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002년 민주화보상심의위원회가 동의대 참사 관련 학생들을 민주화 유공자로 선정했을 때 한편에 물러서서 이를 답답한 표정으로 보는 시선이 있었다.

    1982년 3월18일 오후 일어났던 부산 미국 문화원 방화사건의 주역이었던 문부식(당시 계간지 ‘당대비평’ 편집위원)씨가 그였다.

    문 씨 등은 광주사태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묻는 구호를 외치며 문화원 입구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질렀다. 그 사건으로 동아대생 장덕술 군이 안타까운 목숨을 잃었다. 문화원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장군은 불이 나자 미처 빠져나오지 못하고 질식사했다. 당시 고신대 신학과 4학년이던 문 씨는 사형 선고를 받았고, 6년 9개월만인 1988년12월 석방됐다. 그 뒤 시국사건과 관련해 한 차례 더 옥고를 치렀다. 그의 부산 미 문화원 방화사건은 80년대 반미운동의 선구적 사건으로 운동권 내에서 높이 평가됐다.

    하지만 문 씨는 이 사건에 대한 민주화보상을 요구하지 않았다.

    문 씨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주위에선 신청하자는 권유도 있었지만 우리 행동으로 인해 무고한 인명이 희생됐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보상신청을 해서는 안 된다는 내면적 합의가 있었다. 무고한 죽음 때문에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최대 행복은 보통 사람의 반이라는 자책감을 갖고 있다”고 답했다.동의대 사태가 민주화보상심의위에 의해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된 지구 가진 인터뷰였다. 거기서 그는 ‘깜짝 발언’을 해 보수와 진보 모든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동의대 사건은 사람이 희생됐다는, 생명과 관련됐다는 점에서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과 비슷하다”며 “경찰이 7명이나 사망한 사건인데 현장에 대한 진실 입증에 앞서 관련자들이 ‘정치적 인정투쟁’이라고 할 수 있는 민주화운동 보상신청을 먼저 낸 것은 잘못”이라고 말했다. 결과적으로 그 사건으로 죽어간 경찰과 유족들을 공격하는 결과를 빚었다는 점에서 희생자들에 대한 인간적 예의가 보이지 않는다는 지적이었다.

    문 씨는 “우리 안의 폭력을 성찰할 때만이 제도권의 폭력도 제대로 성찰할 수 있으며, 그 부당성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며 국가의 폭력만 비판하고 운동권의 폭력성은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진보진영의 자세를 비판하기도 했다.

    문 씨는 민주화보상심의위원회의 동의대 사건 관련자 처리 역시 정면으로 비판했다.

    그는 “동의대 사건 관련자들은 민주화운동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경찰관 7명이 죽은 것과 관련하여 사법적 처벌을 받은 것”이라며 “심의위원회가 화재 진상 규명을 하기에 앞서 이 사건을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한 것은 성급한 일”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당대' 편집인을 지낸 문부식씨는 현재 시인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