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토방 시민논설위원 '자유야'님이 쓴 '시간이 지워진 아해들'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쓸 생각이 없었는데, 열이 받아서 쓴다.

    안티조선운동도 도를 넘었지만, '안티조선운동 도를 넘었다'에 대한 댓글도 도를 넘었다. '안티조선운동 도를 넘었다'란 글을 다음 아고라에 올렸는데, 거기에 달린 댓글이 400여개가 넘고 그 중 90% 정도는 방우영 회장에 대한 테러가 잘했다는 식이다.

    다움 아고라가 좌빨들의 놀이터라는 거 진작에 알고 있던 터이지만, 이렇게 대놓고 테러를 옹호하는 데에는 문제가 많다. 그러니 김원웅같은 게 나서 조선일보 방우영 회장에 대한 테러를 잘했다고 설레발을 떠는 걸 거다. 그게 여론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니까. 빙신 새끼.

    테러를 옹호하는 것은 쓰레기들이나 하는 짓이다. 한국사회에 쓰레기들이 이렇게 많다는 걸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하긴 쓰레기란 원래가 많게 마련이겠다. 사람이 움직이면 반드시 쓰레기가 양산되게 마련이니까. 문제는 누가 쓰레기를 치우냐일 뿐이다. 쓰레기를 양산한 주체가 쓰레기를 치우는 게 마땅하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청소부가 치우는 수 밖에는 없다. 본인이 글을 올리고 본인이 청소부까지 자임해야 하는 게 우습지만, 어쩌랴, 저리 많은 쓰레기를 방치만 하고 있을 수는 없지 않는가.

    댓글들을 눈여겨보지는 않았지만, 대강 훑어본 바로는 참 가관이라는 느낌이다. 일단은 테러의 위험성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테러를 안중근의사의 의거쯤으로 생각하는 논지를 보이고 있다는 건데, 멍텅구리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런 논지를 가질 수 있는지 본인으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멍텅구리야 그렇다 치고, 이런 논지는 확장되면, 바로 댓글 단 사람들 자신, 아버지, 어머니, 모든 가족에 대한 테러도 정당화된다는, 그런 위험성을 지닌 논지라는 걸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게 놀라울 뿐이다.

    그러나 가장 문제되는 건 댓글 단 아이들의 인식구조 속에서 시간이 지워지고 있다는 점이다. 얘들은 조선일보 사주 방우영 회장에 대한 테러가 일제시대 독립투사들의 항일투쟁에 맞먹는 일쯤으로 인식하고 있는 듯한 착각을 보이고 있다. 항일투사에 대한 모욕도 이런 모욕이 있는가. 이들은 항일투사들의 행적을 테러리스트로 만들고 있다. 항일투사의 행적과 방우영 회장의 테러를 동일시함으로써 그렇게 하고 있다. 항일에는 빼앗긴 나라라는 부당한 현실이 전제되어 있는 거고, 빼앗긴 나라를 되찾자는 사물의 본성에 기반하고 있는 것인데, 방우영 회장의 테러에 이런 전제가 있단 말인가. 방우영 회장이 대한민국이란 나라를 빼앗았고, 그래서 대한민국이란 나라가 이 지구상에서 소멸되기라도 했단 말인가. 도대체 어떻게 이런 전제가 좌빨들의 뇌리 속에서 성립할 수 있는 건지, 이런 전제를 드러내놓고 자랑할 수 있는 건지, 그 물음에 대한 답은 차치하고라도, 이건 지나치게 자신의 잘못된 행위에 대한 정당화이다. 돌아가신 항일투사들에 대한 모욕이다.

    이런 엉뚱한 인식구조를 갖게 되는 건 댓글 단 아이들에게서 시간이 지워진 탓이다. 얘들의 시간은 일제시대에 머물러 있다. 일제시대에 받은 피해가 너무 커 트라우마를 갖게 되었고, 그 트라우마가 얘들의 육체적 정신적 성숙을 가로막은 탓이다. 너무 심한 트라우마는 그 트라우마의 대상에게서 시간관념을 상실케 만드는 수가 많다. 시간이 흐르지 않고 트라우마를 입은 그 순간으로, 모든 시간이 집중하고 더이상 흐르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트라우마란 여기에 노출된 인간들에게 불랙홀과같은 역할을 한다. 불쌍한 일이기도 하고 문제적인 일이기도 하다.

