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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現代史 최대의 미스터리: 丁一權이 보았다는 두 통의 편지

    趙甲濟   


  •  1996년 1월15일 고려서적에서 펴낸 ‘丁一權회고록’ 304-307페이지에는
    중요한 정보가 들어 있다. 1950년 10월 말 북진중이던 유엔군 정면에 중공군이 처음으로 나타나 기습하는 바람에 국군이 큰 타격을 받은 직후의 일을 기록한 대목이다.

       <老대통령은 내 보고를 듣고나서 “역시 나왔구먼. 이젠 겁쟁이 트루먼도
    배꼽에 힘 좀 넣겠지”하고 지극히 태평이었다. 戰局의 앞날에 대해서도 낙관하고 있었다.
       “걱정할 것 없습니다. 맥아더가 잘 알아서 할 것이오”하고, “丁총장, 맥아더와 나는 중공군이 나온다고 보아왔습니다. 장군, 그(필자 주: 맥아더를 지칭)는 중공군 개입 가능성을 겉으로는 부인했으나 북진 전략에 대한 트루먼의 잔소리를 막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맥아더, 그는 훨씬 앞을 내다보고 있는 것이니 경우에 따라서는 原爆사용도 불사할 각오라고 내게 굳게 약속한 바 있습니다. 그의 전략가로서의 深謀는 참으로 탁월합니다”하고 격찬해 마지 않았다.>


       丁一權 총장에게 李承晩 대통령은 두 통의 편지를 보여주었다고 한다.
    한 통은 맥아더 장군에게 보낸 李 대통령의 편지 寫本이었다.
    丁씨의 회고록에 따르면 그 사본의 요지는 이러했다고 한다.

       <北進이 순조롭게 진행됨에 따라 워싱턴과 英佛은 소련 및 중공의 군사개입을 겁내고 있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는데 本職은 소련은 몰라도 중공의 개입 가능성은 매우 크다고 보는 바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이번 트루먼 대통령을 만나더라도 이 가능성을 긍정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귀하가 긍정함으로 해서 북진을 방해하는 作戰上의 제한이 가중될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민은 거족적으로 북진통일만을 열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귀하의 英邁(영매)하신 지도가 아니고서는 이 열망 달성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굳게 믿고 있습니다. 이 간절한 심정을 살펴주시기 바라는 바입니다.>
  • ▲ 6.25전쟁중 전선을 시찰하는 이승만 대통령과 정일권 총장.
    ▲ 6.25전쟁중 전선을 시찰하는 이승만 대통령과 정일권 총장.


      
    李대통령이 보여준 또 다른 한통의 편지는 맥아더가 李대통령에게 보낸 답장이었다.
    그 요지는 이러했다고 한다.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本職은 믿을 만한 정보통의 보고를 받고 있습니다. 중공군은 반드시 나타날 것입니다. 하나, 이 가능성을 겉으로는 긍정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숨어서 압록강을 건널 것입니다. 조금도 모르는 것으로 할 것입니다. 중공은 그 방대한 군사력을 배경삼아, 가까운 장래에 아시아에 있어서 데모크라시의 최대의 위협이 될 것입니다. 그 배후에는 소련이 있습니다. 중공의 잠재적인 군사력을 때릴 만한 기회는 지금 아니고서는 없을 것입니다. 전략은 이미 준비되어 있습니다. 다만, 워싱턴이 어디까지 本職의 전략을 뒷받침해주느냐가 문제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거센 반대에 부딪칠 것입니다. 하지만 불퇴전의 결의는 조금도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필요하다면 原爆도 불사할 것입니다…>

       丁一權은 회고록에서 이 맥아더의 편지 날짜까지 기억했다. 1950년 10월13일이었다고 한다. 태평양 웨이크 섬에서 트루먼 대통령-맥아더 사령관의 회담이 있은 날이 이틀 뒤인 15일이었다. 이 회담에서 맥아더는 트루먼 대통령에게 '중공군이 만주에 약30만 명 집결해 있지만 한국에 개입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만약 개입한다면 대학살이 있을 것이다. 전쟁은 이긴 것이나 마찬가지이다'고 보고하였다.
    丁一權은 회고록에서 이렇게 썼다.

