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기간 일본은 이렇게 돈을 벌었다!
우리가 피를 흘리고 있을 때 돈을 번 日本人이 李承晩에게 감사해야 할 이유
李承만 대통령이 평화선을 그었다고 미워하는 일본인이 많다.
그 이승만의 決死抗戰으로 한국이 자유의 방파제가 됨으로써
일본의 고도성장이 가능하였다.
오늘 일본인들이 누리는 번영과 평화는 韓美軍을 포함한 유엔군 파병 16개국 군인들이 흘린 피의 덕분이기도 하다.
한국전쟁 시기 일본이 경제부흥을 하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인데,
이를 뒷받침하는 자료나 연구서를 찾기 어렵던 차에
1985년에 나온 세 권짜리 맥아더 傳記(THE YEARS OF MacArthur)를 읽었다.
D. 클레이턴 제임스가 쓰고 휴턴 미필린 출판사에서 낸 大作의 제3권은
'승리와 재앙'이란 제목인데, 여기서 흥미로운 통계를 발견하였다.
'일본에 끼친 한국전쟁의 영향'이란 소제목 하의 글에서 著者는
한국전쟁 시기, 일본은 유엔군의 병기창 역할을 하였다고 요약하였다.
전쟁이 나기 전, 1950년 봄 일본에 주둔한 미군은 6만 명이었다.
전쟁이 터지자 미국은 그해 9월까지 한국과 일본에 25만 명의 미군을 배치하였다.
1953년 1월까지 유엔군(육해공군)은 35만의 미군, 기타 연합군 4만4천, 한국군 37만 여 명 등
모두 76만8000명에 달하였다.
일본은 한국에 투입되는 유엔군의 훈련장이 되었다.
1952년까지 일본엔 2500개소의 각종 미군 시설이 들어섰다.
육해공군을 위한 훈련장, 특수전 학교, 사격장, 병원, 휴양소, 항만시설, 무기고, 공병 시설 등등. 건설 붐이 불었다.
미국의 기술과 자금이 일본의 노동력과 결합되었다.
駐日미국 대사 로버트 머피는 "놀라운 속도로 일본 열도는 거대한 보급창고로 변하였다.
이게 없었더라면 한국전쟁은 수행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고 했다.
1947년에 맥아더는 先見之明이 있는 조치를 취하였다.
작전 명은 롤업(Roll-up). 태평양 전쟁 때 중앙 및 남서 태평양 전선에 버려진 무기 및 장비들을
회수하여 수리하는 일이었다. 한국전이 나자 이 무기들이 전선에 투입되었다.
무기 및 장비들을 수리하는 일감이 일본 회사에 넘어갔다.
한국전 초기 넉 달 동안 일본 회사 등은 48만9000정의 小火器, 1418문의 대포,
3만4316개의 통제장비, 743대의 전투 차량, 1만5000대의 일반 차량을 출고시켰다.
전쟁에는 군수분야에 많은 인력이 투입된다.
맥아더 사령관은 이런 일을 주로 일본 인력에 맡겼다.
일본 人力을 사용할 수 없었더라면 미군은 약 20만~25만 명의 추가 병력이 필요하였을 것이라고 한다. 일본의 해상보안청 소속 기뢰제거 기술자 등은 유엔군이 북진할 때 한국전선에 투입되었다. 일본의 해운 철도 기술자들도 유엔군 소속으로 한국에서 활동하였다.
맥아더는 한국전이 시작되자 일본주둔 군수사령부를 창설하였다.
한국전선에 필요한 물자를 일본에서 조달하기 시작하였다.
일본 회사와 계약한 구매 액수는, 1950년에 1억8400만 달러, 1952년엔 8억2400만 달러,
1953년엔 8억600만 달러에 이르렀다. 당시 일본의 수출액은 10억 달러 수준이었다.
미국은 미군과 한국군, 그리고 다른 연합군을 위한 무기 및 장비뿐 아니라 한국인을 위한 구호물자도 일본에서 구매하였다. 이런 자금은 미국 정부와 원조기관에서 나왔다.
특별자금으로 구매된 물자의 액수는 1950~55년 사이 17억 달러에 달하였다.
(편집자 注: 군수사령부가 구매한 액수와 중복되는 부분이 있는지는 불명).
토요다 자동차 회사를 예로 든다.
이 회사는 1950년 6월엔 304대의 트럭을 생산하였다.
한국전이 터지고 군수용 주문이 쇄도하여 1951년 3월이 되자 매달 1500대씩 만들었다.
토요다의 가미야 소타로 사장은 이렇게 말하였다.
"미군의 주문은 우리 회사의 구세주였다.
기쁘기도 했지만 죄 짓는 기분이 들기도 하였다.
다른 나라의 전쟁을 즐거워하고 있다는 생각에서..."
미군의 특별자금 구매액의 약 10%는 일본이 생산하는 무기, 탄약, 장비를 사는 데 쓰였다.
이는 일본 무기 산업의 부활을 촉진하였다. 극동사령부는 태평양 전쟁에 동원되었던 약1000개의 군수제조업체를 폐쇄시켰는데, 한국전이 일어나자 생산을 재개하도록 하였다.
1950년 8월 미국 합참은 "만약 세계 전쟁이 일어난다면 일본의 군수산업 능력을 미국이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입장을 정하였다.
전쟁물자 생산 이외의 분야에서도 일본은 돈을 많이 벌었다.
일본으로 온 유엔군 소속의 군인들이 다양한 목적으로 돈을 썼다.
이들이 개인적 목적으로 쓴 돈은 하루 평균 100만 달러에 이르기도 하였다.
요코스카엔 일본 매춘부가 1500명으로 늘었다.
한국전이 시작되었을 때 일본의 제조업 생산량은 戰前(1934~36)의 3분의 1 수준이었다.
전쟁이 발발한 이후 제조업이 급속도로 회복되었다.
1950년 말엔 戰前의 94%, 51년엔 128%, 1953년엔 171%로 향상되었다.
제조업 종사자들의 임금 지수도 1950년 59.5(1960년을 100으로 보았을 때),
51년에 65.6, 52년에 73.5, 53년에 77.4로 급등하였다.
수출액은 1949년의 5억1000만 달러에서 1951년엔 14억 달러로 늘었다.
수입은 1949년의 9억500만 달러에서 1952년엔 20억 달러로 증가하였다.
도쿄 증권시장도 활성화되었다.
1950년 6월의 일간 거래액은 9470만 엔이었다. 1953년 2월엔 24억 엔으로 급증하였다.
1951년 초 요시다 수상은 의회에서 연설하면서 "최근 일본은 경제 회복과 부흥을 향하여
괄목할 만한 진전을 보이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한국전 기간에 재벌기업에 대한 규제도 완화되었고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규제는 강화되었다.
일본의 고도성장 노선은 한국전 시기에 그 틀이 잡힌 것이다.
李承만 대통령이 평화선을 그었다고 미워하는 일본인이 많다.
그 이승만의 決死抗戰으로 한국이 자유의 방파제가 됨으로써 일본의 고도성장이 가능하였다.
오늘 일본인들이 누리는 번영과 평화는 韓美軍을 포함한 유엔군 파병 16개국 군인들이 흘린
피의 덕분이기도 하다.
[조갑제닷컴=뉴데일리 특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