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창극 사퇴, 박근혜 정부 '기회주의 약체 권력' 우려

    이 나라 진실은 땅에 떨어져,
    우파쪽 민심 離叛 커질 것


    조우석(미디어펜)    
      
     표정은 의연하고, 목소리 역시 당당했다.
    TV로 지켜본 그의 모습은 사퇴하는 사람의 분위기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인사청문회를 보이콧하는 등 그동안 직무유기를 해온 국회를 나무라는 대목도 적절했고,
    “진실보도야말로 저널리즘의 기본”이라는 말도 언론인 출신인 문창극 총리 후보자로선
    응당 했어야 했던 발언이다. 무슨 말을 했느냐 만큼 무슨 말을 하지 않았느냐도 중요한데,
    그는 KBS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다. 고심 끝에 내린 결정이었으리라.
     
    소송을 하겠다던 KBS의 이름을 물러나는 자리에서까지 반복하고 싶진 않았으리라.
    필자는 그걸 문창극이라는 사람의 됨됨이 혹은 인품이라고 본다.
    대신 그는 보다 큰 얘기, 즉 여론정치의 폐해를 언급하는 지혜로움을 우리에게 들려주길 잊지 않았다.
    “오도된 여론이 국가를 흔들 때 민주주의는 위기를 맞습니다.”
    그 대목이 충분히 함축적이었고, 오늘 사퇴 회견의 하이라이트로 기억할 만하다.

    오늘 부로 이 나라의 진실은 땅에 떨어졌다

    그동안 모진 마음고생을 해야 했던 인사의 목소리라서 설득력이 컸다.
    그래서 11일 회견에서 문창극은 그간 의혹에 대한 약간의 소명(昭明)과 함께
    남자다운 멋도 일부 남길 수 있었다. 여기까지다. 그에 대한 덕담은 이걸로 충분하다.

    중도사퇴한 그의 개인적 거취 결정도 중요하지만, 오늘 사퇴회견으로 이 나라의 진실은,
    이 사회의 정의는 땅에 내동댕이쳐지고 말았다. 이게 안타깝고 화가 난다.
    대체 어떻게 추스를까를 생각하면 정신이 다 아득하다.

    사실 문창극 문제는 정치인의 명예가 걸려있는 사안이 아니라
    너무도 분명한 진실과 거짓의 문제였다. 더 이상 명쾌할 수 없었다.
    선동방송 KBS의 거짓보도에 가짜 여론이 형성되고, 이걸 민심이라고 굳게 믿는 이들이 벌이는 마녀사냥의 광기(狂氣)에 나라가 흔들린 소동에 불과했다.
    반복해 말하지만, 공영방송 KBS의 거짓보도가 진정 놀라운 건 총리 임명이라는 중요한 헌법적 행위 앞에서 의도성을 가지고 장난을 걸어온 대담성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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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창극 총리후보자가 24일 끝내 중도하차했다. 박근혜정부가 이번 일을 계기로 거짓 여론과 선동에 굴복하면서 기회주의적 약체정권이 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보수우파의 민심이반도 커질 전망이다.


    문창극은 좌편향된 언론의 구조를 잘 몰랐다?

    때문에 문창극은 이에 맞서 진실을 담대하게 수호할 책무가 있었다.
    많은 이들이 그의 중도사퇴를 반대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못내 유감이지만, 오늘 사퇴회견에서 재확인한대로 그는 이번 사태의 전체 맥락과 급소(急所)를 채 파악치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문창극은 자신이 친일파 매국노로 몰린 것을 놓고 크게 억울해 했지만, 멀쩡한 사람을 몰아붙이고 인격살인을 서슴지 않는 좌편향된 언론의 구조와 풍토를
    너끈하게 읽어내고 있지 못하다는 느낌을 줬다.

    그래도 기대가 없지 않았는데, 뭘 몰랐던 문창극이 이번 일을 계기로 단련되고 각성되는 것을 보고 싶었다. 점잖은 유가(儒家)형의 선비에서 거짓선동을 벌이는 이 땅의 좌파와 싸우는 뚝심있는 전사(戰士)로 자라나길 내심 기대했다. 그래서 고질(痼疾) 중의 고질로 굳어진 문화계-언론부문에 대한 개혁의 시동을 거는 모습까지를 보고 싶었다. 이번 퇴임사에서 그는 “박근혜 대통령을 꼭 돕고 싶었다”고 했는데, 정 그랬다면 청문회를 통과한 뒤 사회안정의 기본 조건이자, 정국 운용의 관건인 이 사안에 대통령과 함께 올인을 했어야 옳았다.

