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한 핵문제 해결을 위한 6자회담 합의문이 2월 13일 타결, 채택되었다. 6자회담 참가국들은 이날 1) 북한이 60일 이내에 영변 핵시설을 폐쇄(shutdown) 및 봉인(seal)하며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관의 입북을 허용하는 대신 한국은 북한에 중유 5만t 상당의 에너지를 우선 지원하고 2) 참가국들은 모든 현존하는 핵시설의 불능화(disablement) 기간 중 중유 100만t 상당의 에너지, 경제적, 인도적 지원을 제공하며 3) 한 달 이내에 한반도 비핵화, 대북 에너지 및 경제 지원, 동북아 안보협력, 북미관계 정상화, 북일관계 정상화 등 9·19 공동성명에 규정된 5개의 실무그룹(working group) 회의를 구성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9·19 공동성명 초기이행조치 합의서'를 채택했다.

    그러나 이번 합의 과정에서는 북한이 이미 개발한 핵무기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없었을 뿐 아니라 불능화의 명확한 의미와 핵 프로그램의 신고 시한을 확정하지도 않은 채 북한이 이들 조치를 이행하는 속도에 맞춰 대북 지원을 조절하도록 한 것이 큰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이는 향후 북한 핵문제의 해결 과정에서 두고두고 발목을 잡는 문제로 대두될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북한은 지난해 10월 9일 핵실험 이후 핵무기 보유국임을 선언한바 있고 우리 정부도 북한이 최소한 핵무기 1, 2개를 제조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는 상황이다.

    또한 불능화에 대해 합의문에는 단지 "핵 시설 폐쇄와 북한의 모든 핵 프로그램에 대한 완전한 신고와 흑연감속로 및 재처리 시설을 포함하는 모든 핵 시설의 불능화"라고만 규정되어 있어 구제척인 방법과 시기에 대한 논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북한 관영 조선중앙통신이 13일 "조선의 핵시설 가동 임시 중지와 관련해 중유 100만t에 해당하는 지원을 받기로 했다"고 보도하면서 핵 불능화와 핵 프로그램 신고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은 점은 이를 뒷밭침한다.

    따라서 이번 합의는 9·19 공동성명에 명시된 '완전한 핵포기'와는 거리가 멀다. 이번 합의는 단지 시간에 쫓겨 '핵 비확산'을 우선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미국 부시 행정부의 입장을 충족시키는 합의일 뿐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모든 핵무기와 핵시설에 대한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고, 돌이킬 수 없는 방식의' 폐기를 위한 합의가 아니다. 결국 이번 합의는 북한이 핵시설을 동결하고 국제사회가 대체 에너지를 제공하는 것을 내용으로 했던 1994년 제네바 합의의 재판이 될 가능성이 크다.

    이에 따라 이미 중유 100만t 상당의 지원과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동아태담당 차관보와의 베를린 협상을 통해 마카오 방코델타아시아(BDA) 은행 동결자금의 일부 해제를 확보해 놓은 북한이 지원만 받고 핵문제의 근본적 해결은 거부할 가능성이 상존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번 합의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마음을 먹는 순간 북한 영토 내에 있는 핵 시설 재가동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게다가 우리가 떠맡게 될 경제적 부담도 만만치 않다. 6자회담 참가국의 합의 의사록에는 대북 지원비용은 참가국들이 "평등과 형평의 원칙에 따라 분담"하기로 합의했지만 우리는 중유 5만t에 해당하는 최초 지원 160억원과 나머지 중유 95만t에 해당하는 균등 분담금 490억원을 포함하여 650억원 상당의 부담을 떠맡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납치자 문제 해결을 전제로 추후에 지원할 수 있다는 입장이고 러시아도 각국의 부담은 이해관계 순서에 비례해야 한다는 입장이어서 상황의 전개에 따라 우리가 떠맡게 될 부담은 더욱 커질 전망이다.

    이와 같은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이번 합의에 따라 작년 7월 북한 미사일 발사 실험 이후 8개월 동안 중단되었던 남북관계도 본격적인 회복 국면에 접어들 것으로 보인다. 스페인을 방문 중인 노무현 대통령은 이날 "이번 합의에 대해 신속하고 원만한 이행을 위해 필요한 조치를 즉각적으로 취해 나갈 것"이라고 말한 점이 이를 입증한다. 남북관계 회복은 제2차 남북정상회담의 발판이 될 것이 틀림없다. 노 대통령은 1월 25일 신년회견에서 "6자회담과 남북정상회담은 순차로 이뤄져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전문가들 또한 이번 합의는 실제 개최 가능성과 관계없이 남북정상회담 추진을 위한 좋은 여건이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노대통령이나 김정일의 입장에서 볼 때 남북정상회담은 대단히 중요한 정치적 이벤트로 부상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이들의 최대 관심사가 12월 대통령선거에서 한나라당의 승리를 저지하고 '친북좌파(親北左派)' 정권의 재창출에 유리한 상황의 조성에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6자회담의 합의를 도출해야 할 절대적 필요성에 직면했던 김정일은 이번 6자회담을 통해 북한이 이미 확보하고 있는 핵무기와 플루토늄을 즉각 포기하지 않고도 전략적 가치가 떨어진 영변 핵시설을 '협상 카드'로 사용하여 영변 원자로 폐쇄, IAEA 사찰 수용과 에너지 제공, BDA 은행 동결자금 해제를 교환하는 방식의 합의를 이끌어 낸 것으로 보인다. 이번 합의는 이라크 사태와 민주당의 정치공세에 시달리면서 시간에 쫒기고 있는 부시 대통령의 입장에서도 마다할 이유가 없는 것이기도 하다.

    이상에서 보듯이 6자회담을 통해서는 북한 핵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이 더욱 명백해 지고 있다. 결과적으로 이번 합의는 북한 핵문제의 해결은커녕 오히려 남북정상회담의 성사 가능성을 높여 대한민국의 사활이 걸려 있는 12월 대통령선거에서 '친북좌파' 정권의 재창출을 도와주는 아이러니를 범하게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게 되었다. 6자회담의 모자를 쓰고 북한과 미국의 급박한 상황이 맞물린 흥정에 따라 이루어진 이번 합의의 댓가는 엉뚱하게도 대한민국의 발목을 잡는 일로 연결될 가능성이 점차 커지고 있다. 국민들의 진정한 각성이 요청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