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양의 전쟁논리와 서울의 평화논리

    김정일의 선군서방에게 김무현은
    햇볕 양탄자를 굽이굽이 펼쳐서 서리서리 깔아주었다.

    최성재     
        
      
     “북한은 핵무기를 개발할 의사도 능력도 없습니다.”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하면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이제 한반도에 전쟁은 없습니다.” (2000, 김대중)

     
    2006년 10월 9일, 김정일은 천만 명을 1년간 배불리 먹일 달러로 1차 핵실험을 단행했다. 
     
    “남조선에서 미제침략군대를 몰아내고 미제의 식민지통치를 없애지 않고는, 남조선 인민들의 자유와 해방도 남조선사회의 진보도 있을 수 없으며, 우리 조국의 통일도 이룩될 수 없습니다. 이리하여 남조선혁명은 외래제국주의 침략세력을 반대하는 민족해방혁명이며 봉건세력을 반대하는 민주주의혁명입니다.” (1966, 김일성)

     
    “북과 남, 해외에 있는 각계각층 동포들은 조선민족의 한 성원으로서 자기가 처한 환경과 조건에 맞게 힘 있는 사람은 힘으로, 지식 있는 사람은 지식으로, 돈 있는 사람은 돈으로 조국통일 위업에 특색 있는 기여를 하여야 합니다.” (1992, 김일성)

     
    1990년대 초에 김씨왕조는 사실상 붕괴되었다. 60만 국군이 동해에서 서해까지 한 줄로 쭉 늘어서서 일제히 155mm 대포에 포탄 대신 진실의 삐라를 장진하여 적진 깊숙이 무제한 날리며 공포탄이나 조명탄만 한 일주일 내리 쏘았어도, 휴전선이 베를린 장벽보다 쉽게 무너졌을 것이다. 공산권의 물물교환 체제(barter system)가 무너지면서 석유가 끊어진 데에 이어 설상가상으로 조총련의 엔화도 끊기자, 김파라오만의 지상낙원에서는 1980년대 초반 에티오피아(40만 사망)보다 최소 3배 최대 8배나 되는 비참한 기아가 발생했던 것이다. 일반적인 생각과는 정반대로 유물론(唯物論)의 초석 위에 세워진 공산주의 공중누각은 자본주의보다 돈과 물질을 더 밝히고 그만큼 더 취약하다. 천륜도, 우정도, 정조도 미제국주의의 1달러, 2달러에 헌신짝처럼 버리게 만드는 체제가 공산체제다. 인간의 정신이나 육체보다 물질이나 돈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 유물론이므로, 그것은 필연적인 현상이다.

     
    김일성 2세는 김일성 1세로부터 정권은 일찌감치 찬탈하여 10여년간 진시황 부럽지 않게 살았지만, 절대권력 더하기, 세계최대 소비의 향락 더하기, 뼈와 살이 타는 리비도의 열락을 합친 호사를 누렸지만, 때마침 노태우의 북방정책까지 겹쳐, 사면한가(四面韓歌) 언제 제2의 차우셰스쿠가 될지 몰랐다.

     
    1989년 정주영의 방북에 한국의 386운동권은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들은 김일성과 김정일에게 감히 이에 대해 해명을 요구했다. 그걸 정리한 것이 김정일의 5.24 문헌이다(1991/5/24). 꼭두각시 김일성이 이에 따라 1992년 1월 1일 공식적으로 밝힌 게 바로 ‘특색 있는 기여’이다. 굳이 노동자농민이 아니더라도 김씨왕조만 잘 받들면, 그가 바로 혁명전사요 통일일꾼이라고, 김정일이 친히 유권해석해 준 것이다. ‘정주영은 민족자본, 이병철은 매판자본’이라는 공식은 이때부터 확고해져서 지금도 그대로 뭇사람의 입에 오르내린다. 김정일의 명쾌한 지침에 감동 먹은 386운동권은 김씨왕조의 파멸을 막기 위해, 밤낮 차고 다니던 통일의 붉은 완장을 쓰레기통에 집어넣고 평화(분단)의 나팔을 불어대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유민주의 약점을 최대한 악용하여 흡수(자유)통일 반대 논리를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한국의 겉똑똑이 귀얇이 지식인을 순식간에 의식화시켰다. 김대중은 김영삼에게 졌지만, 그의 머릿속에 햇볕정책 생체칩을 집어넣는 데 성공했다. 김대중은 바야흐로 호남의 희망에서 남북 모두의 희망으로 떠올랐다. 세계의 희망으로 떠올랐다.

