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신문 29일자 여론면에 언론인 김선주씨가 쓴 칼럼  <‘괴물’을 기다리며>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대통령선거가 1년도 넘게 남은 시점에서 성급한 이야기일 수는 있다. 그러나 지금 대통령후보로 거론되는 이들 가운데 아무도 영화 <괴물>같은 대박이 기대되는 인물이 없다. 

    우선 고건 전 총리와 이명박 전 서울시장을 보자. 두 사람은 나이가 있어 후일을 기약할 수 없다. 올인을 하고 있다. 둘은 전형적으로 반대되는 인물이다. 이씨가 대통령이 되면 전 국토는 파헤쳐질 것이다. ‘아무것도 안 하느니 악이라도 행하는 것이 옳다’라는 행동주의자의 철학에서 보면 이씨는 엄청난 일을, 그러니까 악을 저지를 수 있다. ‘악을 행하느니 가만히 있으면 보통은 된다’라는 철학에서 보자면 고씨는 아무것도 안 함으로써 보통도 안 될 가능성이 많다. 이씨가 대통령이 됐을 때의 양상은 눈에 보이는데 고씨는 언제나 모호했던 것처럼 아무것도 실체가 보이지 않는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는 대선에서 실패해도 정치적 생명은 끝나지 않겠지만 후일을 도모하기는 어렵다. 그도 올인이다. 놀라운 자기관리 능력이라는 장점은 속에 무서운 독기를 감추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의 부드러운 미소는 관용의 미소가 아니다. 싸늘하다. 백주에 얼굴에 테러를 당했을 때 나는 그의 아버지가 저질렀던 숱한 노골적 테러와 중앙정보부의 고문, 사법적 판결로 포장된 살인행위 등에 대해 정치인으로서 깊은 성찰과 반성을 하기를 바랐다. 그는 그것을 이용했다. 그의 반역사성을 거론할 필요도 없다. 보수언론이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한나라당의 사정으로 볼 때 보수언론은 아직도 생물학적으로 여자인 대통령이 나오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리라 보인다. 적절한 시점에 ‘팽’ 당할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과 손학규 전 경기도 지사가 있다. 당은 다르지만 어디 하나 빠지는 사람들이 아니다. 정의롭고 도덕적인 가치에 가장 부합한다. 똑똑한 것으로 치자면 그들의 학벌만큼이나 확실하게, 아니 그것을 뛰어넘는 자질을 가졌다. 역사의식도 나무랄 데가 없다. 그러나 세계 역사상 가장 도덕적이고 정의롭고 똑똑한 사람이 대통령이 된 적은 없다. 김씨의 뉴딜도, 손씨의 백의종군 민생투어도 좀체 국민 마음에 점화가 되지 않는다. 둘에겐 국민의 마음에 불꽃을 지필 2%의 무언가가 빠져 있다.

    정동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은 집권 여당의 지리멸렬에 책임이 있다. 웬만한 뒤집기 능력이 아니라면 퇴장할 가능성이 크다. 남은 것은 ‘노심’이다. 그러나 어떤 대통령도 후계를 점지하고 갈 수는 없다. 오히려 노심이 어디를 향하는지 드러나는 순간 그 대상에게 치명적인 약점이 된다.

    소위 민주화 세력이랄까 진보를 표방하는 세력들은 수십년에 걸친 민주화 세력의 정당성과 도덕성을 이 정권이 다 까먹었다고 탄식한다. 앞으로 이들을 어떻게 추슬러 역사의 정통성을 세워나갈 것인지를 두렵게 생각한다. 나도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다. 내년 대선이 지금의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대결구도로 치러지지는 않겠지만, 과거 유령들이 우글대는 한나라당의 후광을 입은 대표가 대통령이 돼도 뭐 세상이 그렇게 나빠지기야 하겠나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호사가처럼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1%도 안 되는 인지도를 갖고 있는 인물이라도 얼마든지 괴물처럼 될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다. 아직은 ‘필’이 꽂히는 사람이 없다. 이미 줄을 오지게 선 사람들을 빼고는 대부분의 국민이 그렇다. <괴물>이 대한민국 영화 사상 가장 잘 만들어진 영화는 아니지만 단숨에 천만 관객을 뛰어넘는 것을 보면서, 그렇게 완벽한 인물은 아니더라도 괴물이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 어디 없나 하고 요즘 대낮에도 등불을 쳐들고 다니며 어슬렁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