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술 권하는 문재인, 그의 술잔을 거절한다 

김 광수(1991년생)
한동대학교 법학부
거룩한 대한민국 네트워크 회원
(사) 대한민국 건국회 청년단 회원 

2017년, 이 시대를 27살 청년으로 살아가는 요즘 떠오르는 소설이 있다. 
현진건 작가가 1921년 <개벽(開闢)> 17호에 발표한 ‘술 권하는 사회’이다. 
새벽 두 시까지 술을 마실 수밖에 없다고 하는 지식인 남편과 
그에게 누가 이렇게 술을 권하느냐고 묻는 아내가 등장한다. 
남편은 “조선사회”가 술을 권한다고 말한다. 아내는 알아듣지 못하고 
“그 몹쓸 사회가 왜 술을 권하는고!”라고 중얼댄다.
‘술 권하는 사회’는 일제가 강점하는 1921년을
지식인으로 살아가는 절망감을 표현한 작품이다. 

2017년을 살아가기가 쉽지 않다.
사실 나도 힘들고, 많은 이들이 힘들다고 한다. 
그러면 언제가 좋았을까 찾아보려 역사를 공부해봤다.
알아볼수록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한반도 반 만년 역사 그 어느 때도, 지금의 대한민국보다 살기 좋은 시점은 없었다.
더 이상 원망할 수 없게 되어 분통도 터지고, 
나보다 힘들었을 어른들과 그 어른들의 어른들을 생각하니 먹먹하기도 했다.
세계사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금이 힘들지라도 지난날은 더 힘들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지난날의 삶을 열심히 살아낸 이들의 땀과 눈물 위에
오늘날의 나와 우리 공동체가 서 있다는 사실에 다시 감사했다. 

다시 1921년으로 돌아가 본다. 
나라를 잃고, 백성에서 식민(植民)이 된 지 12년이다.
왕조와 양반에게 빼앗기던 것을 일제에게 빼앗겨 여전히 희망 없이 연명하고,
지식인들은 공부를 할수록 커지는 무력감에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니 ‘술 권하는 사회’라고 스스로 위로하며 절망에 취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힘든 시기에도 ‘술 권하는 사회’를 거절한 이들이 있다. 
이승만은 일제의 만행과 위험성을 알리며 미국과 국제사회에 줄기차게 “대한독립”을 외쳤다.
김구는 끝끝내 임시정부를 지켜냈다. 
주기철은 신앙적 지조를 지키고자 신사참배를 거절했다. 
윤동주는 자아성찰의 시어(詩語)들로 시대를 괴로워하며 저항했다.

2017년의 풍경, 청년실업, 가계부채, 세대갈등, 남녀갈등, 빈부격차, N포 세대 …
여전히 ‘술 권하는 사회’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이 나와 우리가 ‘술’로 상징되는 
원망, 절망, 포기, 분노에 취해도 됨을 의미하지 않는다.

2017년 오늘이 1921년의 암흑, 그 이후의 빈곤보다 더 어두운 점이 있다. 
당시의 지도자들은 ‘술 권하는 사회’를 살아내며 
골방에서는 혼자 눈물을 쏟고 아파할지라도 
나라 잃은 백성들 앞에서는 오히려 희망을 이야기했다. 
대표적인 인물은 이승만이고 다음 세대의 인물은 박정희이다. 
이승만은 개혁을 주장하다 사형 선고를 받고 
감옥에 있으면서도 <독립정신>을 집필하며 희망을 이야기했다. 
박정희는 “우리라고 못할 것이 무엇이냐”, “잘 살아보자” 고 외치며
절대빈곤을 한반도 남쪽에서 몰아냈다.

그런데 지금도 국민들에게 원망, 절망, 포기, 분노를 권하는 정치인들이 
대통령이 되겠다고 설치고 있다.
문재인이다. 이하 잔챙이는 논하지 않겠다. 
그는 ‘술 권하는 정치’를 노무현에게 배웠다.
  •   출처 - 뉴시스 

    노무현이 변호한 부림사건의 학생인 피의자 이상록은
    당시 수사검사였던 고영주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은 우리가 검사님에게서 조사를 받고 있지만
    곧 공산주의 사회가 될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검사님을 심판하게 될 것입니다!” 
    조작영화 “변호인”의 장면처럼, 실제로 고문했다면 이렇게 당당하게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부림사건의 학생들은 자신들을 변호하는 노무현이 
    공산주의, 사회주의, 계급투쟁 사상이 들어갈 토대가 좋음을 깨닫고 의식화한다.
    마침내 분노의 정치학, 울분과 회한의 정책을 마음껏 펼치는 좌파 정치인 노무현이 등장한다.
    그러나 그의 칼춤에 피를 흘린 이들은 힘없는 약자들이었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이분법적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 노무현은 
    미국은 제국주의로 폄하하고, 북한은 자주 국가로 모시고, 
    한국은 미국에 “형님” 하며 굽신거리는 나라로 평가한다.
    김정일과의 회담에서 스스로 북한을 변호해온 사실을 자랑하고,
    6.25 전쟁을 일으켜 300만 명이 죽게 하고 
    1990년 후반 300만 명 이상을 대기근으로 죽게 한 북한 정권을 
    노무현은 “인민의 행복이 나오는 인민주권의 전당”이라고 추켜세웠다.  
    그 결과 로버트 게이츠 전 미국 국방장관은 2007년 11월 노무현을 
    “약간 정신이 나간 듯”(a little crazy)이라고 평가한다.

    이런 노무현의 정치적 장자(長子)임을 강조하는 정치꾼 문재인은
    당연히 노무현만큼 끔찍하다. 
    국가 성장의 원동력, 고용의 큰 기둥인 대기업을 ‘해체수준’으로 비난하면서
    경제의 지속적인 성장과 청년실업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모순.
    북한의 핵미사일의 위협에 대해서는 침묵하며
    국민의 생명과 동맹을 지키기 위한 사드 배치에 대해서는 분노하고
    동시에 북한의 혈맹인 중국과 입장을 같이하는 태도.
    각국의 정상들과 유엔의 방향이 대북제재와 북한 인권의 회복을 향하는 것에 반대하고
    인류 역사 최악의 폭압정권에게 희망을 갖는 미련함.

    침범할 수 없는 개인의 존엄성과 기술과학의 발달로 줄어드는 개인의 사회적 효용성
    이 차이만큼 개인과 사회의 갈등 가능성의 폭은 커지고 있다. 
    이 간격을 분노와 원망과 포기와 절망으로 채운다면 
    우리는 결국 피해망상의 사회에서 살게 될 것이다.

    문재인은 이 혼란의 탄핵정국을 이용해 분노의 술잔을 권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 술에 취하고 있다. 
    술 권하는 노무현과 문재인, 그들이 주는 술잔을 거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