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원고농학생들의 항일투쟁...전문학교 최초의 비밀결사

    신 한 풍 /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머리말

일제가 한국을 강점하여 한국사회의 제도와 구조를 식민지 틀로
바꾸어가는 동안 한국의 청년학생들은 항일투쟁에 앞장서 주권회복을 위해 투신하였다.
1919년 동경유학생들에 의한 2•8 독립선언이 발표된 이후 축적된 국내 학생들의 저력은 거족적 민족독립운동인 3•1 운동으로 표출되었다.
그리하여 3•1 운동 이후 민족해방운동에서의 새로운 이념인 사회주의가 대두하였고, 민족주의도 타협적 민족주의(민족개량주의 또는 실력 양성론) 와 비타협적 민족주의로 분화되었다.

1920년대 중반 이후의 이러한 변화를 수원고등농림학교(이하 수원고농)의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하는데, 특히 1928년 조선개척사사건은 우리나라 전문학교의 최초의 비밀결사사건으로서 조직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했던 것으로 괄목할 만한 사실이 아닐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제1차 수원고농사건 (1928년 9월 ~ 1930년 3월)은 실력양성론에 입각하였다가 1931년 이후 1935년까지의 상록수운동•독서회(제2차 고농사건)은 사회주의에 입각하여 전개되었다. 제3차 수원고농사건(1939년 4월~ 1941년 9월) 한글연구회는 다시 민족주의로 환원되었다. 

오늘날 서울대학교 농업생명 과학대학 전신이며, 당시 전문대학이었던 수원고등농림학교는
광무8년(1904년 9월 1일) 고종의 신교육령에 따라 근대교육기관으로 출발한 당초의 취지와는 달리 식민지 정책하에서 학술적으로나 기술적으로나 일본의 국책에 맹종하는 어용학부로 전락하였고, 그리하여 일본의 식량공급기지로서의 역할 수행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변질되었다. 
따라서 교내에서의 한국인 학생에 대한 차별과 천대는 날로 가중되었지만 전 근대적 테두리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던 농촌을 부흥시키고 그들에게 정신적 자각을 일깨워주기 위해서 수원고농을 지원했던 한국학생들은 식민지하의 농학도가 가져야 했던 우국적 사명감으로 강한 동료의식이
싹트게 되었다.

학생전원이 기숙사생활을 하던 수원고농 교내에는 동료(東寮)라 부르는 기숙사에 한국인 학생을 수용하고, 서료(西寮)라 부르는 신식 건물에는 일본인 학생들을 수용하게 됨에 따라 일본인과의 대립, 경쟁을 피할 수 없었다.
동•서료 학생들간의 차별대우는 크고 작은 충돌을 불러일으키는 가운데 당시의 시대상황은 항일, 독립을 향한 단결과 민족정신으로 점고 되어갔다.

특히 수원고농 학생들의 항일투쟁을 위한 구심체로서 한국인만의 기숙사인 동료를 중심으로
한국인의 민족정기, 민족혼을 선양하는 갖가지 다채로운 행사를 비밀리에 진행시키고 있었다.
그것을 ‘동료정신(東寮精神)’이란 표현으로 수원고농 내에서의 민족정신의 맥으로 삼았고,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맹휴를 지속하면서 일제에게 한국 침략의 죄과를 회개케하여 우리 국가의 독립을 목적으로 1926년에 비밀단체를 조직하게 되는데 이것이 건아단(健兒團)이었다.
  • ▲ '조선 초유의 학생 결사사건'으로 수원고농의 항일운동 전모를 보도한 동아일보 지면.(자료사진)
    ▲ '조선 초유의 학생 결사사건'으로 수원고농의 항일운동 전모를 보도한 동아일보 지면.(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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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차 수원고농사건

    1) 건아단(健兒團)

    1926년 4월 수원고농 농학과에 입학한 김찬도, 우종휘, 고재천, 권영선, 김봉일, 김익수, 임학과의 백세기, 육동백 등은 1926년의 6·10 만세사건, 동맹휴교 사건 등으로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한편, 동료에서의 생활을 통하여 한국인들 사이에 힘을 기른 후 1년 선배인 김성원을 중심으로 단합하였다(<김승학, 「한국독립사 상권」 1972, 통일사 226쪽>).

    아울러 1927년 4월에는 농학과에 황봉선, 남영희, 김문찬, 임학과에 한전종 등이 입학하였는데, 이들도 회원으로 받아들여 단합하였다. 그들은 우선 한국인 학생들로 수양단(修養團)을 조직하여 단장 김찬도(2년), 지도위원 고재천(2년), 남영희(1년) 등으로 하고 화랑도 수련운동을 전개하였는데, 그 내용은 한국인 학생의 체위 향상, 정신개조, 학력증진을 목표로 유도, 검도, 등산, 냉수마찰, 조기운동 등 1가지를 의무적으로 행하도록 하였다. 아울러 종래 타락한 생활에 빠진 학생을 대상으로 술과 담배의 금지운동을 전개하였다. 

    학생들은 민족운동의 중심을 농민운동에 두었으나 재학중의 농민운동으로서는 농촌계몽운동
    만이 가능하다고 판단하고 계몽운동에 착수하였다.
    우선 학교에서 제일 가까운 서둔리 동마을, 고색리에 야학을 설치하고 순번으로 나가서 글 모르는 농촌 청년들과 아동들에게 국문과 산수, 한국역사를 가르쳤다.
    때로는 농촌 인사들을 모아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도 하였다.
    아울러 학생들은 민족의식의 고취를 위하여 인근 제암리를 방문하기도 하였다.
    이곳은 1919년 4월 5일 일제가 무고한 한국인을 집단으로 학살한 곳이었다.
    그들은 이곳을 방문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하였고, 아울러 기숙사로 돌아오는 길에는
    애국가를 합창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그 때의 감격을 김찬도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김찬도 일지, 37쪽>).

    기미년 독립운동에 수원사건으로 수십명의 애국동포가 잔인무도한 일본군병에게 화장당한
    제암리도 團을 지어 방문하였고, 寮에 돌아오는 길에서는 애국가를 합창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우렁차게 불렀든 것입니다. 아! 그날의 감격은 아직도 나의 혈관에 불질러 줍니다.

    수원고농 학생들은 1926년 여름 천도교계 조선농민사의 중심인물이었던 이성환(李晟煥)이
    수원고농을 방문한 것을 계기로 조선농민사 지부를 수원고농 내에 설치하였다.
    (<김찬도 일지, 38쪽>).
    천도교에서는 1925년 10월 조선농민사를 설립하여 농민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는데,(<조동걸,1979,「일제하 한국농민운동사」 한길사, 169쪽>) 이 조선농민사는 중앙이나 지방이나 공히 천도교인 외에 농민운동에 가담한 농민 또는 사회인사를 망라한 당시 민족개량주의자들로 구성된 대표적인 농민계몽운동 단체였다. 운동의 내용을 보면 1920년대에는 계몽운동을 주축으로 전개하였다.
    이러한 조선농민사의 수원지부를 학교내에 설치한 학생들은 특히 이 단체의 활동 중 야학활동에 공감하였다. 그리하여 종래 학생들이 가르치던 수원군 안용면의 야학 외에 그 부근 각면에 농민야학을 설립, 운영하기에 이르렀다. 학생들은 서로 순번을 정하여 야학에 참여하였는데, 김찬도가 지부장이 되고 권영선 외 4명의 학생이 간부가 되었다(<동아일보, 1928.9.18.>).

