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은래(저우언라이) 비서이자 양녀 정설송(딩쉐쑹)… 1941년 정율성과 결혼정율성, 김일성의 연안파 숙청 때 저우언라이 도움 받아 중국으로 귀화광주 中총영사관, 홈페이지에 "정율성은 中 유명 작곡가" 중국인으로 소개
  • ▲ 북한 대외선전용 화보 '조선' 4월호는 1일 '인류자주 위업, 사회주의 위업의 승리적 전진을 위하여' 제하 기사에서 김일성 주석 생일(태양절) 111주년(4월 15일)을 앞두고 그의 대외활동을 조명했다. 사진은 1970년 4월 김 주석과 저우언라이 전 중국 국무원 총리. 2(북한 대외용 화보 '조선' 2023년 4월호 캡처) ⓒ연합뉴스
    ▲ 북한 대외선전용 화보 '조선' 4월호는 1일 '인류자주 위업, 사회주의 위업의 승리적 전진을 위하여' 제하 기사에서 김일성 주석 생일(태양절) 111주년(4월 15일)을 앞두고 그의 대외활동을 조명했다. 사진은 1970년 4월 김 주석과 저우언라이 전 중국 국무원 총리. 2(북한 대외용 화보 '조선' 2023년 4월호 캡처) ⓒ연합뉴스
    광주 출신 중국 3대 '혁명 음악가' 정율성(鄭律成·정뤼청)이 저우언라이(周恩來) 전 중국 총리의 사위였다는 사실이 주목받으면서 광주시가 강행하고 있는 정율성기념공원 조성사업'과 관련한 논란이 커지고 있다.

    정율성은 1941년 저우언라이 전 총리의 비서이자 양녀인 딩쉐쑹(丁雪松)과 결혼했다. 딩쉐쑹은 중국 관영매체인 신화통신의 첫 평양 주재 특파원, 중국의 첫 여성대사(네덜란드·폴란드 주재)를 지낸 중국공산당(중공)의 유력인사다.

    정율성의 장인인 저우언라이는 마오쩌둥(毛澤東)·류사오치(劉少奇)와 함께 '중공의 트로이카로' 군림한 중공의 2인자였다. 

    마오쩌둥이 반대파를 숙청하기 위해 1966년부터 10년간 대대적으로 '문화대혁명'(문혁)을 진행할 때 저우언라이는 '일타삼반(一打三反)운동'이라는 정치적 마녀사냥을 기획했다. 일타삼반운동은 중국 공산당이 문혁 과정에서 '반혁명분자'로 낙인찍은 지식인들 최대 20만 명을 마오쩌둥의 승인 아래 학살한 사건이다.

    저우언라이는 '한국전의 원흉' 중 하나로 꼽힌다. 6.25전쟁 당시 북한에 군수물자를 지원하고 구체적인 전술, 전투법까지 지시했기 때문이다. 1950년 4월부터 12월까지 9개월간 작성된 외교 전문 31건에 따르면 저우언라이는 국군의 '서울 수복' 8일 전인 9월20일 당시 북한 인민군 최고사령관이었던 김일성에게 "무조건 38선 이북을 지키라"고 지시하며 "적군(연합군)과 정면대치는 손실이 크니, 기동성을 발휘해 적군의 약점을 찾아내고, 연대나 대대 단위로 격리시켜 3~5배의 병력과 2배의 화력으로 궤멸시켜야 한다"고 주문했다.