    박근혜 대통령이 여론압박에 또 다시 휘둘리다니

    이 모든 기대가 사라진 지금의 상황은 6년 전 MBC PD수첩 광우병 사태보다 더 고약하다.
    많은 이들이 사건 초기부터 ‘광우병 시즌2’라고 걱정한 것도 그 때문인데,
    앞으로 좌파의 입맛과 이념에 안 맞으면 누구라도 ‘딱지’ 붙여 생매장당하는 풍토가 더욱 강화될 것이다. 가히 오웰리안 소사이어티가 이 땅에 완성되고, 침묵의 카르텔이 더욱 강력하게 형성될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진보 강박증이 우심한 게 한국사회인데, 앞으로가 더 걱정이다.

    좌파가 사실상 통치-지배하는 이런 전체주의적 분위기 속에서 자유주의자나 보수주의자(이 둘은 수렴되고 있으니 하나로 봐야 한다)들은 더욱 서리를 눈치를 보게 될 것이다.
    정부의 보호막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서리를 맞으면 안 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게 대통령이었다.
    안타깝게도 박근혜 대통령이 이번에 다시 된서리를 맞은 듯하다.
    그는 세월호 사태 때 가짜에 불과한 ‘슬픔과 분노의 여론’이 주는 압박을 극복치 못했는데,
    이번에도 여론몰이에 굴복했다.
     
    사실 지난 1주일여 청와대는 총리 후보자에 대한 지명철회보다는 중도사퇴하도록 유도하는 모양새였다. 설마 싶었고, 믿기지 않았다. 청와대가 뒤에 숨어 조종을 하는 대신에 스스로 전면에 나섰어야 옳았다. 이런 시간이 너무 길어지는 통에 대통령이 민심 혹은 여론에 너무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지적이 연달아 나왔다.
    인터넷 공간에서는 “간잽이로 알려진 안철수가 사돈 맺자고 하는 건 아니냐”는 우려 섞인 농담까지 우파인사들 사이에 등장했을 정도였다. 그런 그가 실기(失機)하지 않으려면 기회는 없지 않았다. 중앙아시아 3개국을 순방하고 돌아온 21일 저녁 서울공항이 그 무대였다. 이렇게 말하면 됐다.

    대통령이 전면에 나서서 문창극 구하기에 올인했어야

    “제가 없는 동안 벌어진 총리 후보자 논란을 잘 알고 있습니다. 순방 중 풀 동영상을 직접 검토했지만, 아무런 문제를 발견치 못했습니다. 그가 식민사관을 가진 분이 아니라 극일(克日) 의지를 가진 애국자라는 걸 새삼 믿게 됐습니다. 국민들께서 오해를 거둬주시면, 저는 임명동의안 및 인사청문요청서를 국회에 보내겠습니다. 국회는 현명한 결정을 내려주시길 바랍니다.”
     

    그건 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가 TV조선에서 했던 발언 수준(“풀 동영상을 보고 나는 감동 받았다”)에는 못 미치지만, 그래도 가짜 여론을 되돌리는 계기였을 것이다. 만일 그렇게 했더라면 책임있는 리더, 결단을 내리는 지도자의 모습을 조금은 회복했을 것이다. 사실 당시는 청문회를 정면돌파할 수 있는 분위기도 상당수 조성됐다. 보도본부장 이진숙이 이끄는 MBC가 풀 동영상을 금요일 저녁에 방영하면서 청문회 통과도 해볼만 하다는 여론이 조성됐다.

    지금은 우파 쪽에서 민심 이반이 일어날 수도 있는 위험상황

    그러고 4일 뒤 사퇴 회견은 최악의 결정이었다. 무엇보다 멀쩡한 사람 문창극이 자진사퇴를 하도록 조종하는 모습은 분명 정의롭지 못했고, 당당한 것고 거리가 멀었다. 자기 식구들 하나 제대로 지켜주지 못하고, 여론정치의 외압에 굴복해 참과 거짓 사이를 오락가락하다니…. 지금 일부 우파인사들은 분노와 격앙된 모습은 그 때문인데, 상상 그 이상이다. 콘크리트 지지층이라던 우파 쪽에서 민심 이반(離叛)이 일어날 수 있고, 일정하게 지지철회도 예상된다.

    실은 ‘비정상화의 정상화’라는 캐치프레이즈도 무색해졌다. 그래서 한국사회는 다시 위기다.
    그것도 구조적인 위기가 분명하다. 누구보다 당찬 결기를 보여줄 것으로 기대되던 박근혜 정부의 배신 아닌 배신 때문이다. 기회주의적 약체 정부로 평가되던 이명박 정부와 과연 무엇이 다른가 하는 지적이 지금 일고 있다.
     

    조우석 /미디어펜 객원논설위원,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