    이들이 추진한 야학 중 1927년에 만들어진 수원군 고색리 야학은 생도수가 남학생이 89명이었고, 김성원•김찬도 외 13명이 교사로 활동하였으며, 수원군 서둔리 야학은 남학생이 106명이었고, 김성원•김찬도 외 19명이 교사로서 활동하였다.

    수양단 활동과 야학활동을 활발히 전개하던 학생들은 운동을 보다 체계적으로 전개하기 위하여 결사체의 조직을 도모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27년 6월 동교 동료안에 있는 한국학생 운동자들 사이에 건아단(健兒團)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농민대중의 계발을 통한 새로운 조선 건설을 강령으로 삼고 단군기원의 연호를 사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들은 1928년 봄 고농 제6회 졸업생들에게 기념으로 은메달에 졸업연호를 단기 4261년이라고 새겨 주었던 것이다.
    당시의 감격을 김찬도는 그의 회상기에서(<김찬도 일지, 42쪽>),

      단기 4261년 고농 제6회 졸업생으로 학원을 떠나게 된 선배 제형들에게는
        기념품으로 드리는 은메달에 졸업연도를 단기 4261년이라고 박아서 드렸든 것입니다.
       제6회 졸업생 제형들이여! 그 기념의 메달을 그릇된 황민사상으로 버리신 분은
       아니 계실 줄 믿습니다. 금일까지 귀중히 가지고 계시는지, 제형은 분명히
       자랑꺼리의 기념품이 되실 것입니다.

    라고 하여 당시의 활동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는 것이다.
    건아단에서는 먼저 학생들의 아침 늦잠자는 버릇을 고치기 위하여 조기회를 조직하여
    덴마크 체조를 하였다. 또한 냉수욕 등도 실시하였으며, 기회있을 때마다 등산대, 도보대, 여행단 등을 조직하여 계속적으로 심신 단련에 노력하였다.
    아울러 동료내에 도서관을 설치하고 당시 조선어로 간행되는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 일간신문과 『조선농민』 등 잡지를 비치하고 독서와 사상통일에 힘을 기울였다.

    또한 서울에서 명사를 초청하여 기숙사 안에서 강연회와 좌담회 등도 개최하였는데,
    그 때 초청된 인사로는 이대위(李大偉), 홍병선(洪秉旋)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의 내방은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기독교인이었던 김성원이 추진하였으며, 김성원은 1930년대 장로교 총회 초대 농촌부 기술간사로 조만식, 한경직, 안창호 등과 함께 활동하기도 하였다.
    이를 계기로 수원고농에서도 Y.M.C.A. 운동이 전개되었고, 아울러 일부 학생들은 개인적으로
    신간회(新幹會)에 가입하기도 하였던 이유로 학교당국의 주의를 받고 있었다.

    특히 야학과 관련하여서는 책임자인 김찬도, 교무책임자인 권영선 등의 활동이 주목된다.
    김찬도와 권영선은 조선농민사 수원지부가 운영하고 있는 안용면 고색리 야학부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김찬도는 이를 계기로 자기가 담임을 맡고 있는 학생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시키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1927년 11월 하순부터 1928년 4월 하순까지 야학교에서 조선역사를 가르칠 때 갑반과 특별반의 학생 최기헌과 전인덕 외 수명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또한 권영선도 학생들의 성적품 전람회를 개최하기 위하여 학생들에게 작문을 짓게 하였다.
    그런데 특별반의 학생 전인덕의 작문 중, “우리는 일본에 ○○된 ○○가 아니다” 등 민족의식이 있는 내용이 있음을 보고 여기에 수정을 가하여 “우리 조선반도에 거주하는 우리 소년 등은 ○○된 우리 입장. 우리는 지금이 ○○ 도 없는 ○행한 ○○인 것을 각오하고 다시 우리는 ○○건설에 노력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라” 라고 고쳐주었으며(<조선 1930.3.6.>),
    또한 “태평양에는 만국기를 단 군함이 오고 가건만, 아 슬프다 태극기를 단 군함은 한 척도 보이지 않는구나”라는 작품도 전람회에 출품하여 일반인의 민족의식 고취에 노력하였던 것이다.
    권영선은 전람회에 출품되었던 작품 중 이것들을 소지하고 있었던 것이 문제가 되어 후일 형을 받게 되었다(<김찬도 일지, 39-40쪽>).

    한편 건아단은 일본에 있는 한국인 유학생들이 조직한 조선농우연맹(朝鮮農友聯盟)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조선일보 1930.2.22.>). 조선농우연맹은 1928년 5월 27일 일본에 유학하고 있는 전문학교 이상 학생들로 조직된 단체로 조선의 농촌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오직 조선인 스스로의 힘으로 괭이를 들어야 한다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으며, 이를 실천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사업을 실시하고자 하였다.
    1. 하기 순회 강연을 할 것
    1. 지방농업상태를 조사할 것
    1. 하기 농업강좌를 개최할 것
    1. 조선농촌의 특수성을 조사 연구할 것

    그리고 집행위원은 강종무(駒場農大) • 조병태(東京農大) • 김억만(東京高蠶) • 김주건(千葉高園) • 배일환(麻布獸醫) 등이었으며, 위원대표는 강종무였다(<동아 1928. 7. 13>).
    조선농우연맹의 이러한 취지와 사업은 수원고농 건아단의 뜻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건아단은 조선농우연맹에 가입하는 한편 지부를 수원고농에 설치하였다. 

    그 후 건아단에서는 수원지부 대표로 임학과 2학년에 재학중인 한전종을 동연맹의 조선순회
    강연 때 파견 하는 등 적극 참여하였다. 그러나 남부지방에서의 강연 중 도처에서 중지와 금지를 당하였다. 그 결과 결국 조치원에서 해산되고 한전종은 학교로부터 무기정학을 당한 것을 계기로 계림농흥사로 명칭을 개칭하여 위장하였다(<국가보훈처, 「독립운동사 자료집」 제3권, 549쪽>).

