감고 눈앞에 있는 흰 스크린을 보려고 하며, 마음속에 떠오르는 온갖 상념과 생각을 제거하려고 하며 자신의 호흡을 (마음이)  따라 가는 것 – 그리고 이렇게 하면서 호흡을 느끼는 것, 더 나아가 「나」즉 나의 힘의 중심으로서의 「나」, 나의 세계의 창조자로서의 「나」- 나 자신을 느끼는 것 등은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는 적어도 매일 아침 20분 동안(가능하다면 더 길게), 그리고 매일 저녁 잠자리에 들기 전에 이러한 정신집중 연습을 해 야 할 것이다. "

    프롬이 권장하는 전신집중을 위한 수련이 정좌법의 그것과 그렇게 멀지 않다는 것을 체험자들은  알 것이다.
     청소년들이 참고할 수 있는 정좌법의 구체적 요령을, 明治기에도 활약했던 崎門의 대가 쿠스모또 탄잔(楠本端山 1828-83)이 정좌설을 중심으로 다음에서 정리해보겠다.  
        
                         정  좌  법    How to    

      일본의 宋明철학의 최고권위인 큐슈대학의 오까다 다께히꼬( 岡田武彦 1909-2004)교수는 마음의 고요함을 추구하는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중국에 정착된 정좌(靜坐)가 인도에 태고부터 있는 요가의 행법에서 비롯한다고 했다.

      오까다 교수에 따라 정좌에 관계되는 행법 몇까지를 다음에 간추린다.
    ○ 좌법(坐法): 신체를 평안히 하여 부동하게 하기 위한 자세의 방법으로, 선에서 말하자면 결가부좌와 같은 것.
    ○ 조식(調息): 호흡을 조절하는 것으로 호기(呼氣)와 흡기(吸氣)사이에 잠시 정지 상태를 두어 호흡을 조절한다. 이것은 단전호흡과 같다.
    ○ 제감(制感): 감각을 제어하여 외계의 자극에 의해 마음이 평정을 잃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 집지(執持): 마음을 한곳에 집중시켜 관념이나 표상을 제어하는 것이다.

      오까다 교수는 호흡법에 중점을 두고 자세히 정좌의 요령을 설명하고 있다. 숨을 조절하고 기를 조화롭게 하는 것을 술자(術者)의 일로 여겨 경시 하지 말아야 한다,면서 주자의 조식잠(調息箴)을 모델로 들어 놓았다.
     코끝에 흰 부분이 있어 내가 그것을 봄에 시간과 장소에 따라 모습이 변화한다. 고요함이 지극하되 내어 쉼은 마치 봄날 연못 속의 물고기 같고, 움직임이 지극하되 들이 쉼은 마치 벌레들이 땅속 깊숙이 숨는 것과 같다. 천지의 기가 인온 (氤氳) 하여 개벽함에 그 묘함이 무궁하니 누가 그것을 주재하는가. 무주재(無主宰) 의 공효, 운와천행(雲臥天行)은 내가 감히 의론 할 것이 못 된다. 순일함을 지켜 조화에 거함이 1,200여년이로다!
      (崎門의 유자 아마기 지츄(天木時中)의  주: 코끝의 흰 부분- 주목하여 가만히 거기에 마음을 모으면 이런 저런 망상이 생겨나지 않게 된다.
      인온(氤氳) 하여 개벽(開闢)함 - 천치의 기가왕성하게 되어 열려서 나감. 운와천행(雲臥天行) - 구름을 타고 하늘을 난다. 선(仙)술의 최고 경지.)
      주자는 정좌하여도 잡념이 제거되지 않을 때에는 조식법을 사용하여도 해가 되지는 않을 것이라 언급했다 한다. 야마자끼는 물론 조식잠을 인정했다.
      오까다 교수는 퇴계도 언급하고 있다. "조선의 유명한 주자학자 이퇴계에 의하면, 「조식잠」은 비식(鼻息)의 출입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는 심기의 병에 걸린 적이 있었는데, 아무리 해도 낫지 않자, 이 조식잠을 실천하여 큰 효험을 보았다고 한다. 그 후 병만이 아니라 마음을 기르는 데도 이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日本의 전 近代의 유학을 명치시대 이후의 근현대로 연결하는 접점에 있는 유학자가 쿠스모또 탄잔(楠本端山)이다. 그에게 특별한 관심을 갖는 것은, 그가 주자, 퇴계, 안자이의 거경(居敬)을 중시하였지만, 정좌를 근간으로 하고 있어서이다. 敬은 정제엄숙을 말하고 정제엄숙의 법은 정좌가 가장 좋다고도 했다.
      오늘의 청소년들이 참고하기 좋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요즘 간편한 방법을 알았다. 학문의 도에는 주경(主敬)과 궁리의 두 가지가 있다. 그 가운데 주경은 물론 동정(動靜)을 관통하지만 그 방법은 하나로 한정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초학자의 단적인 공부라고 하면 정좌(靜坐)이외에는 없다. 궁리는 물론 심의 내외를 관통하지만 그 방법도 많이 있다. 그러나 착실한 공부를 말하면 독서 이외에는 없다. 그것은 주자가 학문에 뜻을 둔 자들을 위해 세웠던 학습과정에 「반일(半日)정좌,반일독서」"라는 것이 있음을 보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주자는 제자들에게 정좌와 독서를 서로 다른 공부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면서, 독서를 해도 깊은 맛이 안 나거든, 책을 덮어 놓고 잠시 정좌하라고도 했다 한다. 오늘날의 수험생들이 요령만 안다면 크게 도움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참고를 위해 일본 유학의 崎門에 표준화 되어있는 「정좌법의 실제 수행법」 하나와, 「정좌법에 의한 7일간의 생활」을 들어 두겠다.

