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웨이 프로세서 ‘기린’ 설계회사가 소프트뱅크 소유… 언제라도 '공급' 끊을수 있어
  • ▲ 중국 베이징의 화웨이 휴대전화 판매 대리점. ⓒ뉴시스 AP.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중국 베이징의 화웨이 휴대전화 판매 대리점. ⓒ뉴시스 AP.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구글·퀄컴·인텔·브로드컴·자일링스 등 미국 IT 기업들이 거래 중단을 발표한 뒤 중국 화웨이는 “이럴 때에 대비한 ‘플랜 B(대안계획)’가 있다”고 큰소리쳤다. 중국 관영매체들도 화웨이를 추켜세웠다. 그러나 화웨이의 ‘플랜 B’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일본 소프트뱅크의 결단이 필요하다.

    “10년간 화웨이 ‘플랜 B’ 준비... 문제없다”

    중국의 CCTV는 지난 19일 “화웨이, 막다른 길에서 반격한다”는 논평을 통해 화웨이 측이 발표한 ‘플랜 B’를 극찬했다. 화웨이의 ‘플랜 B’는 지난 3월부터 윤곽을 드러냈다. 당시 위청둥 화웨이 소비자사업부 최고경영자는 독일 언론과 인터뷰에서 “안드로이드 OS를 사용할 수 없을 때를 대비해 자체 스마트폰용 OS 준비를 마쳤다”고 밝혔다.

    지난 17일 화웨이 계열사 하이실리콘의 허팅보 총재는 직원들에게 보낸 메일에서 “우리가 극한생존을 가정해 준비해온 비상 타이어가 하루아침에 정규 타이어가 됐다”면서 “수 년 동안의 노력으로 고객에게 서비스를 계속 제공하겠다는 약속을 실현할 수 있게 됐다”고 주장했다. 허 총재는 이날 화웨이가 자체개발한 AP 칩과 OS를 확보했다고 주장했다.

    화웨이 창업자인 런정페이 최고경영자는 지난 18일 일본 언론과 인터뷰에서 “미국의 조치를 예상하고 반도체 자회사 하이실리콘을 통해 핵심 부품 수급을 준비해왔다”면서 “퀄컴 등 미국 반도체회사들이 우리에게 반도체를 안 팔아도 큰 문제가 없다”고 주장했다.

    CCTV는 “미국정부가 화웨이에 미국산 기술·부품 구매를 금지한 조치는 중국 첨단 기술 발전을 억제하고 미국의 기술패권을 지키려는 것”이라며 “하지만 미국이 생각지 못한 건 화웨이가 10여 년 동안 준비해온 ‘플랜 B’를 이미 신속하게 가동해 제품의 전략적인 안전과 지속적인 공급을 보장한 것”이라며 화웨이 관계자들의 주장을 선전했다.

    실제로 화웨이는 핵심 부품인 AP(어플리케이션 프로세서, 컴퓨터의 CPU 역할을 함)와 통신 모듈 등을 자체생산한다. 화웨이는 2017년 6월 ‘기린 970’을 시작으로, 2018년 ‘기린 980’ ‘기린 1020’ 등의 AP를 선보였다. 2019년 초에는 올해 AP 자급률이 60%를 넘길 것이라고 자랑했다. 하지만 화웨이의 약점은 그 속에 숨어 있다.
  • ▲ 영국 반도체 업체 ARM의 칩셋. ARM은 이제 소프트뱅크 소속이다. ⓒ뉴시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영국 반도체 업체 ARM의 칩셋. ARM은 이제 소프트뱅크 소속이다. ⓒ뉴시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독보적 기술 가진 ARM의 주인, 소프트뱅크

    2016년 7월 일본 소프트뱅크는 영국 반도체업체 ARM을 234억 파운드(약 35조3000억원)에 인수했다. 일본 사상 최대규모의 M&A였다. 연매출 1조8000억원에 당기순이익 3000억원대인 회사를 이 가격에 사들이자 소프트뱅크 주가가 급락했다. 그러나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은 매출이나 유동성 때문에 ARM을 사들인 게 아니었다.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문 기술력을 가진 업체였기 때문이다.

    ARM은 1990년 11월 영국 에이콘컴퓨터·VLSI테크놀러지·애플이 함께 만든 ‘조인트벤처’다. 이들은 1990년대 PDA(개인용 단말기)에 쓸 CPU를 만들었다. CPU 개발에서 중점을 두었던 부분은 저전력 칩셋이었다. 그러나 이후 PC 시장이 거대하게 형성되면서 출자한 기업들마저 관심을 끊었다. ARM은 생존을 위해 반도체 설계기업으로 특화하기 시작했다.

    비즈니스 모델도 독특했다. 제품을 생산하지 않고 설계만 한 것이다. ARM은 대형 IT 제조업체들에 설계도 라이선스를 판매하고, 각 업체에 맞게 개량해 대량생산할 수 있도록 도왔다. ARM의 CPU는 전력소모가 휴대용 IT 장비들의 핵심적인 문제가 되면서 인기를 끌었다. 1998년 영국과 미국에서 동시 상장에 성공하면서 급속히 성장했다. 