    2) 조선개척사(朝鮮開拓社)

    1927년 7월 5일 수원고농 농과 2학년 김찬도, 권영선 등 24명은 강원도 회양군 난곡, 강원도
    평강군 고삽면 세포리, 함경남도 함흥, 원산 등지와 금강산 방면에 8일간의 예정으로 수학여행을 다녀왔다. 
    그들은 그 중 난곡에서 1차 세계대전 때 중국 청도에서 체포된 독일군 포로를 수용했던 농장에 가 보았다. 연합군으로 참가한 일제가 독일의 패전과 함께 독일의 조차지였던 청도에 주둔하던 독일인들을 체포해다가 난곡에 수용시키고 산간을 개간하여 농장을 일구었는 데 당시로는 농업 외에 축산, 과수원 등을 골고루 갖춘 근대식 농장이었다. 그 외 그들은 여러 곳에 있는 일본인 경영의 대규모 농장도 살펴볼 기회를 가졌다. 이에 강한 자극을 받은 건아단 단원들은 조선의 많은 미간지를 개간 이용, 자신들의 전문적인 지식을 이용하여 다수의 대중을 모아 일대 결사를 일으키고자 하였다. 
    즉 일본인 경영의 모범 농장을 시찰하고 돌아온 후 평소부터 뜻하고 있던 독립주의를 조선에 널리 펴기 위해서는 먼저 농민과 더불어 함께 할 필요가 있음을 깊이 깨달았다. 그리하여 졸업 후의 농민운동 계획에 골몰하고 있던 그들은 조선의 대중은 농민이 8할을 차지하고 있으므로 농민과 더불어 독립운동의 중추가 되어야겠다고 결의하고 1928년 6월 하순 경 조선개척사(朝鮮開拓社)라는 비밀조직을 결성하였다. 당시 이 모임에 참가한 인물로는 김찬도, 육동백, 김익수, 황봉선, 김문찬, 남영희, 고재천, 권영선, 우종휘, 김봉일, 백세기 등을 들 수 있다.

    그 후 그들은 조선개척사의 구체적인 계획을 만들기 위해 사람의 눈을 피하여 기숙사에서 3마장 정도 떨어져 있는 여기산(麗妓山) 정상에 올라가 새벽 2시까지 의견을 교환하였다.
    그 결과 1928년 7월 여름 방학으로 빈 기숙사 동료 제3호실, 또는 학생 실습답, 서호변 독립정자, 여기산 등지에서 계속 토의한 결과 그 구체적인 계획안을 수립하였다. 이 계획안을 작성한 김찬도는 그의 일지(43-44쪽)에서 그 내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개척사 운동의 골자는 이러한 것이었습니다. 중앙집권의 체제로서 농민운동을 해놓고 일본으로 하여금 외국과     의 전단(戰端)을 일으키어 이 전란을 기회하여 농민봉기를 꾀하고 이로써 우리민족의 자유와 정치적 독립을 획     득해 보고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후의 조선총독부의 인가얻은 사업단체로 위장하기 위해서 개척사안에     쓰여 있든 정치적 문구는 기교있게 빼어버리고 개척사안의 근본적인 목적 즉 민족적 독립운동을 목표로 삼고     농민으로서 흥기하겠다는 뜻으로 농흥사(農興社)라 개명하고 조직의 방법과 사업의 내용은 순개척사안 그대로     하여 훌륭한 농촌 개척 사업 단체인 농흥사안을 맨드러 놓고 결성을 작성했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결성     한 농흥사는 틀림없이 개척사의 목적 즉 조선독립을 기도한 정치단체이었으며 아직 인가수속이 없었으니 비밀     결사로 규정되어 동지 11명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당했던 것입니다.

    즉, 개척사는 일본이 외국과 전쟁을 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중앙집권적 체제하에 농민봉기를 전개, 조선의 독립을 달성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하여 학생들은 개척사안에 쓰여있는 정치적 문구를 제거하고 단체의 명칭도 농민을 흥기시키겠다는 농흥사로 개명하였다. 즉 비밀조직인 개척사의 표면 단체가 바로 농흥사였던 것이다.
    표면단체이며 합법적인 단체인 농흥사는 계림농흥사(鷄林農興社)라고도 하였으며(김승학의 앞의책, 226쪽), 우종휘가 중심이 되어 그 표면적인 목적을 다음과 같이 내세웠다.

    1. 이익배당배제
    2. 조직원 생활공동보장
    3. 조직원 자녀교육비 공동부담실시
    4. 국내 주요 적지에 공동출자 농장설치

    즉 계림농흥사는 수원고농 출신 선배들과 당시 국내외에 산재한 모든 농학도를 포섭하여
    전국 농촌에 광범하게 협동농장을 만들어 농촌 기술향상, 농촌 문화 및 경제 향상을 추진,
    이상농촌건설을 내세웠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이를 이용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 운동의 대내적 책임은 김찬도가 담당하였으며, 대외적 책임은 우종휘가 전담하였다.

    농흥사는 취지문을 만들어 졸업생들에게 보내는 한편(<수원농학80년」,47-48쪽>), 제일먼저 문자보급운동을 전개하였다(<조선 1930.2.22.>). 우선 수원군 안용면 일대에 농민야학을 설치하고 학생들이 배운 농림학에 대한 과학적 지식을 보급하는 한편 국문교수 등 문자보급운동에도 전력을 다하였다. 또한 농민조합 같은 기관을 각 촌에 설치하게 하고 향리에 돌아가서도 귀농활동으로 각각 실제운동에 종사하기를 기약하였다.
    계림농흥사 회원들은 졸업기를 앞두고 각 방면으로 사업계획을 추진하던 중 1928년 봄에 졸업하고 경남 김해 공립농업학교에서 교사로 활동 중인 김성원이 체포된 것을 계기로 1928년 9월 1일 수원서에 검거되었다(<동아일보 1928.9.18.>).

    김성원은 자신의 검거 당시의 상황과 계림농흥사의 탄로 계기에 대하여 회고록에서, 

        1928년 필자가 경남 김해농업학교 재직 당시 그해 5월 1일에 김해읍에서 거행된
       어린이날
    축하대회에 초청되어 그 석상에서 축하한 일이 있었는데
       그 때 말이 좀 지나쳐서
    일시 설화사건을 일으킨 것이 검찰의 주목을 끌게 되어,
       그 후 저들의 미행과 내사를 받게 되고 나중에는 학생들에게 독립사상을 선전하였다는
       혐의로 구속되는 동시에 가택 수색을 한 결과, 수원에 있는 동창 중 우종휘씨와 내왕한
       서신 1매가 발각되어 이것이 도화선으로,
    수원에 일대 검거의 선풍이 일어나게 된 것인 바...

    라고 밝히고 있다.
    또한 조선개척사의 중심인물인 김찬도도 당시 자신들의 체포상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김찬도 일지,45-46쪽>).

        단기 4261년 고농 제6회 졸업생으로 경남 김해공립농업학교 교원으로 가 있든
         김성원군의 사건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김군이 많은학생들에게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을 고취시켰다는 것으로 제령(制令)제7호 위반이 되어 외금강 온정리에서
         중등교원 하계강습을 받든 도중에 잡히었든 것입니다.
         김군의 부친은 이 일을 알자 급히 김해로 달려가서 김군 숙소에 있든 소지품 중에서
         불온하다고 증거가 될만한 것은 모두 없애 버렸든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어떤 서책 속에서 우종휘군이 보낸 서신이 끼어 있어서,
         이것이 경찰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 서신 중에는 우리가 농흥사를 결성하였다는
         사실을 전달한 것이 있었든 것입니다. 이로 인연하여 수원 경찰의 손이 뻐치게 되었든
         것이오. 우리들의 숙료를 검색하고 보니 농촌야학전람회의출품, 개척사 초안과
         농흥사의 결성 절차가 모두 드러나게 되었든 것입니다.
         김성원군은 단독심리를 받어 복역하게 되었고 우리들은 수원서 감금되어
         최조를 받게 되었든 것입니다.