       <이 두 통의 私信을 아는 사람이 나 말고 또 있는지 확실치 않다. 極秘 중의 極秘였다. 史家들이나 비평가들이 이 극비를 알 까닭이 없었다. 맥아더는 자신에게 집중되는 비판의 소리, 즉 “중공군 개입의 가능성을 오판하여 유엔군의 북조선 철수를 자초했다”는 책임추궁에도 이 비밀서한만큼은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문제는 이 두 통의 편지가 실체로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국 정부 문서로도, 이화장 문서로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정일권의 말을 간단히 부정할 수도 없다. 기억이 너무나 구체적이고 편지 내용이 실제 사태 전개와도 합치한다.

  • ▲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선포식장에 나란히 앉아 대화하는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
    ▲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선포식장에 나란히 앉아 대화하는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

      
     맥아더가 李承晩에게 보냈다는 편지가 사실이라면 이를 통해 맥아더의 대전략이 이렇게 짐작된다.

       그는 중공이 소련과 손잡음으로써 아시아의 赤化를 가져올 수 있는 거대한 위협세력이 되었다고 판단, 당시가 중공의 그런 잠재력을 파괴할 수 있는 適期라고 본 것이다. 즉, 중공군이 개입하지 않으면 한반도 통일은 이루어지니까 좋은 것이고 개입했을 때는 이것을 確戰의 기회로 삼아 중공을 치겠다는 전략이었다. 문제는 이런 거대한 전략이 현지 사령관의 의지대로 되겠느냐는 것이었다. 세계대전으로 이어질지 모르는 그런 擴戰의 결정은 대통령만이 내릴 수 있는 것이었다.
      
       맥아더와 李承晩은 기독교 사상에 기초한 反共주의자란 공통점이 있었다.
    그들은 아시아 정세와 공산주의 세력을 보는 시각이 같았다.
    다른 점은 李대통령은 한반도 통일을 목표로 하고 있었는데 맥아더는 中共收復까지도 내다보고 있었다는 점이다.

       丁一權 회고록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1951년 초 동해안의 양양 전선으로 시찰 나온 맥아더는 丁一權 총장과 둘만 있게 되자 이런 말을 하더란 것이다.

       “이제까지 만주폭격과 원폭 사용을 주장해왔지만 조금도 잘못은 아니다. 원폭이라 했지만, 본보기로 허허벌판에 한 발 터뜨려 보자는 것이었다. 난들 왜 원폭의 가공스러움과 죄악스러움을 모르겠는가. 다만 중공군에 제동을 걸어보자는 것인데, 트루먼은 끝내 거부해오고만 있다.
    지금도 늦지 않았는데…정 장군, 당신도 잘 알다시피 원폭을 그토록 바라고 있는 당신네 李대통령에게 말할 수 없이 미안하오. 만날 때마다 원폭도 不辭한다고 했던 약속이 이처럼 허사가 될 줄은 몰랐다고, 노인에게 전해주시오.”

       丁一權의 회고록과 연관된 자료가 하나 있다. 폴 H 니츠가 쓴 ‘히로시마로부터 글라스노트까지’란 회고록이 그것이다. 니츠는 미국 외교가의 巨物로서 주로 전략과 정책 수립에 종사해왔다. 딘 에치슨 국무장관 밑에서 정책기획실장 자리에 있을 때 그가 입안한 對蘇전략 기본계획서인 NSC 68이란 문서는 “이 전략으로 미국이 냉전에 이겼다”는 평가까지 들을 정도이다. 국무성 정책기획실장 시절에 그는 한국전을 겪었다. 회고록엔 이런 대목이 있다.

       <내 책상에 올라오는 맥아더의 교신 감청 자료에 의하여 맥아더의 진정한 목표는 중국으로 전쟁을 확대시켜 毛澤東을 몰아내고 蔣介石을 복귀시키려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맥아더가 매우 위험한 방향으로 가고 있음이 확실했다. 나는 언젠가는 대통령이 맥아더를 해임해야 할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그 일이 아무리 인기 없고 어려운 일일지라도.>

       니츠는 회고록에서 맥아더가 그런 위험한 전략을 추진하고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그가 원자폭탄의 在庫에 대해서 제대로 보고받지 못한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당시 원자폭탄은 원자력위원회(Atomic Energy Commission)에서 관리하고 있었다. 원폭의 재고량은 중국본토를 상대로 본격적인 공격을 할 만큼 많지 않았다는 것이다.