    댓글단 얘들이 상처를 입었고, 그래서 모든 시간이 그 상처를 입었던 그 순간으로만 되돌아가고 흘러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않고서야 안중근의사의 의거와 방우영회장의 테러 사건을 동일시할 수가 있단 말인가. 안중근의사의 의거가 1905년에 일어난 일이니, 벌써 100여년이 지난 일인 것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는데, 100여년이면 강산이 변해도 10번은 더 변했을 시간인 것이다. 실제로 우리 사회는 지나치다 싶을 만큼 변화했고, 변질된 게 사실이다. 강산이 10번이 아니라, 100번은 변했다고 느껴질 만큼 격세유전의 변화를 보였던 것이다. 변하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니, 변하지 않은 것도 있긴 있는 모양이다. 댓글 단 아해들의 상처, 트라우마 말이다. 시간이 더는 흐르지 않고 블랙홀에 빨려들어가듯 그 트라우마 속으로 시간이 자꾸 빨려들어가고 있는듯이 보이니 말이다.

    오늘날의 시대는 제국주의 시대가 아닌 것이다. 문화사의 쌩기초다.

    문화사에서는 문화주의를 셋으로 나눈다. 문화절대주의, 문화상대주의, 문화절충주의. 문화절대주의는 문화우월주의이며 제국주의이다. 19세기에서 20세기 초 열강들의 식민지 쟁탈전 시대가 문화절대주의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제1,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그에 대한 반성으로 도입된 게 문화상대주의이다. 각각의 문화의 특수성을 존중하고 어떤 문화가 더 우월하다는 입장은 성립될 수 없다고 보는 입장이다. 오늘날의 시대는 분명 문화상대주의에 기반하고 있는 문화이다. 그러나 문화상대주의에도 약점이 있는데, 콘센서스 즉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서 나온 게 문화절충주의였던 것이다. 인권과 같은 보편적 가치에 있어서만큼은 문화상대주의를 유보하고 문화절대주의적 입장을 취한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문화절충주의를 제국주의와 일체로 보는 것은 무지의 소치이며, 자기만의 집착이다.

    안중근의사의 의거는 분명 의거다. 그것은 제국주의, 문화절대주의시대에 일어난 사건이며, 제국주의에 맞서 벌인 독립운동행위임이 분명하다. 문화절대주의시대에 제국주의에 맞서 벌인 행위에는 테러가 성립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방우영 회장에 대한 폭력은, 테러이다. 문화절충주의 시대에 인신을 공격하는 정치적 행위는 모두 테러로 규정된다. 문화절충주의를 문화절대주의와 혼동하는 입장에서라면 안중근의사의 의거와 방우영회장의 테러를 동일시(?)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기는 한다. 그러나 이는 결락이요, '시간이 지워진 아해들'의 인식구조이다. 정신병에 가까운 것이라는 거다. 시간이 흐르질 않고, 제국주의에서 받았던 그 상처 속으로 시간이 끊임없이 되돌아가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댓글 단 아해들이나, 좌빨들은 안중근의사나 여타 독립투사들을 모욕하면 안된다. 제국주의 시대와 테러리즘의 시대를 동일시하고 이분들을 테러리스트와 동일시하는 것은 이분들에 대한 지나친 모욕이며, 테러리스트에 대한 지나친 정당화다. 이런 '시간이 지워진 아해들'같은 무뇌아적 행태는 반성하고, 그만두어야 한다. 김원웅이와 같은 엉터리 무뇌아가 방우영회장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해먹는 이런 일이 안생기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그래야 하는 일이다.

    <시민논설위원의 칼럼내용은 뉴데일리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