    1928년 9월에 발각 구속되어 경찰의 취조를 거쳐 송국된 고농학생들은 다음과 같다.

    김찬도(金燦道,21) 황해 황주군 황강리             농과 3년생
    권영선(權永善,26) 황해 안악군 용문면 민화리        ″  3년생
    김익수(金益洙,25) 전남 나주군 공산면 신곡리        ″  3년생
    황봉선(黃鳳善,22) 충남 천안군 목천면 교천리        ″  3년생
    김문찬(金汶贊,27) 강원 이천군 이천면 선암리        ″  2년생
    남영희(南榮熙,24) 충남 아산군 음봉면 동천리        ″  2년생
    고재천(高在千,25) 전남 담양군 창평면 용수리        ″  3년생
    우종휘(禹鍾徽,25) 함남 삼수군 별동면 동하리        ″  3년생
    김봉일(金奉日,25) 경남 고성군 고성면 월평리        ″  3년생
    백세기(白世基,22) 충남 공주군 계룡면 부암리      임과 3년생
    육동백(陸東白,22) 충북 옥천군 안내면 서대리        ″  3년생

    그런데, 고농의 개척사 문제를 경찰에서 취조하고 있을 때, 학교당국은 개척사 학생 11명을 퇴학 처분하고 말았다. 그리고 고농교장은 한국인 학생들을 모아놓고, <조선인의 운동은 일부 불량조선인의 행동인 것이며, 그들이 아무리 이런 운동을 전개한다 하여도 조선에는 2개 사단의 일본군이 있으며 기민한 경찰망이 있기 때문에 도저히 효과가 없을 것이다.>라는 요지의 훈시를 함으로써
    한국인 학생들을 크게 분개시켰던 것이다. 고농교장의 이와 같은 발언은 한국 학생과 한민족의 항일민족운동전반에 대한 위협이며 모욕이었다.

    또한 9월 1일에는 실습시간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을 실습장소로 내보낸 뒤, 경찰이 한국인 학생만의 물품을 수색하게 하였다. 여기에 대하여 고농의 한국인 학생 44명은 다음과 같은 이유를 제시하고 퇴학원서를 제출하였다.

    (1) 교장의 훈시는 군대와 경찰을 믿고 학생을 위협하였기 때문에 교육자가 취할 태도가 못된다.
    (2) 9월 1일 학생을 실습장으로 내보내고 경찰이 무단수색하게 하였다.
    (3) 검거된 학생들의 범죄가 확정되기 전에 퇴학 처분을 시켰다.

    학생들이 동맹퇴학을 하고 각자 집으로 돌아가자 당황한 학교 당국에서는 그 지역 경찰을 통하여 집으로 돌아가 있는 학생들에게 복교하기를 권유하는 한편 9월 25일에는 학생들 사이의 이간책으로 이미 퇴학원서를 제출한 임과 3년생 김녕현과 동 2년 한모군 등 2명에게 퇴학 처분을, 그리고 이어서 9월 30일에는 농과 3년생 장보라, 동 3년생 이흥원, 동 1년생 홍모 등 4명에게 각각 제적 처분을 내렸다(<동아일보 1928.10.3. 및 조선일보  1928.10.4.>).
    이러한 학교 당국의 압력에 학생들은 하는 수 없이 20일 후에 전부 등교하였다.

    한편 학교 당국에서는 이 사건을 계기로 한국인 학생의 입학정원을 더욱 감축하였으며,
    사립학교 출신이 많았다는 이유로 사립학교 출신은 더욱 입학하기 어렵게 되었다(<김찬도 일지, 49쪽>). 뿐만 아니라 한국인 학생들에 대한 심한 차별대우를 하였다.

    1930년 4월 25일 조선일보에서는 「수원고농 학생대우차별」이라는 제목하에,

      수원고농의 학생사건은 아직도 세인의 기억에 살아있지 아니하였거니와
      그 사건이 있은 후부터 학교 당국에서는 조선학생들에게 단속을 가하여
      종래 조선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이 따로 기숙하고 있던 동서료를 한 곳에 합하여 놓았으며,
      학교당국에서는 기숙사에 있어서도 조선인 학생은 한방에 수삼인 씩 모아넣고
      그뿐 아니라 책상도 안자서 공부하는 것을 사용하게 하며 조선에서 발행하는 3가지 신문과
      기타 잡지 구독도 일일이 허가를 얻어야 되는 그 반면에 일본인 학생에 대하여는
      한 방에 한 사람씩 있게 하며   책상도 높은 것으로써 걸터안자서 공부하게 되었으며

      물론 외출이라든가 신문 잡지 구독도 다 자유로 할 수 있게 한다는 바
      이에 대하여 조선인 학생들은 물론이며 일반도 그 차별적 대우에 분개하여 비난이 자못 비등한 중 수원 각 사    회단체에서는 그 대책을 강구하기 위하여 방금 조사에 착수하였다는 바, 점차 그 문제의 전개가 주목된다.

    라고 하여, 한국인 학생들의 항일거점인 동료기숙사를 없애고 일본인 학생들과 함께 기숙사를 이용하게 하는 한편 기숙사 생활, 책상의 지급, 신문과 잡지의 구독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한국인 학생들에게 차별대우를 하였으며, 이러한 학교 당국의 태도에 대하여 한인학생은 물론 수원지역 각 사회단체에서도 분개하였던 것이다.

    한편 김성원은 김해 경찰서에 검거된 후 1928년 9월 28일 부산지방법원으로부터 징역 2년을 판결받고 복역하다(<동아일보 1929.10.25.>), 소위 일제의 대전감형(大典減刑)으로 1년6개월만에 출옥하였다(<동아일보 1929.12.8.>). 한편 치안유지법위반과 보안법 위반으로 피검된 11명은 재판을 받게 되었다. 이 사건의 변호는 이인(李仁)을 비롯하여 김병로(金炳魯), 신태악(辛泰嶽), 김용무(金用戊) 등이 담당하였다. 이인의 변호에 힘입어 예심으로부터 판결을 받을 때까지 18개월간 서대문 감옥에서 고생하고 있던 학생들의 대부분이 면소되고 김찬도, 권영선 등 2명만 기소되었다(<동아일보 1930.2.21.> 및 <조선일보 1930.2.21, 1930.2.22.>). 그리고 김찬도와 권영선이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3년을 언도받았다(<동아일보 1930.3.10.>). 그러나 이인은 이 변론으로 6개월의 정직처분을 받게 되었다(<최영희, 김호일, 1989,「애산이인」 애산학회, 114쪽>). 이 사건의 변호는 이인(초대법무장관)을 비롯하여 김병로, 신태악, 김용무 등이 나섰는데, 공판이 열리자
    이인은 약 1시간 동안의 변론으로 우리학생들의 무고함을 주장했는데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동양의 평화를 위해서는 한•중•일 3국이 정립하여 상호간의 발달을 도모하고
         나아가서는 인류문화복지에 공동참여한다는 것이 한일합방 때 일본이 표방한 취지가 아니냐.
         그런데 이제와서 한민족을 노예시하고 차별하니 일본에 대한 감정이 악화함은

         오히려 당연한 결과이다. 양부모의 학대에 견디지 못할 지경이면 양자는 친부모를 그리워
         할 것이요, 그리하여 친가의 옛일을 다시 생각함은 인지상정이다.
         일본의 식민정책은 이와같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 아니고 뭣이냐.

