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나라당 최구식 의원이 무소속 이회창 후보를 향해 "그는 우파였던 적도 없고 안보에 관심을 가졌던 적도 없다"면서 "눈치 보는 기회주의자였을 뿐"이라며 맹비난을 쏟아냈다.

    최 의원은 7일 한나라당 홈페이지에 올린 글에서 "그가 출마의 가장 큰 이유로 안보와 북핵문제를 들고 일부 언론도 말만 갖고 마치 그가 우파의 대표주자인 것처럼 쓰지만 사람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판단해야 한다"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그가 운이 좋은 것은 틀림없는 것 같다. 나라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는데도 책임추궁은 커녕 세 번째 출마할 만큼 건재하다"고 토로하면서 "많은 분들이 그가 한 때 뛰어난 지도자였다고 말하지만 당시 출입기자로 취재했던 나는 그가 한 일 중 나라에 도움이 되었던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높은 자리에서 교만하게 국민을 내려다보고 탕탕 큰소리치며 권력을 누린 것 말고 무슨 일을 했는지 모른다"고 비난했다.

    최 의원은 이어 "정치는 결과로 말한다. 이회창씨야말로 좌파정권 출범의 최대 공신"이라고 규정하면서 "대한민국을 좌파 손에 넘겨 대못질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면 당장 사퇴해야 한다. BBK 발표로 물러날 명분도 충분히 확보되지 않았느냐"고 주장했다.

                                                  <최구식 의원 발언전문>

    작년 12월 의총에서 이회창씨에 대해 발언한 적이 있다. '상유십이 순신불사(尙有十二 舜臣不死)' 운운하며 본인을 충무공으로 착각할 때였다. 그 때 끝에 이렇게 말했다. "발언 준비하면서 많이 참았다. 인간적인 정리로 참고 있는 후배로부터 더 지독한 말 듣지 않게 되기를 빈다"

    11월 7일 출마 선언 후 1개월간 정말 많이 참았다. 하지만, 더 참다간 역사에 씻을 수 없는 대죄를 지을 것 같아 이 자리에 나섰다. 

    요즘 그의 언행을 보면 황당무계한 것이 많다. 특히 안보가 그렇다. 출마의 가장 큰 이유로 안보와 북핵문제를 들고 일부 언론도 말만 갖고 마치 그가 우파의 대표주자인 것처럼 쓴다. 하지만, 사람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판단해야 한다. 내가 알기로 그는 우파였던 적도 없고 안보에 관심을 가졌던 적도 없다. 눈치 보는 기회주의자였을 뿐이다. 예를 들겠다.

    1. 2001년 '대북지원 제한법'이 제안됐다. 일정규모 이상 대북지원에 대해 국회 승인을 받도록 해 무조건적인 퍼주기를 방지하자는 취지였다. 이회창씨가 막았다. 법안을 추진했던 의원은 2002년 인터뷰에서 "이회창씨는 정부의 무분별한 대북지원에 제동을 걸 기회가 여러 번 있었지만 그걸 다 차버렸다. 지금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그럴 힘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2. 한나라당이 '조건없이 쌀 2백만섬을 북에 지원하자'고 먼저 제의했던 일이 있다. 이견이 있었으나 이 씨가 '인도적 지원에 무슨 조건이냐'고 밀어부쳤다. 문제가 되자 아랫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했다.

    3. 서해교전도 군사적인 관점, 사고라는 측면에서만 보았을 뿐 원인을 제공한 햇볕정책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안했고 기자회견도 안했다. 

    4. 건강보험 통합, 교원정년 등 주요 정책들에 대해 그는 늘 우물쭈물하며 눈치만 살피다 여론에 따라 쉽게 입장을 번복했다. 그 때문에 당의 노선은 늘 우왕좌왕했다. 많은 좌파정책들이 그 때 막으려면 막을 수 있었다.

    5. 2001년 김만제 당시 정책위의장이 김대중 정권에 대해 사회주의, 포퓰리즘 논쟁을 시작해 큰 이슈를 만들었으나 그는 표 떨어진다며 반대했다. 김 전의장은 그에 대해 "그 때 그 때 여론에 따라 입장을 자꾸 바꾼다. 그런 점에서 포퓰리스트다. 이념을 찾기 힘들다"고 했고 대통령학을 전공한 함성득 교수는 "말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이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6. 2002년 대선 때는 촛불집회장을 기웃거리다 망신만 당했다. 당시 조갑제씨는 "이회창 씨는 정치적 생명 뿐 아니라 물리적 생명까지 걸어야 할 입장이다. 이번에 또 지면 우파에서는 이길 수 있는 선거를 두 번이나 짐으로써 괴로운 10년을 안겨준 사람으로 규정하여 매장시킬 것이다"

    하지만, 물리적 생명은 커녕 그와 가족들은 여전히 호의호식하며 산다. 보도에 따르면 1차 패배 후에는 당시 35세였던 큰아들(44)이 55평짜리 아파트(현시가 18억)를 샀고 2차 패배 후에는 당시 39세였던 작은아들(41)이 같은 동네에 46평짜리(15억)를 샀다. 100평짜리 빌라를 아래위층으로 세 채 구해 아들딸과 함께 살았던 것을 보면 가족 사랑이 각별한 모양이다. 수많은 국민이 직장에서 쫓겨나 피눈물을 흘리고 가족 동반 자살이 속출하는 와중에 그 가족은 그렇게 살았다.

    그가 운이 좋은 것은 틀림없는 것 같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좋은 집안에 장가갔고 22세에 고시 합격한 이래 평생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하고 싶은 일 다 하고 살았다. 나라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는데도 책임추궁은 커녕 세 번째 출마할 만큼 건재하다.  

    그는 2002년 정계은퇴까지 약 7년간 최고 자리에 있었다. 많은 분들이 그가 한 때 뛰어난 지도자였다고 말하지만 당시 출입기자로 취재했던 나는 그가 한 일 중 나라에 도움이 되었던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높은 자리에서 교만하게 국민을 내려다보고 탕탕 큰소리치며 권력을 누린 것 말고 무슨 일을 했는지 모른다. 자신을 따르던 당이 자신의 잘못으로 모든 것을 잃고도 오히려 차떼기, 부정부패, 기회주의, 수구꼴통으로 경멸당하도록 한 것 말고 무슨 일을 했는지 모른다. 원칙주의자라지만 무슨 원칙을 지켰나. 지금 그가 하는 일 중 원칙에 조금이라도 맞는 것이 어디 있나. 과거 우물쭈물 기회주의자였다가 지금은 교활한 기회주의자가 됐다고 보는 것이 맞겠다.

    정치는 결과로 말한다. 이회창씨야말로 좌파정권 출범의 최대 공신이다. 그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김대중, 노무현 정권이 내리 탄생할 수 있었겠나. 그런 그가 이제 3기 좌파정권 창출의 기수가 됐다. 대한민국을 좌파 손에 넘겨 대못질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면 당장 사퇴해야 한다. BBK 발표로 물러날 명분도 충분히 확보되지 않았나. 

    사퇴하리라 믿으면서 오늘은 일단 이 정도로 맺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