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재임기였던 1998년 4월부터 아버지 고향 경남 고성 찾아 4차례 탈북 시도2006년 노무현정부 때 중국서 인신매매 당해… 조선족과 강제결혼해 아들 낳아4살 아들 데리고 남한 가려 했지만 또다시 강제북송… 장남 눈 앞에서 잡혀가가까스로 탈북했지만 2021년 장남 숨져… "국군포로·자녀들 지위 인정 바란다"
  • ▲ 3일 국군포로 2세대 채성희 씨가 서울시 중구에 위치한 6.25국군포로가족회 사무실에서 뉴데일리와 인터뷰하고 있다. ⓒ서성진 기자
    ▲ 3일 국군포로 2세대 채성희 씨가 서울시 중구에 위치한 6.25국군포로가족회 사무실에서 뉴데일리와 인터뷰하고 있다. ⓒ서성진 기자
    여기 조국이 통일되면 고향 남녘을 꼭 찾아가 달라는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네 번의 강제북송과 중국에서의 인신매매를 이겨내고 대한민국 땅을 밟은 여성의 슬픈 사연이 있다.

    채성희(국군포로 자녀) 씨는 국군포로 자녀라는 이유로 북한에서 힘겨운 삶을 살았다. 끊임없는 허기와 주위의 차가운 냉대는 어렸을 때부터 겪어온 일상이다. 손톱이 깨지고 닳아 없어지는 고된 생활 속에서 채씨는 아버지의 고향인 따뜻한 남쪽을 꿈꿔왔다. 갖은 고초를 이겨내고 어렵게 대한민국을 찾았다. 하지만 대한민국 정부는 채씨를 국군포로 유족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국군포로는 6·25전쟁 휴전협상 과정에서 북측에서 국내로 송환하지 않은 국군 실종자를 가리킨다. 정부는 1953년 전쟁에서 돌아오지 못한 이들을 모두 전사 처리하고, 남은 가족을 국군포로 유가족으로 인정했다.

    국군포로의 송환 및 대우에 관한 법률은 "귀환 포로 또는 대한민국으로 귀환한 억류지 출신 포로 가족을 등록해 지원금을 지급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등록 기준은 세부 시행령을 따른다.

    하지만 일부 국군포로 자녀들은 법적 근거가 없다는 등의 이유로 유가족 지위를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북한에서 태어난 후 남한으로 넘어온 유가족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들은 유가족 지위를 인정받지 못해 국가 지원 대상에서 제외돼 있다.

    인사를 마친 채씨는 과거를 회상하며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탈북을 결심하게 된 계기는?

    "국군포로인 아버지는 제가 아홉 살이 되던 해 북한에서 가스사고로 생을 마감했다. 당시 아버지가 제 손을 잡으며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조국이 통일되면 내 고향을 꼭 찾아가 달라'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숨을 거두시기 전 경상남도 고성군이 고향이라고 알려 주셨다. 그 말을 가슴 속 깊이 새기고 살다 1998년 4월1일, 아버지 고향을 찾아 탈북을 감행했다. 하지만 중국에서 번번이 붙잡혀 12년 동안 무려 네 번이나 강제북송 당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2009년 11월23일 재차 탈북을 시도해 중국을 통과하는 데 성공했다. 2010년 1월15일 마침내 대한민국 땅을 밟을 수 있었다."
  • ▲ 3일 국군포로 2세대 채성희 씨가 서울시 중구에 위치한 6.25국군포로가족회 사무실에서 뉴데일리와 인터뷰하고 있다. ⓒ서성진 기자
    ▲ 3일 국군포로 2세대 채성희 씨가 서울시 중구에 위치한 6.25국군포로가족회 사무실에서 뉴데일리와 인터뷰하고 있다. ⓒ서성진 기자
    -강제북송 당시 상황은 어땠나?

    "2005년, 두 번째 강제북송 당할 당시 함경북도 새별군으로 보내졌는데 석 달 만에 그곳을 도망쳐 나왔다. 그대로 감옥에 갈 것만 같아 화장실에 간다고 말하고 달아났다. 그러고는 함경북도 온성군에 있는 둘째언니 집으로 가서 다시 탈북을 시도했다. 중국으로 건너가면 강 앞에 인신매매하려는 사람들이 줄을 지어 있다. 돈을 받고 탈북여성을 중국 조선족에게 팔아 넘기려는 이들이다. 2006년 8월, 결국 중국에서 인신매매를 당해 원하지 않는 남자(중국인 조선족)와 살게 됐고 아들을 낳게 됐다. 이후 네 살짜리 아들을 데리고 남한으로 가려 했지만 또다시 강제북송 당했다. 아들이 보는 앞에서 잡혀갔다. 넉 달 반 만에 도망쳐 나와 아들을 데리러 가보니 남편은 이미 죽고 없었다."

    -아들과 함께 대한민국으로 왔나? 