    여기서 내가 양부모라함은 일본을 말함이요, 양자는 우리학생들을, 친부모 친가는 독립한국을 비유함이다. 나는 계속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인간이란 원래 굶주리면 식물을 찾고 결박되었을 때는 자유와 독립, 해방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본능이니 학생들이 자유를 갈망하는 것은 이 본능에 의한 양심적 발로이고
         역사적 필연이라 할 것이다.”


    이렇게 열변을 토하는데 미우라(三浦)라는 입회검사는 줄곧 나의 말을 받아 쓰는 것이다.
    내말이 제 비위에 맞을리야 없지하고 생각을 하며 변론을 마치고 나자 미우라는 벌떡 일어나서 변론이 불온하다면서 서슬이 퍼렇다. 미우라는 날더러 검사실까지 동행할 것을 요구했다. 검사실에 가니 미우라는 조서를 받자고 덤벼들면서 구속을 한다고 야단이다. 금방 남을 변호하던 자신이 법정에서 돌아서 나오자 입회검사로부터 이런 꼴을 당하니 기가 막힌 노릇이었다. 그러나 나는 하고 싶은 말을 다 했으므로 오히려 시원하다는 생각뿐이고 한편으로는 될 대로 되라는 배짱 뿐이었다.
    하긴 나의 변론은 날이 갈수록 격렬해졌던 게 사실이다. 사건에 쫓기며 법정에 서는 횟수가 늘수록, 또 일제의 하는 처사를 보면 볼수록 속에 있는 말을 다하지 못하는 울분이 쌓였던 것이다.
    이 사건은 얼마 후 변호사회에서도 임시총회를 열어 대책을 강구하자는 등의 논란을 일으켰고, 일본인 변호사들도 법정변론까지 간섭하는 것은 말도 안된다는 여론이었다. 결국 1개월쯤 지나 사이또(薺藤) 총독은 나에게 6개월의 정직처분을 내렸다. 
     
    그리고 당시 투옥된 11명 중에 권영선씨는 옥고로 말미암아 출옥 후 얼마되지 않아 사망하였으며 수원고농 사건으로 졸업하지 못한 학생들은 해방 후 교수회의 결정에 따라 졸업장을 받았다(<수원농학 70년, 53쪽>). 한편 일제는 그들이 믿었던 전문학교에서 처음으로 이러한 비밀결사 사건이 일어나자(<동아일보 1920.9.16.>), 당시 총독부 교육정책이 실패했다는 측면에서 큰 충격을 받고 총독 유고(諭告)를 발표하는 등 대책 마련에 부심하였다. 결국 그들은 이 사건 관련자들에게 2년이라는 장시간을 예심에 수감하여 혹형(酷刑)을 가함으로써 학생운동 처벌의 본보기로 삼으려 하였던 것이다(<박환, 「1920년대 수원고등농림학교 학생비밀결사 -건아단과 조선개척사를 중심으로-」, 길익현교수 정년기념논총,1996, 589-602쪽>).

    제 2차 수원고농사건 (상록수 운동과 독서회)

    앞장에서 보았듯이 실력양성론에 입각한 수원고농의 학생운동은 주로 야학을 통하여 농민대중을 계몽, 각성시키고자 하였다. 그리고 조선개척사는 이러한 활동과 함께 장기적으로는 대농장을 형성하여 이를 기반으로 군대를 양성하고 독립을 쟁취한다는 발전전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1920년대 중반이후 민족운동에 사회주의사상이 영향을 끼치기 시작하였다.
    학생운동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어서 수원고농에는 1930년대에 들어와 실천적인 측면에서 영향을 끼치기 시작하였다.

    수원고농의 학생운동은 조선개척사사건 이후 한때 주춤하였으나 김종수가 상록수운동과 함께 독서회 활동을 활발히 전개함으로써 다시 활기를 띠게 되었다. 즉 김종수는 야학을 확충, 증설하여 학기 중에는 수원을 중심으로 활동하였고 방학 중에는 전국 각지에 산재해 있는 농업지도자인 모교 졸업생과 제휴하여 농민 중심의 문맹퇴치와 항일의식의 고취에 전념하였다.

    또한 교내에서는 일제의 식민지 농업정책을 위한 황민화교육(皇民化敎育)을 반대하는 능력의 연마를 위해 독서회를 강화하는 한편, 한인학생들의 정신적 통일을 위하여, ① 농촌 지도를 위한 「새벽 사람」이요, 「여명(黎明)의 아들」이라는 긍지를 강조하고, ② 조선인 학생만의 기숙사인 동료취사부(東寮炊事部)를 자치제로 운영하며, ③ 조선인 선수만으로 구성한 축구부를 편성하는 등 정신, 체력, 단결을 통해 항일투쟁의 대열에 서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우리 민족의 8할 이상이 농업을 전업으로 하는 농민이므로 농민의 단결과 봉기에 의하여 독립을 쟁취하고자 하였다(<김승학의 앞의 책, 226쪽>).

    그런데 김종수는 1931년 여름 일본 여행 중 공산 러시아의 생산분배 상황을 듣고 이용필, 조만원 등 동료들에게 계급의식을 주입하였다. 그리고 1931년 11월 경 수원군 일형면 서둔리에 있던 화서야학원(華西夜學院)의 교사로 있으면서 이연산, 조만원 등과 일본 제국주의의 타도와 공산주의사회의 건설에 관하여 협의하고 이용필, 최홍기와도 협의하였다(<大邱地方覆審法院, 昭和 11年 刑控 第489号, 『水原高農讀書會事件判決文』(이하 판결문), 안전행정부 국가기록원 나라기록관, CJA0000872>).