       맥아더의 건의를 받아들여 트루먼이 원폭을 썼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1950년 11월30일 워싱턴에서 트루먼 대통령은 기자회견을 열고 있었다. 중공군은 북한지역에서 총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맥아더 장군이 지휘하는 유엔군은 남쪽으로 총퇴각중이었다.
    트루먼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항상 그러했던 것처럼 군사적 상황에 대처하기 위하여 무슨 조치라도 취할 것이다.'
      
       한 기자가 물었다. '원자폭탄의 사용까지 포함한 말씀입니까?'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모든 무기를 다 포함해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戰線 사령관이 무기의 사용권을 갖고 있습니다. 관례에 따라서.'
      
       이틀 뒤, 트루먼 대통령이 위임한대로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은 美 공군에 명령하여 다섯 개의 원자폭탄을 南進하는 중공군을 향해서 투하하도록 했다. 15만 명의 중공군과 공산군에 포로로 잡힌 수 미상의 미군과 한국군 병사가 죽었다. 중공군의 南進은 저지되었다.
      
       유럽의 NATO(북대서양조약기구) 국가들이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미국 정부가 자신들과 사전에 협의하지 않은 데 대해서 분노했다. 직후 미국은 유엔 안보리에서 거부권을 행사하여야 했다. 6개월 전에 있었던 한국방어 유엔결의를 취소시키자는 제안에 동맹국들도 동조했기 때문이다.
      
       스탈린의 소련은 모택동의 中共으로부터 원자폭탄을 사용하여 보복해달라는 압력을 받았다. 소련이 모택동의 요구를 거절하면 국제공산주의 사회에서 소련의 리더십은 결정적인 타격을 받을 것이다.
      
       소련은 미국 정부에 최후통첩을 보냈다. 48시간내에 한반도에서 모든 군사적 행동을 중지하든지 '가장 심각한 결과를 각오하라'는 것이었다. 12월4일 時限이 지났다. 두 대의 소련 폭격기가 블라디보스톡에서 이륙했다. 원시적이지만 작동가능한 원자폭탄을 싣고 있었다.
      
       목표는 미군의 보급기지인 인천과 부산항이었다. 원폭이 투하되었다. 약30만 명이 죽었다. 보급기지의 기능은 사라졌다. 맥아더는 즉각 일본에 있던 미군 폭격편대에 블라디보스톡과 심양, 그리고 하르빈에 原爆을 투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원폭투하가 이뤄지자말자 일본에선 反美데모가 일어났다. 일본은 소련 폭격기의 행동반경 안에 들어 있었다. 영국, 베네룩스 3국, 프랑스는 NATO에서 탈퇴한다고 발표했다. 소련은 西獨의 프랑크푸르트와 함부르크에 原爆을 투하했다.
      
       물론 위의 글은 사실이 아니다. 트루먼 대통령의 기자회견만이 사실이다. 트루먼은 영국 정부 등의 항의를 받고 위의 기자회견 내용도 취소해야 했다. 그는 '한국에서 원자폭탄을 사용할 계획이 없다'고 공언했다.>
      
       위의 글은 동서冷戰史를 다룬 미국 예일대학의 존 루이스 가디스 교수의 '冷戰-새로운 역사'에 실려 있다. 이 책은 냉전을 가장 권위 있게 정리한 名著로 꼽힌다. 미국이 한국전쟁 때 중공군의 남침을 저지하기 위하여 원자폭탄을 썼어야 했다는 주장을 하는 이들에게 참고가 될 만한 假想(가상)이다.
      
       트루먼은 맥아더가 하자는 대로 하면 제3차 전쟁이 터진다고 생각하여 한반도에서 무승부 전략을 세웠다. 그 뒤 휴전선으로 분단된 한반도에서는 '어느 체제가 민족을 행복하게 만드느냐'라는 명제를 내건 새로운 형태의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 이 전쟁에서 남한은 이기고 있으나 北이 핵무장에 성공, 한반도의 미래는 아직 불확정적이다. 
    [조갑제닷컴=뉴데일리 특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