    "아버지의 고향을 찾아가려 결심했지만 도저히 아들을 데리고 함께 갈 형편이 못됐다. 어쩔 수 없이 할머니(인신매매 당해 살게 된 중국 조선족 남편의 어머니) 집에 아들을 맡겨두고 혼자 떠났다. 그런데 할머니가 아들에게 '엄마는 너를 두고 도망쳤다'고 계속 말해서, 아들은 정말 제가 자기를 버리고 간 줄 알고 있었다고 한다. 남한에 도착해 하나원(북한이탈주민정착지원사무소)을 나와 전화하니 아들이 제 전화를 받지 않더라. '엄마가 이제 너를 (남한으로) 데리고 올 거야'라고 전하자 아들과 연락이 닿았다. 이후 하나원에서 받은 초기 정착지원금 300만원을 모두 아들 탈북 브로커 비용으로 지불했다. 그리고 아들 생활비를 위해 배추를 심고 과수원에서 과일을 심는 등의 일을 하며 매달 30만~50만원씩 보냈다. 그런데 할머니가 '금액이 적어 못 키우겠다'며 여섯 살짜리 아들을 중국인에게 시켜 인편으로 보내버렸다. 그렇게 2012년 인천공항에서 만나 아들과 둘이 살게 됐다."

    -아들의 상처가 컸을 것 같은데?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어 보여 미술상담을 석 달간 시켰다. 저를 보면 가슴을 치고 문을 박차고 나가고 그랬다. 상담해보니 아들이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았고, 정신적 고통도 심한 상태였다. 중국 할머니는 제가 생활비를 보내지 않으면 아들을 꼬집으면서 '엄마한테 빨리 돈 보내 달라고 전화하라'고 시켰다고 하더라. 할머니를 그려 보라 하니 백골을 그렸다. 배 다른 형이 자신을 때려 피를 흘리는 그림도 그렸다. 당시 네 살도 안 됐던 아들이 길에서 쇠붙이 주어다 팔아서 할머니에게 돈을 주고, 땔나무 나뭇가지도 주워서…. (이 대목에서 채씨는 목이 메였는지 눈물을 닦고 잠시 후 말을 이어갔다) 그림을 보니 아들한테 못할 짓 했다 싶었다. 저도 대학에 가고 싶었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국군포로 자식이라는 이유로 탄광에서 일해야 했다. 하지만 자식만큼은 제가 이루지 못한 꿈을 대신해 펼쳤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어떻게든 뒷바라지하려 했다."
  • ▲ 3일 국군포로 2세대 채성희 씨가 서울시 중구에 위치한 6.25국군포로가족회 사무실에서 뉴데일리와 인터뷰하고 있다. ⓒ서성진 기자
    ▲ 3일 국군포로 2세대 채성희 씨가 서울시 중구에 위치한 6.25국군포로가족회 사무실에서 뉴데일리와 인터뷰하고 있다. ⓒ서성진 기자
    -아들의 학창생활은 어땠나?

    "아들은 경기도 고양시에서 다문화가정 아이들을 대상으로 운영하는 야구단을 시작으로, 후원을 받아 미국 메이저리그 경기도 보고, 류현진·오승환 선수도 만나면서 야구선수의 꿈을 키웠다. 초등학교 6학년이 됐을 때 제게 '야구를 하고 싶다'고 졸랐다. 그런데 야구를 하려면 훈련비·회비 등 돈이 많이 들지 않나. 그래서 (그런 현실적인 모습을 보여주어) 꿈을 접게 하기 위해 한 야구단 감독에게 데리고 갔다. 그런데 감독이 '좀 가르치면 괜찮겠다'고 말하더라. 그래서 한 1년 정도 시켜봤는데 생각보다 잘 따라갔고 연습도 열심히 했다. 결국 중학교 2학년 때 경기도 A중학교로 전학을 가 연계 야구단에 들어갔고, 그곳에서도 잘해 주장을 맡기도 했다. 야구를 시작한 지 불과 4년밖에 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런 아들이 갑작스레 왜 세상을 떠났나?

    "2021년 당시 경상북도의 한 지역에서 중학교 야구대회가 있었다. 아들이 소속된 A중학교 야구부가 첫 경기에서 이겼고, 그날 MVP까지 아들이 휩쓸었다. 그래서 다음날 코치 B씨가 아들을 포함한 학생 13명, 또 학부모 한 명을 데리고 바닷가로 바람을 쐬러 나갔다. 처음에는 발만 담그고 놀다 조금씩 더 깊이 들어가고 상의도 탈의하고 놀았다고 하더라. 그러다 코치가 '돌아가서 훈련하자'고 말했고, 아쉬운 마음이 컸던 아이들 13명 중 대여섯 명이 물에 들어가 놀았다고 한다. 그런데 같이 따라간 학부모 한 명이 간식을 사서 아이들이 놀고 있는 곳으로 왔는데, 제 아들이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봤다더라. 친구 한 명이 아들 손을 잡으려고 애썼는데도 결국 끌어당기지 못했다. 그것을 보던 학부모가 뛰어들어 아들을 잡았는데, 너울성 파도 때문에 결국 놓치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이 나라 땅을 지키기 위해 전쟁터에 뛰어들어 국군포로가 된 아버지의 자녀로 태어나 북한에서 고통 받으며 살았다. 그런데 아버지의 고향에서도 국군포로 자녀로 인정 받지 못했고, 아들도 세상을 떠났다. 참 가슴이 아프다. 대한민국이 언제쯤 국군포로였던 아버지와 우리 자녀들의 지위를 인정해 줄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