    이러한 협의가 있은 후 이용필, 최홍기, 김광태는 수원군 일형면 동리 이강렬의 집에서 여러 차례 회합하여 수원고농의 조선인 학생에 대하여 개인적으로나 집회 등을 통하여 사회주의사상을 주입하기로 하고 졸업 후에는 조선 내 농민의 적화를 위하여 힘쓸 것 등을 협의하였다. 이렇게 볼 때 수원고농에 사회주의에 입각한 학생운동이 출현한 것은 1931년 중반 이후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위의 협의에 의한 것인지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수원고농 졸업생을 중심으로 한 비밀결사사건이 종종 발생하고 있다. 1934년 8월 1일 통군정 격문사건, 왕자제지의 동맹파업 등은 모두 李正煥 등 수원고농 졸업생들이 이연산, 조만원 등과 일본제국주의의 타도와 공산주의사회의 건설에 관하여 협의하고 이용필, 최홍기와도 협의하여 전개되었던 것이다(<조선일보, 1933. 10. 1 조간>). 그리고 이용필은 졸업 후 김천농회의 기수로 있으면서 조선공산당재건협의회 김천그룹에 가담하여 수원고농 독서회의 후신인 조선공산주의자동맹을 김천그룹의 하부기관으로 하였다(<이기하, 「한국공산주의 운동사」, 194-195쪽>).

    조선농우연맹의 수원지부 대표였던 한전종(韓琠鍾)이 중국공산당동만위원회 조선국내공작위원회의 지령을 직접 받고 국내에 잠입한 후 경성을 중심으로 가두세포와 독서반, 그리고 반제반동운동과 비밀결사 활동을 전개하였다(<동아일보 1932. 4. 8>). 그는 이창주•김정구와 함께 용산가두세포를, 정종석•신대성과 함께 경성가두세포를 조직하고, 근화여학교 교사인 장보라(수원고농 친구)와 함께 근화여학교 독서회, 신흥서점ML독서회, 보성고보교내반제반 및 독서회, 연희전문독서회, 양정고보독서회, 보성전문반제반, 노량진혜성소년독서회 등을 조직하였다. 이러한 조직은 보성고보 내의 적색독서회와 학생반제동맹이 발각되면서 1932년 4월에 와해되었다(<金俊燁, 金昌順, 1980,「한국공산주의운동사 자료 Ⅱ」 고려대학교 출판부, 482쪽>).

    이와 같이 수원고농의 학생운동은 졸업 이후에도 재학생과 연락을 지속하면서 꾸준히 전개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는 독서회 활동이 전형적이라 생각된다. 그러므로 사회주의사상에 입각한 수원고농의 학생운동은 이를 중심으로 서술하고자 한다. 앞에서 서술했듯이 수원고농의 학생운동에서 사회주의가 실천적인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은 김종수의 일본 여행 이후인 1931년 중반 이후의 일이었다.
    김종수는 먼저 개인적인 차원에서 화서야학원을 중심으로 사회주의에 입각한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동지의 규합에 힘썼다. 그 결과 이용필, 최홍기, 김광태, 김준강, 김재곤, 유재환 등의 동지를 획득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을 중심으로 하여 사회주의에 입각한 학생운동이 수원고농에서 본격화하였다. 

    먼저 수원고농에서의 최초의 사회주의 학생운동 조직은 1933년 이용필, 최홍기, 김광태, 김준강이 조직한 독서회라 할 수 있다(판결문). 독서회는 조직 이후 유재환, 김재곤, 임기집, 이치영, 최태환, 손창규 등을 회원으로 가입시킨 후 임기집을 제외한 9명이 공산당선언의 부록을 참고로 하여 독서회의 강령, 규약을 채택하였다(판결문). 그리고 이들은 1933년 12월 이후에는 매주 토요일에, 1934년 1월 이후 3월까지는 수차에 걸쳐 공산주의 이론의 발표, 토론 및 국제정세, 시사문제 등을 비판하였고 조선인 학생의 야유회, 료회, 급회, 취사부회 등을 통하여 민족주의, 공산주의에 관한 선동연설을 함으로써 사회주의의 고취에 힘썼다(판결문).

    한편 김광태는 독서회원에게 연구자료를 제공하기 위하여 『論理學斷片』, 『러시아革命年譜』, 『辨證法的唯物論敎程』의 제1절인 「레닌주의철학의 임무」 중 일부를 출판, 제공하였다. 이와 같이 이론학습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독서회는 1934년 10월 30일 김광태, 김준강, 최태환, 손창규, 이치영, 김경천 등의 회합에서 “미온적으로서는 발전성이 없기 때문에” 해산하였다(판결문). 그리고 이용필과 김광태의 졸업 이후 독서회의 책임이 되었던 김재곤은 서면으로 독서회의 해소를 이용필, 최홍기에게 통고하였다. 독서회의 해소를 추진하면서 김광태, 유재환. 김재곤은 해소 이후의 대안으로서 ‘조선공산주의자동맹’을 1934년 10월 14일 조직하였다. 이들은 이 자리에서 공산당선언의 부록 「공산주의자동맹규약」에 기초하여 동맹의 규약을 채택하고 동맹원의 활동방침, 책임구역을 정하였다(판결문). 그리고 이용필, 최홍기는 사후에 가입하였다.

    또한 조선공산주의자동맹은 “수원고농을 연락본부로 하고 서울을 중심으로 하여 전 조선 각지에서 공산당을 재건”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으며, 이용필을 중심으로 하는 일부는 대구에서 학생들을 중심으로 조직활동을 하였다(동아일보 1936.7.3.). 이러한 활동과정에서 김천고등보통학교맹휴를 조종하였던 이용필이 검거됨으로써 동맹의 실체가 드러나게 되었던 것이다.

    다른 한편 수원고농의 조선인 학생들은 일제의 민족차별교육, 황국신민화교육을 비판하였다.
    황국신민화교육이란 “조선은 실로 흥아적 달성(興亞的 達成)의 근간이 되어 있으며 대륙전진의
    병참기지로서 군사, 경제상의 임무를 완전히 수행할 뿐만이 아니라 사상과 문화 방면에서도 대륙진출의 기지적 임무를 수행하지 않으면 안되며 근본적으로 그 결실을 가져오기 위한 통일된 교육방침을 말한다. 그리고 이를 위하여 국체명징(國體明徵), 내선일체(內鮮一體), 인고단련(忍苦鍛鍊)의 3대 강령을 밝혔다. 그런데 황국신민화교육은 1930년대에 더욱 강조되었는데 이에 대한 반발로서 소위 ‘천황’에 대한 비판이 나타났다. 즉 이용필은 1933년 7월 일본에 수학여행을 다녀온 이후 기숙사에 있은 수학여행  감상담에서 천황을 ”唯一人의 偶像“,  ”唯一한 一人“, ”二重橋의 깊은곳에 사는 그 사람“ 등으로 칭하였다. 또한 최흥기는 이용필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1934년 여름 남부지방에 발생한 홍수에 피해를 본 이재민에게 천황이 35,000원을 하사하였는데 과연 그에게 감사해야 하는가라고 하였고, 이에 대한 답장에서 이용필은 ”이중교의 깊은 곳에 사는 그 사람은 무위도식하여도 일본 제일의 자본가이며 무산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해도 빈곤을 면하지 못하는 것은 이 사회의 모순이라 하여 천황에 대한 불만과 사회구조의 모순을 갈파하였다(판결문). 이리하여 이사건의 주동자들은 치안유지법위반, 출판법위반, 불경죄의 죄목으로 다음과 같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김종수(金鍾壽,29세) 전남 장성군 서      (치안유지법, 불경죄, 출판법) 1년6월
                        전남지방산업 기수
    이용필(李容佖,28세) 경북 금천군 금천읍  (치안유지법, 출판법)         3년
                        금천군 농회 기수
    김광태(金光泰,25세) 경성부 동숭동       (치안유지법, 불경죄)          3년
                        불이흥업주식회사, 자영농
    최홍기(崔弘基,28세) 경기도 이천군 이천면 (치안유지법, 출판법)        3년
                        총독부 촉탁
    김재곤(金在琨,27세) 경성부 중학정         (치안유지법, 불경죄)        옥사
                        무직
    유재환(劉載煥,25세) 경기도 수원군 안용면  (치안유지법)                2년6월
                        학생
    김준강(金浚綱,28세) 경성부 장교동         (치안유지법)                 2년6월
                        조선농회 고원
    이치영, 최태환 이근복, 배정규, 손창규, 이연산, 임기집 (기소유예)