       정좌법은 ‘자리[坐]를 고요하게[靜]하는 것’으로 좌선과는 다르다. 좌선은 결가부좌하여 눈을 코끝을 보고 마음은 배꼽아래에 수렴하여 생각[念慮]을 끊는 것이다. 즉 좌선은 강제로 하는 것이지 한가하고 여유로울 때 하는 것이 아니다. 향 한 심지 또는 두 심지라고 정해놓거나 혹은 한 시, 두 시 등으로 정해서 하기 때문에 궁하고 막히게 되어 심이 엉켜 유행하지 못한다. 그리고  결국 심신을 사물화[死物化]시키고 만다. 정좌는 이처럼 시간이나 시각을 정하지 않고 아침이든 저녁이든 밤이든 사물에 접한 후 그 작용을 다 마치고 틈이 있을 때 또는 독서하고 필기하고 나서 틈이 있을 때, 여하튼 아무 것도 하지 않을 때 하는 것이다. 정좌를 하든 책상다리를 하든 그 때 있는 곳에서 자세를 편안히 하여 마치 호테이(布袋)* 가 앉아 있듯이 한다. 방글방글 웃는 듯한 마음을 가져 마음이 엉기지 않도록 느긋하게 하여 앉는다. 그렇게 해서 마음을 가라앉히면 여러 가지 일[事]들이 생겨나온다. 그것들을 무리하게 제거하려고 하면 안 된다. 느긋한 기분으로 천천히 제거하여 마음을 지그시 진정시키면 저절로 잡념이 그치게 된다. 만일 그것을 강제로 내리눌러 물리치게 되면 갑자기 그 흔적이 나타난다. 처음에는 졸릴 때도 있는데 그것은 심기[心氣]가 편안히 가라앉기 때문이다. 잠이 오면 ‘아차’ 하고 정신 차리면 된다.  *칠복신(七福神)의 하나로 배가 똥똥하며 항상 자루를 메고 있음.
                                     
    동[動]하여 조금 피로한 때에는 곧바로 7일간 정좌하여 마음을 안정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면 신체는 휴양되고 정신은 명석하게 되어 생명력이 충일하게 된다. 최초의 1일은 심신 모두 여유롭게 하여 졸리면 자는 등 아무 것에도 구애됨이 없이 자유롭고 즐겁게 되도록 힘쓴다. 그리고 기[氣]도 상쾌하게 되어 혼기[昏氣]가 완전히 없어지면 비로소 방에 들어가 향을 사르고 정좌한다. 정좌의 법이란, 이 마음을 깨워 항시 명각[明覺]하게 함으로써 마음이 다른 것에 분산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마음이 다른 것에 분산되지 않으면 정신은 자연히 수렴되어 본성에로 돌아가게 된다. 정좌하여 3일째가 되면 반드시 묘경[妙境]에 들어가는데, 4,5일째 쯤에는 가장 주의를 요하여 태만하고 게으름[怠惰]에 빠지지 않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식후에는 반드시 백보 정도 천천히 걷고, 육식을 많이 섭취하지 않도록 한다. 육식을 많이 섭취하면 마음이 점점 혼탁해진다. 잠을 자도 옷을 벗지 않는다. 자고 싶을 때는 자지만 눈이 깨면 바로 일어난다. 이렇게 하여 7일째가 되면 정신이 충일하여 병에도 걸리지 않는다.
     (이상 정좌의How to는 일본의 나가사끼현 교육위원회(長崎県教育委員会)가 출간한 岡田武彦著、서강대교수 鄭址郁 역의 「坐禅과 靜坐」(문사철출판)에서 참고와 인용을 많이 했음을 특기해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