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왕조 500년 동안 내려온 유교문화의 영향과 왕조시대에 대한 향수가 있어서 일까 오랫동안 ‘지방’은 ‘중앙’에 대한 열등의식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아직도 약간은 그런 경향이 남아있지만 이제 그것은 과거형이 되어가고 있다.

    교통·정보의 발달은 옛날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세상을 바꿔 놓았다. 꼬박 하루나 한나절이 걸려서 상경(上京)한다는 것은 전설속의 이야기가 되었다. 얻고자 하는 정보도 인터넷의 바다에 들어가면 언제 어디서나 즉시 손에 넣을 수 있게 되었다.

    어떤 산촌·농어촌에 가도 슈퍼에는 대도시에 있는 그것과 똑같은 물건이 즐비하고 값도 전국이 비슷한 세상이 되었다. 농도(農道)는 포장되었고 논밭사이를 차량, 농기계가 달리고 있으며 가정에는 각종 전기 전자제품이 갖추어져 있다. 이미 ‘지방’과 ‘도시’의 거리는 없어진 것이나 다름없다.

    바야흐로 생활환경면에는 지방과 도시의 차이가 없다. 있다면 ‘질의 차이’ 뿐이다. 질적인 면을 말하자면 오히려 지방 쪽이 훨씬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다. ‘고향’이라는 말이 갖는 평온감, 그리고 넉넉한 인정과 푸르른 산하, 깨끗한 물, 맑은 공기, 지방에는 이미 도시가 잃어버린 ‘환경과 개성’이 살아 숨쉬고 있다.

    이제 지방이 중앙을 뒤쫓아 가는 시대는 끝났다. ‘중앙이 변화하면 지방도 따라간다’고 하는 종래의 사고패턴을 전환시켜야 한다. 지방 스스로 중앙에 대한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야 한다. ‘대기업병’이라는 말이 있듯이 ‘대(大)’는 변화하기 어렵다. 공룡이 지구상에서 멸종한 것도 그 큰 몸체를 주체할 수 없었기 때문이며 환경의 변화에 둔감하여 대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소(小)’는, 지방이야말로 그 유연한 조직의 이점을 살려서 변화와 혁신의 선두에 설 수 있다. 시대의 바람은 지방편이다. 그것은 바로 ‘생산자에서 소비자로’라는 시대의 도도한 흐름이다. 소비자의 수요를 피부로 느끼고 정확하게 대응할 수 있는 것은 누구인가. 국가도 아니요 중앙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소비자와 가장 가까이 있는 지방(시·군·구)인 것이다.

    시·군·구 행정이야말로 소비자를 위한 최전선이다. 그것을 ‘말단행정’이라고 말하는 것은 ‘중앙의 논리’에 불과한 것이고, 지방 스스로가 비하시키는 것은 언어도단(言語道斷)이다. 지방은 바로 ‘삶의 자리’이다. 지방이 망가지면 우리의 삶이 망가진다.따라서 지방은 중앙과 지방을 역전시킬 수 있다는 ‘역(逆)발상’을 가져야 한다. ‘가장 지방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라는 신념이 필요하다.

    전국 어느 곳을 가도 똑같은 공원, 그네, 폐타이어를 반쯤 묻은 놀이터를 볼 수 있다. 획일적인 공공시설은 창조성이 결여된 중앙행정 문화의 산물이다. 이것은 중앙이 지방의 개성을 무시한 채 종이와 연필만으로 청사진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지방에는 지방의 문화에 맞는 특징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없으면 지방의 매력과 향기 자체가 사라진다. 지방행정이 중앙의 매뉴얼로서 기능하던 시대가 끝났다. 우리의 더 나은 삶을 위해서는 지방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지방발(發)’ 기획, 아이디어, 프로젝트를 줄줄이 중앙정부에 쏟아 넣어야 한다.

    21세기는 국경과 경계선이 없는 무한경쟁의 시대이다. 21세기의 ‘선진 한국’을 생각할 때, 지방의 뒷받침이 없는 국가발전전략은 공허한 메아리로 끝날 수밖에 없다. 지방인이야 말로 내일의 한국을 걸머져야 할 사람이다. 바야흐로 지방인이 나설 차례이다.

    지난날에는 ‘서울에서 살면서 서울에서 일하고 싶다’고 하던 젊은이들이 현재는 ‘지방에 거주하면서 서울에서 일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이제 이들을 ‘지방에서 살면서 지방에서 일한다’로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시급하게 지방의 수용기반(收容基盤)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무엇보다 젊은이들이 지방에 남도록 해야 한다. 출향인사들이 귀향할 수 있는 유인을 제공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자라나는 어린이들이 고향에 대한 긍지와 고향의 장래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꿈을 실현할 수 있는 ‘지방 만들기’가 필요하다.

    봉화출신으로 국회 경제과학·내무위원장을 역임한 오한구(吳漢九) 전의원은 “성공한 지도자의 상당수가 지방출신이기 때문에 손자·손녀들이 자연과 호흡하며 유년시절을 보낼 수 있도록 지방에서 공부시킨다”는 ‘지방교육 철학’을 가진 분이다. 지도층 인사들이 ‘지방 만들기’를 앞장서 실천하고 있는 좋은 사례라 하겠다.

    필자는 ‘지방의 시대’를 활짝 꽃피우고 풀뿌리 민주주의를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중앙정부에 대해서 ‘성가신 존재’들이 지자체의 수장이 되었으면 한다. 국정의 다양한 경륜과 인적 네트워크를 갖추고 있는 총리, 장관, 국회의원을 역임한 분들이 시장, 군수, 구청장직을 수행하는 행정문화가 정착될 때 지방자치는 더 발전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