    그런데 이상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들이 사회주의를 어떻게 이해하였는가 하는 점이다. 먼저 이용필은 재판정에서 “사회주의와 조선의 독립은 일개 불가분의 것”(판결문) 이라 생각하고 있다고 하였으며, 최홍기는 “공산주의의 의의에는 약소민족의 해방을 포함”하며 “공산주의가 실현되는 것은 조선의 독립도 당연히 초래되는 것”이라 진술하였다. 결국 이들의 생각은 공산주의사상에는 약소민족의 해방이라는 사상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독서회, 조선공산주의자동맹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이들의 활동은 단순한 공산주의 또는 사회주의적인 활동이라기 보다는 민족운동의 일환으로서 사회주의 사상을 수용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조성운,1998,「일제하 수원고등농림학교의 학생운동」, 「수원문화사연구」, 수원문화사연구회, 133-136쪽>).


    제 3차 수원고농사건<한글연구회>

    1920년대의 후기에 접어들면서 일제는 민족 문화를 말살시키려는 구체적인 정책을 강행하여
    나갔다. 한국인이 한국의 역사와 문화적인 전통을 알고 익혀서 민족적인 긍지를 갖게 되면, 한국인의 반일제의식은 더욱 확산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일제의 한국 통치는 쉽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알고 있던 일제 통치당국은 한국인이 사회적으로 각성하고 계몽되는 것을 봉쇄하였으며, 민족의식의 발전에 뿌리를 둔 대중문화의 형성을 탄압할 수밖에 없었다.
    일제의 식민교육정책의 목표는 궁극적으로 한국인을 일본인으로 동화시키는 것이었다.
    언어동화는 일제가 가장 심혈을 기울여 전개한 식민지동화책이었다. 
    일본어를 국어로 강요하던 일제의 언어동화책에 저항하여, 한국어야말로 민족문제의 핵심이 된다는 진실한 자각을 바탕으로 민족의 정체성 확보와 민족문화보존을 위한 최우선책으로 한글보급운동(문맹퇴치운동)이 전개되었다.

    1921년 12월 3일 휘문의숙에서 사립학교 교사들과 교육자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조선어연구회는 강습회와 강연회개최, 회보발간, 한국어학자양성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한글의 통일•연구•보급운동을 전개했다. 1926년‘가갸날’(뒤에 한글날로 고침)을 제정하고 매년 기념식을 거행함으로써 민족문화유산과 그 보존의 의미를 되새겼다.
    조선어연구회는 1931년 그해로 확대 개편하여 전국 각지에서 한글보급운동을 적극 전개했다.
    동시에 우리말을 연구한 성과로 「훈민정음언해본」(1932년)•「한글맞춤법통일안」(1933년)•「査定한 조선어표준말모음」(1936년)•「계몽야학회속수독본」(1938년)•「외래어표기법통일안」(1941년)등을 발간했다.

    언론계가 중심이 되어 전개된 ‘문자보급운동’은 한글보급을 통해 민족정신을 고양하는 운동으로 발전해 갔다. 조선일보사에서는 1926년부터 ‘아는 것이 힘, 배워야산다’라는 표어아래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했고, 동아일보사에서는 1928년부터 전국적으로 문맹퇴치운동을 계획•준비했다가 1931년 ‘브나로드 운동’을 주도하여 문맹퇴치운동을 펼쳤다.
    이는 한글보급뿐아니라 민족문화에 대한 높은 자부심과 독립사상을 배양하는 역할도 수행하였다. 문맹퇴치운동은 기독교 단체들과 수양동우회, 천도교단 등 민족주의 단체들에 의해서도 전개되었다. 조선총독부에서는 한글보급운동이 민족해방운동을 자극할 것을 두려워하여 강습회 교재가 불온하다는 구실 아래 1935년 무렵에는 운동 자체를 아예 금지시켜버렸다.

    1940년대에는 한국어로 발간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신문과 잡지들이 폐간당했다.
    1940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자진폐간계를 제출하는 형식으로 폐간당했다.
    1941년에는 <문장>•<인문평론>이, 1942년 5월에는 조선어학회 기관지 <한글>이 폐간당했다(<이명화,2012,한국독립운동사 강의 178-180, 186-187쪽, 한울아카데미>).

    민족문화말살의 보다 강력한 원흉인 미나미(南次郞)가 총독으로 부임한 것은 1936년 이었다.
    그는 조선교육령의 개정(1938)•창씨개명의 강제(1939) 등으로 민족성 말살에 식민권력을 여지없이 구사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이래 학원에 대한 탄압이 가중되던 한편, 농촌계몽운동의 일환으로 학생들은 곳곳에 민족야학을 개설하여 민족교육의 대중적 기반을 넓히고 있던 때 일제는 소위 농촌진흥운동의 이름으로(1933) 민족야학을 진흥회야학으로 뒤집으며 잠식하더니 1935년에는 학생들의 농촌계몽운동을 전면적으로 금지시켰다(<조동걸,1993,「한국근대학생운동조직의 성격변화」 한국근대민족주의운동사연구, 역사학회편, 377쪽, 일조각>).

    일제가 우리의 말과 글 그리고 농촌계몽운동을 없애려고 정책적으로 탄압을 가중시키자,
    1939년 4월 신학년 寮會時 정주영의 발의로 수원고농의 ‘한글연구회’가 설립되었다. 
    처음에 10여인으로 발족한 본회가 활발히 움직여서 1939년(일년간)을 보내고 1940년을 맞았다. 회원의 한사람인 김중면이 졸업하여 함경북도 갑산농업학교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그는 갑산농고 학생써클을 통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다가 밀고로 인하여 체포되어 함흥으로 호송되었다.
    이에 관련된 검거가 확대되어 1942년 3월21일부터 5월에 걸쳐 주동자 정주영을 위시하여 민병준•임봉호•박도병•김상태 외에 당시의 寮長 장정현• 남정근•임병현 등이 피검되었고, 이 외에 寮員 선배들과 교제 또는 서신왕래자 다수가 피검되었다.
    1943년 2월 1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개정되어 준열한 검사의 구형이 있었고 같은 해 3월 3일 속개된 법정에서 판사의 언도는 다음과 같다.
      
