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첫째날. 전직대통령의 투신자살과 간결한 유언장에 온국민이 충격을 받았다. 놀란국민들은 봉하로 달려갔고, 그의 죽음앞에 망연자실했다. 세상에 이런일이 일어나다니…

    둘째날. 격앙된 지지자들이 대척점에 있었던 정치인들의 조문을 막았다. 이 정권에 대한 적개심과 복수심이 여과없이 표출되었다. 이 정권은 말을 아끼고, 여당 정치인들은 몸을 사렸다. 야당 정치인의 목소리는 커지고 지지자들의 목소리는 더욱 격앙되어갔다. 조용한 가족장으로 치러질것 같던 장례절차가 국민장으로 승격되었다.

    셋째날. 유족과 장례위원들은 봉하마을에서 발인하려던 계획을 경복궁으로 변경하였다. 유례없이 많은 대규모 장례위원들이 선정되고 시청에도 시장에도 역전에도 전국적으로 빈소가 차려졌다. 100만명에 육박하는 장삼이사들이 조문을 다녀갔다. 

    넷째날. 빈소 숫자가 부쩍 늘어났다. 사람들이 몰리는 빈소는 추모글로 뒤덮였다. 이 정권을 타도하자는 구호와 함께 이명박 탄핵서명을 받고 있다. 조문정국을 전국으로 확대시키고 국상이라는 정서를 이용하려는 뭔가가 느껴진다. 조용한 추모가 아니라 집단최면같은 낯설음이 느껴진다. 가까운곳에 빈소가 차려져 있으나 줄서있는 조문객들만 한시간 넘께 바라보다가 되돌아왔다. 감성이 여린 젊은이와 여성과 학생들이 대부분이다.

    다섯째날. 매스컴은 여전히 시끄럽다. 장례위원 숫자나 조문객 규모나 추모열기가 사상최대라며 최면을 유도한다. 신문을 펼치니 1면 전체가 추모와 조문뉴스로 며칠째 도배된다. 그의 죽음을 추모하는것이 아니라 억지로 미화하는 정도가 지나치다. 망자를 예우하는 정도가 아니라 엉뚱한 영웅 만들기라는 생각까지 든다. 웃기는 신문을 덮어버리고 뉴스 채널을 돌려버렸다.

    여섯째날. 객잔에서 손님끼리 말다툼이 벌어졌다. 조문하고 온 사람과 조문하지 않은 사람이 티격태격한다. 대통령의 자살은 대한민국의 개망신이라는 사람. 이 정권의 정치보복이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사람. 한사람은 부끄러운 자살이고 한사람의 주장은 거룩한 순교였다. 나는 오늘도 뉴스채널을 보지 않았다.

    일곱째날. 뉴스가 보기싫어 종일 TV를 꺼놓을 것이다. 인터넷의 검은 휘장도 보기 싫어 곧바로 토론방만 클릭해 버렸다. 음습한 그림자가 드리워진 서울하늘을 바라보니 우울하고 답답하다. 지금쯤 수천개의 만장을 앞세우고 수원 연화장으로 오고있는 중일 것이다. 그뒤에 빵빠레를 울리는 폭주족같은 무리들이 뒤따르고 있을 것이다. 연화장으로 가자면 아마 내집 앞 큰도로를 지나갈 지도 모르겠다.

    ‘누구도 원망마라’고 했던 그의 유언은 또다른 갈등과 분열의 씨를 뿌렸다. 죽음이라는 자양분까지 공급받은 이 씨앗은 혼돈을 잉태한 채 벌써 싹을 틔웠다. 누구도 원망마라는 유언을 하면서 정작 자신은 죽음으로 보복했다. 용서를 말하면서 정작 자신은 그 분노를 도저히 용서하지 못했다. 화해와 통합을 이야기하며 충돌과 파열음을 부르는 극단의 방식을 택했다. 어느쪽이 진심인가 되묻지 않을수 없다. 그의 죽음은 자살인가 순교인가.

    나에겐 이제 의미가 없어졌다. 몸에 맞지않고 분수에 넘치는 삶을 선택받았다가 그 중압감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 로 목숨을 끊은 자연인일 뿐이다. 그는 대통령으로 선택했던 국민들에게 낯을 들수 없을 정도의 부끄러움을 남겼다.  자신이 5년간 책임졌던 이나라에 이사회에 큰 생채기를 남기고 갔다.

    그는 비겁했다. 앞으로 우린 또 그 비겁함과 얼마나 싸워야할지 모르겠다. 2009년 05월 29일

    <객원칼럼니스트의 칼럼 내용은 뉴데일리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