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신문 12일치 '편집국에서'란에 이 신문 여현호 국내부문 편집장이 쓴 '한나라당, 관리한다고 될 일인가'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과거에서 배운다’는 말이 있다. ‘학습효과’다. 다 이길 것 같았던 두 차례의 대선에서 진 한나라당도 나름대로 학습효과를 얻은 것 같다. 무엇보다 매우 조심스럽다. ‘부자 몸조심’이 따로 없다. 어떤 현안이든 압도적으로 우세한 현재의 지지율 구도를 흔들지나 않을까라는 잣대에 비쳐보고, 또 그럴 위험을 미리 차단한다는 방어 차원에서 반응한다. 그 주변 세력이나 지지자들도 비슷하다. 

    최근의 검증 논란이 그런 예가 될 수 있다.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1996년 국회의원 선거법 위반 사건에서 위증 교사를 한 게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을 때, 이 전 시장 쪽은 ‘제2의 김대업 사건’ 아니냐며 맞받아 나섰다. 지난 대선 때 병역 공방으로 이회창씨가 상처를 입고 패배한 전철을 떠올리는 ‘내부 경고’였다. 효과는 즉각적이었다. 의혹을 제기한 쪽이 오히려 ‘해당행위’라는 비난을 받았다. ‘집안 싸움’을 만들지 말라는 당 안팎의 은근한 압력이 그 배경이 됐다.

    한나라당은 소속 대선주자들의 도덕성과 정책을 검증할 ‘국민참여 검증위원회’를 만들겠다고 밝혔지만, 곰곰이 살펴보면 역시 이런 맥락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 보인다. 한나라당은 검증위를 외부인사 위주로 구성한 뒤, 그동안 제기되는 각종 소문 등을 다 끌어모아 각 주자들이 ‘해명’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조사’가 아니다. 그 기간도 경선 전 한 달 정도로 하고, 검증 과정도 경우에 따라 비공개로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질서있는 검증’이 되도록 ‘관리’하겠다는 얘기다. 더 솔직한 설명도 흘러나온다. 앞으로 예상되는 여권의 네거티브 공세에 맞서 미리 ‘김빼기’를 하기 위해서라도 당 차원의 검증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대선 때까지 남은 아홉달을 조심조심 버티면 한나라당이 이길 수 있을까. 쉽지만은 않을 것 같다. 우선, 방어와 관리만으론 버틸 수가 없다.

    당장 열린우리당이 유력 대선주자들의 부동산 투기 의혹과 부동산 정책 등을 검증할 특별기구를 구성하겠다고 나섰다. 당을 가리지 않겠다고 했으니, 공격의 방향도 뚜렷하다. 대선주자들이 정치인이나 시장·도지사로 쌓은 업적과 행적은 아직 본격적인 검증의 도마에 오르지도 않았다. 애써 만들어온 좋은 이미지나 신화가 있다고 해도, 허점과 과실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제한된 청중을 대상으로 한 해명을 통해 면죄부를 주거나, 우호적인 세력이 눈감아 준다고 해서 덮여질 일이 아니다. 선거판에선 뭐든 한번 물꼬가 트이면 걷잡을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은 지난 두차례의 대선에서 충분히 드러났다. 인력으로 선거 상황을 ‘관리’한다는 게, 헛된 희망이라는 얘기다.

    한나라당이 과거에서 제대로 배워야 할 이유는 또 있다. 이회창씨가 지난 대선에서 크고작은 의혹이 터질 때마다 휘청이었던 것은, 당시 당이 대처를 잘못했기 때문이라기보다 그의 정치적 자산이 ‘깨끗함’이었기 때문이다. 이번 대선의 선두주자인 이명박 전 시장이 최근의 검증 논란에도 지지율에 큰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은, 지금의 압도적 화두가 경제살리기이고 그가 그럴 수 있는 사람으로 비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사람들이 그에 대한 의혹 제기에 지금처럼 ‘그래서 어쨌다고?’라며 눈을 반쯤 감아주는 대신 ‘그건 이야기가 다르지 …’라는 반응을 보이면 상황은 달라진다. 또 그가, 또는 한나라당이 내세운 경제살리기 비전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면 바람은 정반대로 불 수 있다. 대선까지 남은 기간 경제 대신 남북관계 등 다른 문제가 핵심 쟁점이 된다면 구도 자체가 바뀔 수도 있다. 모두 원내 제1당인 한나라당이 제대로 된 검증을 서둘러야 할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