    김중면(金重冕)    함북 갑산농업교사  (치안유지법, 출판법 위반) 3년(함흥형무소)

    정주영(鄭周永,30) 평북 영변군 강계읍 (치안유지법 위반)     2년(서대문형무소)
                      평북 지방산업기수
    민병준(閔丙駿,26) 경남 부산 대신동   (치안유지법 위반)     1년6개월(대전형무소)
                      식산은행원
    임봉호(林鳳鎬,25) 전북 순창군 인계면 (치안유지법 위반)     1년6개월(서대문형무소)
                      전북지방 산업기수
    박도병(朴道秉,26) 경남 진주           (치안유지법 위반)     1년6개월(서대문형무소)
                      경남지방 산업기수    (치안유지법 위반)     1년6개월(서대문형무소)
    김상태(金象泰)                          (치안유지법 위반)     1년6개월(서대문형무소)

    등이 1945년 3월까지 만기복역 하였다. 그리고 임병현 • 장정현 • 남정근은 불기소로 석방되었다(<상록 62호, 1966년9월, 45쪽>).

    다음은 ‘한글연구회’설립과정을 정주영의 판결문을 통하여 살펴보자(<京城地方法院, 昭和17年 刑空 三0八0号, 안전행정부 국가기록원 나라기록관, CJA0004653>).

    정주영은 수원고등농림학교에 입학한 후 일본인 학생과 조선인 학생간의 대립과 일본인 학생의 모욕적인 태도에 자극받아 민족의식에 점고되어 조선의 독립을 희망하게 되었다.
    그는 조선을 일본제국의 속박에서 벗어나 독립시킬 목적으로 1939년 4월 중순 오후 8시경 수원고농 기숙사 동료 제5료 6호실에서 개최된 회의에서 민병준 외 약 50여명의 조선인 학생에게 「장래를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연설하였다. 「東寮와 축구부는 동일한 것이다. 동료 즉 축구부이고 축구부 즉 동료이기에 60여명의 사람이 전부 모여서 축구부의 이름으로 할 수 있는 동료정신(東寮精神)에 대하여 선배들은 전혀 설명을 하지 않았지만, 우리들이 건전한 정신과 사상을 가지고 조선민중의 행복을 위하여 노력하는 희생적 정신이라고 생각하였다」. 「현재 유태인을 보면 세계적인 부호, 학자, 예술가 등 다수 있지만 국가를 만들기 위하여 독일•이태리로부터 추방당하여 세계각지를 방황하고 있다. 그 원인이 무엇인가 하면 너무나도 개인주의적이고, 향락주의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족성을 부정하지는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실례는 애란(아일랜드)과 영국과의 관계를 보면 명백하다. 
    동료정신(東寮精神)을 살리는 방법이 즉 조선을 살리는 방법이다. 조선의 찬란한 문화를 재현하는데에는 동료정신이 반드시 필요하다.
    「단체생활을 위하여 가장 필요한 것은 단결력이다. 독일민족의 단결력은 우리들이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 단결하는 데에는 서로 양보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 라는 취지의 연설을 하면서 암암리에 조선독립운동을 선동하였다.

    정주영은 1939년 10월 11일 오후 7시경 수원고농 기숙사 제4료 6호실에서 동교생 정창순•송장책•김창하 등과 회합을 갖고 한글폐지, 한국어 사용금지는 한국문화를 말살하려는 일제의 정책에 대항하여 한국의 문화를 발전시키고, 보전하기위하여 「한글연구회」를 조직하여, ①회원은 한국어를 사용할 것, ② 한글철자법 통일안 및 중등정도의 한국어문법을 연구할 것, ③ 매주 수요일 연구회에서 협의하여 결정된 것을 시행할 것을 결의하였다.

    맺음말

    지금까지 수원고농의 학생운동에 관하여
    ① 실력양성론에 입각한 시기 ② 사회주의에 입각한 시기 ③ 타협적 민족주의에 입각한 시기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먼저 실력양성론에 입각한 시기의 특징은 첫째, 이들의 투쟁은 일제의 식민지차별교육정책에 대한 투쟁으로서 동맹휴교와 농민계몽을 위한 농민야학을 운영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수양단, 건아단, 계림농흥사, 조선개척사 등의 조직이 그것은 이름만 다를 뿐 활동목표나 활동상황이 대동소이하였다. 그러나 조선개척사의 경우 營農養兵하여 일단 유사시에 독립할 수 있는 기반을 제시하였으나 실천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조선 전문학교 최초의 비밀결사사건으로서의 의의는 자못 크다고 할 것이다.

    다음으로 사회주의에 입각한 시기의 특징을 김종수가 화서야학원에서 학생들을 지도하면서 사회주의사상을 주입, 선전하였다. 이 시기에는 졸업생과 연계를 도모하였다. 즉, 학기 중에는 수원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방학 중에는 전국에 산재한 졸업생과 연계하여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1933년에서 1934년에 걸친 한전종•이정환 등 수원고농 중심의 독서회 사건, 1935년 이용필 등이 연관된 조선 공산당재건협의회 김천그룹사건 등이 발생하였다. 이들은 공산주의는 곧 약소민족의 해방사상이라 이해하여 공산주의 사회가 실현되면 당연히 조선의 독립은 쟁취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이들이 운동에 사회주의사상을 수용한 것은 민족독립을 위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제1,2차 고농사건 이후 한국인 학생들에 대한 감시와 탄압은 더욱 심하여졌다. 그러나 한인학생들은 이에 조금도 굴하지 않고 더욱 항일정신을 고취하였다. 1939년 신입생을 맞는 東寮회의에서 우리의 말과 글을 닦아 우리 국사와 전통을 연구하여 항일독립정신을 함양하고 민족문화를 계승할 목적으로 독서회 즉 한글연구회를 조직할 것을 결의하여 1년동안 활발히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중 회원이었던 김중면이 졸업 후 함경남도 甲山농업학교에서 수원고농 재학시와 같은 학생독서회를 조직하여 학생들에게 한글과 항일독립정신을 고취시키다가 피검되었다.
    이것이 소위 수원고농의 한글연구회 사건이며, 제3차 고농사건에 해당된다.

    이상으로 1920년대 말부터 1940년대 초에 이르기까지 3차에 걸친 수원고농 학생들의 항일투쟁과정에 대해서 살펴 보았다. 이러한 일련의 활동들은 민족의 독립을 쟁취할 때까지 계속됨으로써 전문학교 학생의 민족운동으로서는 초유의 최장기적 항쟁이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이현희, 1999, 「수원고농학생의 항일투쟁 연구」, 「한국민족운동사연구」21, 한국민족운동사학회, 31쪽>).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