     
    1998년 2월 홍두표가 쫓겨나고 방송의 문외한 박권상이 선군(先軍)정치의 군홧발 소리도 요란하게 KBS를 점령했다. 이때부터 국민은 눈부신 햇볕논리에, 아늑한 평화논리에 귀도 멀고 눈도 멀었다. 김정일은 변함없이 전쟁논리에 충실하여 국방위원회의 두목으로서 선군정치(공산군국주의)의 깃발을 조금도 숨기지 않고 휘날렸지만, 핵단추를 만지작거리며 한미동맹을 끊임없이 이간시켰지만, 여차하면 동해에서 서해에서 무력으로 협박했지만, 한국의 방송과 신문을 보면 우리도 한 방 되먹여야 된다는 지극히 당연한 상식이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면 전쟁이 일어난다나. 한국의 방송과 신문과 포털은 평양을 폭격하려고 했다는 전쟁광 미국을 원망하고 저주하는 한편, 한국의 과거 반공정책을 독재 겸 사대주의와 동일시하는 문화혁명에, 인민재판에 여념이 없었다. 김무현 정부는 10년간 ‘적군은 아군으로, 아군과 아군의 우군은 적군’으로 뒤바꾸는 따뜻한 평화논리로, ‘적군은 적군, 적군의 우군도 적군’이라는 김정일의 차가운 전쟁논리에 화답했다. 챔피언 폭군 김정일에게 윙크하며 희희낙락했다.

     
    문화권력만이 아니라 정치권력은 정치권력대로, 재계는 재계대로(대부분 울며 겨자 먹기로), 노조는 노조대로, 사법부는 사법부대로, 학계는 학계대로, 종교계는 종교계대로, 청년학생과 지식인은 또 그들대로, ‘특색 있는 기여’에, 평화논리 확산에, 김씨왕조 돕기에 몸과 마음과 돈을 기꺼이 바쳤다. 선하면 아니 받아줄세라, 노심초사하며!

     
    히틀러의 전쟁논리에 유럽이 평화논리로, 요나라와 금나라의 전쟁논리에 송나라가 평화논리로, 풍신수길의 전쟁논리에 선조가 평화논리로 화답한 것은 어리석음 내지 비겁함에 기인했지만, 그것은 결과적 매국행위였다. 피해는 사실상 예고하고 쳐들어오는 깡패를 앞두고 지도자에 의해 손이 묶인 신세였던 수백만 수천만 민초에게 고스란히 전가되었다.

     
    제2 6.25사변의 전초전이랄까, 2002년 6월 29일 대한민국의 해군은 국군통수권자에 의해 손이 묶여 선제공격 당할 때까지 꼼짝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압도적인 화력에도 불구하고 6명이나 개죽음했다. 교통사고로 죽은 두 여중생은 그 해 남북 모두에서 민족과 자주와 평화의 쌍둥이 샛별로 떠올랐지만, 전쟁논리에 평화논리로 맞서야 했던 윤영하 소령 등 여섯 순국열사는 불편한 진실로서, 매국노라도 되는 듯 역사의 뒤안길에 의도적으로 방치되었다. 천국에서는 지금도 애국충정의 후광으로 빛나는 그들의 머리가 지상에서는 일본인 수만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중에 빨간 넥타이 맨 한 70대 한국인 노인도 희희낙락 지켜보는 가운데, 눈부신 햇빛을 받으며, 참수리호가 질주하던 서해바다처럼 푸른 잔디밭에서 갖은 재주를 다 부리며 박수갈채를 받던 축구공 신세보다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