    ARM은 창립 때부터 저전력 CPU 개발에 집중했다. 세계 어떤 반도체업체도 그들과 같은 저전력 CPU를 만들 수 없었다. 때문에 배터리 사용시간이 관건이 된 이후 삼성전자·퀄컴·애플 등이 ARM의 라이선스를 구입했다. 삼성전자가 개발한 AP ‘엑시노스’, 퀄컴의 ‘스냅드래곤’, 애플의 ‘A시리즈’가 모두 ARM의 설계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제품이다. 그렇게 ARM은 2013년 모바일 기기 CPU 업계 최강자가 됐다. ARM 측에 따르면 2016년 이들의 설계도를 기반으로 만들어지고 사용된 기기가 167억 개에 달했다.

    손정의는 ARM이 저전력 AP뿐만 아니라 자율주행차에 들어갈 ‘말리-C71 영상처리장치(ISP)’를 개발하고, 인공지능 분야에서 기존의 AP보다 연산처리능력이 50배에 달하는 ‘다이내믹’ 기술 등 5G 통신망 상용화와 함께 도래할 ‘사물인터넷(IoT)’ 분야에서도 기술력이 독보적인 점을 높게 평가했다.
  • ▲ 2016년 12월 도널드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 직후 미국을 찾은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손 회장을 극찬했다. ⓒ뉴시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2016년 12월 도널드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 직후 미국을 찾은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손 회장을 극찬했다. ⓒ뉴시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화웨이가 자체개발했다는 AP ‘기린’ 역시 소프트뱅크 계열사 ARM의 설계를 바탕으로 만든 것이다. 화웨이의 5G 통신망 관련 장비들 또한 ARM의 설계를 기반으로 한 제품이 적지 않다. 실제로 지난 1월 화웨이는 “미국과 무역분쟁 장기화에 대비해 ARM과 손잡고 반도체를 자체개발한다”고 발표했다. ‘쿤펑 920’이라는 자체개발 서버도 선보였다. 이 또한 ARM의 설계를 바탕으로 한 제품이다.

    ARM 빼고 구글 빼면 ‘껍데기’뿐인 화웨이 

    지금은 화웨이와 ARM이 반도체 개발을 위해 제휴했지만, 소프트뱅크는 최근 "일본정부의 권고에 따라 5G 통신망 구축에서 화웨이 장비를 사용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미·중 무역분쟁에서 적극적으로 미국을 지지하는 일본 정부가 손 회장 측에 “국가안보와 국익을 위해 화웨이와 제휴를 중단해 달라”고 요청할 경우 화웨이의 ‘플랜 B’는 그대로 끝나게 된다. 스마트폰과 미디어패드의 AP 수명주기가 극히 짧다는 점을 고려하면, ARM의 도움이 없는 화웨이는 독자생존이 어렵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미국산 부품을 공급받지 못하는 화웨이는 스마트폰뿐만 아니라 다른 장비도 만들 수 없게 된다. <월스트리트 저널(WSJ)>에 따르면, 2018년 화웨이는 700억 달러(약 83조5000억원) 상당의 부속품을 해외에서 수입했다. 이 가운데 15.7%에 해당하는 110억 달러(약 13조1200억원)가 퀄컴의 칩셋, 구글의 안드로이드 OS 및 관련 기술, 마이크로소프트(MS)의 소프트웨어 등 미국산이다. 화웨이의 지난해 매출 1070억 달러(약 127조6700억원) 가운데 미국 수출액이 2억 달러(0.2%)에 불과했다는 점과 비교하면, 화웨이의 목줄은 미국과 일본에 달린 것이나 다름없다.

    화웨이가 ‘플랜 B’라고 내놓은 OS 또한 실패 가능성이 높다. 고의영 하이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최근 보고서에서 “화웨이는 자체 OS인 ‘홍멍’을 준비하고 있지만 과거 삼성전자 타이젠의 미진한 성과에서 확인할 수 있듯, 개발자 생태계 같은 네트워크 개방성이 중요한 OS 시장의 특성상 이미 공고한 구글의 모바일 서비스를 대체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며 “결론적으로 화웨이 스마트폰 출하량이 급격한 감소세를 보일 여지가 있다”고 지적했다. 고 애널리스트에 따르면 2018년 기준 화웨이의 스마트폰 48.9%, 1억 대가 해외에서 출하됐다.

    실제로 삼성전자는 2009년 ‘바다’라는 자체 OS를 선보이며 개발을 지속했다. 그러나 시장의 반응은 냉담했다. 삼성전자는 2013년 2월 ‘바다’를 새로운 OS ‘타이젠’으로 흡수시킨다고 밝혔다. 그리고 2014년 4월 ‘바다’ 개발팀 해체, 2018년 10월에는 ‘타이젠’ 개발 중단을 발표했다. 이 같은 점을 종합해 보면, 중국 공산당이 아무리 인민들의 애국심에 호소하고 자체개발을 통해 미국에 맞서겠다고 해도 화웨이의 생존율은 미·중 갈등이 커질수록 낮아진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