    또 "화력과 장비가 우수한 미군을 공격하기 어렵다면 이승만 꼭두각시 부대(국군) 공격에 주력해 몇 개월마다 1, 2개 사단을 없애라"며 "미제(미국 제국주의)의 종들이 사라지면 미군은 고립되니 그때 각개격파하라"고 김일성에게 지시했다. 10월14일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게 폭격기 지원을 요청했고 소련 공군 참전에 따른 중국군과의 지휘체계에 대한 지침도 요구하기도 했다.
  • ▲ 북한 대외선전용 화보 '조선' 4월호는 1일 '인류자주 위업, 사회주의 위업의 승리적 전진을 위하여' 제하 기사에서 김일성 주석 생일(태양절) 111주년(4월 15일)을 앞두고 그의 대외활동을 조명했다. 사진은 1970년 4월 김 주석과 저우언라이 전 중국 국무원 총리. 2(북한 대외용 화보 '조선' 2023년 4월호 캡처) ⓒ연합뉴스
    이러한 저우언라이의 사위이자 중국 인민해방군 군가의 작곡가인 정율성을 주광주중국총영사관(中華人民共和國駐光州總領事館)은 홈페이지에 특집 코너까지 마련해 기리고 있다. 중국총영사관은 해당 코너에서 정율성을 "중국의 유명한 작곡가"로, 정율성의 아내 딩쉐쑹은 "신중국의 첫 여(女)대사"로, 딸 정소제(鄭小提)는 베이징바로크실내(北京巴羅克室內)합창단 단장이라고 소개한다.

    중국총영사관은 "중국 항일전쟁이 발발한 이후 정율성은, 가슴에 열정을 품고, 1937년 10월에 서둘러 연안(延安)으로 가서 계속해서 섬북공학(陝北公學)·노신(魯迅)예술대학 음악과에서 공부했다"고 전했다. 중국총영사관의 설명에는 빠져 있지만, 정율성이 당시 중국 공산당 실세인 마오쩌둥(1949년 주석으로 취임)·저우언라이(1949년 총리 취임)·주더(朱德, 1946년 인민해방군 총사령관, 1949년 부주석 취임)·왕쩐(王震, 1988년 전 부주석 취임) 등을 만난 것도 노신(魯迅)예술대학 음악발표회에서였다.

    정율성은 1938년 중국인민항일군정대학(中國人民抗日軍政大學) 음악 지도자, 노신음악대학 성악교사가 되며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 1939년 1월에는 중국 공산당에도 가입해 훗날 중공 인민해방군 군가(중국인민해방군진행곡)가 되는 '팔로군 대합창'(팔로군 진행곡'과 '팔로군 군가' 포함)을 작곡했고, 1942년 8월 태행산(太行山) 팔로군(八路軍) 총사령부 업무에 파견돼 조선혁명군정학교에서 교무부장을 맡아 '조선의용군행진곡' '혁명가' 등을 창작했다.

    1945년 일본이 항복하자 정율성은 중국 공산당 당 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아내와 딸(정소제)을 데리고 연안을 떠나 12월 북한 평양에 들어갔다. 1946년 황해도 도당위원회 선전부장, 1947년 조선인민군구락부 부장(군대문화부장)을 맡아 조선인민군 협주단을 창설하고 단장을 겸임했다. 1949년 조선국립음악대학 작곡학부장을 지내며 '조선해방행진곡' '조선인민행진곡' '조중친선(중소친선)'과 ' 동해어부' '두만강' 등을 작곡했다.

    정율성은 6·25전쟁 시기인 1950년 9월 장인인 저우언라이의 지시로 중국으로 소환됐다가 12월 한국전에 중공군으로 참전해 위문공연단을 조직해 중공군과 북한군을 위한 전선 위문활동을 했다. 그러다 1951년 김일성이 연안파를 대상으로 대대적인 숙청을 시작하자 불안을 느끼고 저우언라이의 도움을 받아 1956년 중국으로 돌아가 귀화했다.

    1976년 12월7일 베이징에서 고혈압으로 사망해 '중국혁명열사묘'에 묻힌 그는 중국 공산당이 200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60주년'을 맞아 선정한 '신중국 수립 영웅 100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중국총영사관은 "'중국인민해방군진행곡'은 소리가 힘 있게 울리는 리듬과 장엄하고 엄숙하며 씩씩한 곡조, 순수하고 간결한 언어로써 인민군대의 형상을 깊이 묘사했고, 인민군대의 용왕매진한 전투기질과 위력이 대단한 기세를 표현했으며, 중국인민해방군의 전투력과 정치업무의 하나의 구성부분이 됐다. 1988년 7월25일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에 '중국인민해방군군가'로 정식으로 확정됐다"고 정율성이 작곡한 중공 인민해방군 군가를 높이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