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 재판부 지시 묵살하고 '사실조회' 내용만 법무부에 통보… "법정모독" 지적
  • 이명박 전 대통령의 재판에서 검찰이 국제사법공조와 관련해 항소심 재판부의 지시를 '무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재판부는 이 전 대통령이 받는 삼성 뇌물수수 혐의에 대한 진실규명을 위해 검찰에 미국 사법당국과의 국제사법공조를 지시하면서 이 전 대통령 측 변호인단의 사실조회 요청사항도 포함해 재판부에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검찰은 이 같은 지시를 묵살하고 검찰 측의 사실조회 내용만 포함시켜 법무부에 제출했다. 재판부에는 '사후통보'한 것으로 확인됐다. 

    16일 검찰과 법조계 등에 따르면 서울중앙지검 특수4부(부장검사 이복현)는 최근 법무부를 통해 국제사법공조를 신청했다. 이 전 대통령의 항소심 재판부인 서울고법 형사1부(부장판사 정준영)는 앞서 지난달 5일 검찰에 미국과 국제사법공조로 미국 로펌 에이킨검프(Akin Gump)에 이 전 대통령이 받는 삼성 뇌물수수 혐의에 대한 사실조회를 진행하라고 요구했다. 

    '공소사실' 중 사실과 배치되는 부분 여럿 발견

    재판부가 검찰에 국제사법공조를 지시한 이유는 항소심 재판이 진행되면서 검찰의 공소사실 중 사실과 배치되는 부분이 여럿 발견됐기 때문이다. 검찰은 기존에 삼성이 에이킨검프와 '프로젝트M'이라는 계약을 하고 매월 12만5000달러씩 정액으로 지급한 총 67억원 상당을 이 전 대통령에 대한 직접뇌물로 판단했다. 

    이에 대한 근거로 검찰은 김백준 전 기획관과 이학수 전 부회장으로부터 "이 전 대통령이 이를 다스 미국 소송비로 사용한 후 남은 돈을 돌려받으려 했다"는 진술을 제시했다. 하지만 이 자금이 이 전 대통령에게 전달된 정황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검찰은 지난 5월 국민권익위원회로부터 에이킨검프가 삼성전자 미국법인(SEA)에 다스 소송비 실비를 청구한 인보이스 사본 38건을 이첩받고, 이를 근거로 기존 혐의 외에 51억원 상당의 뇌물 혐의를 추가하는 공소장 변경을 신청했다. 다스 소송비가 실비로 청구됐다는 게 검찰의 새로운 주장이었다.

    이 전 대통령 측 변호인단은 검찰의 새로운 주장이 '매월 12만5000달러씩 정액을 지원받아 다스 소송비로 썼다'는 기존 검찰 주장과 '소송비로 쓰고 남은 돈을 돌려받으려 했다'는 김백준·이학수 두 핵심 증인의 진술과도 정면으로 배치된다고 지적했다. 지난달 6일 검찰이 추가 뇌물 혐의를 입증한다며 제출한 동영상에서는 삼성이 다스 소송비 등 이 전 대통령 측에 자금을 지원하기 이전부터 에이킨검프에 '프로젝트M'의 자문료(Retainer)를 지급해온 내역이 발견됐다. 이는 삼성이 에이킨검프에 지급한 자문료가 이 전 대통령에 대한 뇌물죄가 된다는 검찰의 공소사실을 완전히 뒤엎는 것이다.

    이에 재판부는 검찰의 공소사실에 의문을 품고 검찰에 미국과 국제사법공조를 지시했다. 검찰의 공소사실이 흔들리는 만큼 삼성으로부터 돈을 받은 주체인 에이킨검프에 직접 사실을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는 취지였다. 

    "미국 사법부와 공조해 뇌물 혐의 확인하라"

    재판부는 "미국 사법당국과 공조를 통해 이 전 대통령의 삼성 뇌물수수 혐의에 대한 확인을 해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재판부는 "검찰이 공소장을 변경했는데, 종전에 주장한 내용과는 취지가 많이 달라졌다"면서 "검찰은 종전 공소장에서는 '에이킨검프가 SEA로부터 돈을 받아 법률비용으로 쓰고 남은 돈을 이 전 대통령이 돌려받으려고 했다'고 주장했는데, 변경된 공소장에 따르면 에이킨검프는 SEA에 법률비용을 인보이스로 실비청구했다. 그렇다면 변경 전 공소장에 기재된 12만5000달러의 의미가 무엇인지가 중요하게 됐다"고 봤다. 

    또 재판부는 '무기대등의 원칙'을 고려해 사실조회안에 변호인단이 요청하는 사실조회 내용도 포함시키라고 했다. 검찰이 "시간이 오래 걸린다" "변호인 측의 요청 내용이 사실상 취조에 가까워 사법공조 조약에 위배된다"는 등의 이유를 들며 이를 거부하자, 재판부는 지난달 23일 공판에서 "변호인 측의 요청 내용을 포함한 국제사법공조의 사실조회안을 확정해 10월7일까지 법원에 제출하라"고 최종 통보했다. 재판부는 "검찰 측이 변호인이 요청하는 사실조회를 전혀 반영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저희가 보고 변호인 측의 사실조회를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도 했다. 

    그러나 검찰은 최근 검찰이 실제로 법무부에 제출한 국제사법공조 사실조회안에는 검찰 측의 요청 내용만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변호인단의 요청 내용도 포함하라는 재판부의 의견을 묵살한 것이다. 

    또 검찰은 국제사법공조 신청 사실을 재판부에 알리지 않고 지난 7일 의견서를 통해 사후통보했다. 의견서 제출 이전에는 법무부에 대한 국제사법공조 신청을 재판부에 알리지조차 않았다. 

    재판 도중 재판부 지시 무시... 명백한 법정모독

    법조계에서는 검찰의 이 같은 행위가 "명백한 법정모독"이라고 지적했다. 재판 진행 도중 재판부의 지시를 무시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검찰이 공소유지에 자신이 없기 때문에 비협조적인 모습을 보인다는 의견도 있다. 법조계 관계자는 "검찰이 국제사법공조에 비협조적인 모습을 보이는 이유는 삼성 뇌물과 관련한 공소사실이 터무니없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기 때문"이라며 "검찰은 국제사법공조 이후에도 공소를 유지할 자신이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편 이 전 대통령의 재판에서 검찰이 재판부와 마찰을 빚은 것은 이번뿐만 아니다. 검찰은 지난 3월에도 이병모 전 청계재단 사무국장의 증인신문이 진행되던 도중 "변호인이 함정수사를 전제하고 증인에게 유도신문을 하고 있다. 재판부에서 막지 않으시냐"고 반발했다. 이에 재판부는 "지금 누구에게 지적하는 것이냐"며 야단쳤다. 당시 재판부는 "법관생활을 오래 했지만 검사로부터 지적받은 적은 처음"이라며 "재판부의 소송지휘권을 흔들지 말라"고 검찰에 경고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