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경희의 죽음이 북한에서 갖는 의미

    팔팔하게 살아서 다시 나타난다 해도
    ‘김정은 체제 옹립’과 같은 과거의 환경이 사라진 북한에서
    김경희의 역할은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김성민 /자유북한방송  


  •  지난해 프랑스 파리에서 뇌종양 수술을 받았고 그 후유증으로 인해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었으며 몸 무계가 35㎏에 불과할 정도로 쇠약해 졌다던 북한의 김경희다.
     
    발이 굽어드는 의학적으로 생소한 질병에 걸렸으며 집안내력인 심근경색과 알코올 중독, 장성택 처형에 대한 스트레스로 치매마저 앓고 있다던 김경희.
     
    김 씨 왕조의 족보로 따지면 김일성에겐 외동딸이며 김정일에겐 손아래 누이, 김정은에겐 유일한 손위 혈육인 김경희가 죽으면 북한에선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사람들은 '백두혈통의 마지막 어른’인 김경희마저 사라진다면 김정은의 입지가 좁아질 수 있다는 데 주목하고 있다. 또 죽은 장성택의 부인이었다는 것도 세간의 화제다.
     
    하지만 이러한 김경희의 ‘위상’은 허상이며 “그가 당장 죽어도 북한에선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는 탈북자들의 주장이 나왔고 이를 정리해 보았다.
     
    북한주민들에게 비춰진 김경희의 존재
     
    과거 김경희는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던 투명 인간이었다고 탈북자들은 말한다.
     
    1994년 7월, 김일성이 죽고 나서야 그 존재가 드러나기 시작했지만 로열패밀리에 대한 뿌리 깊은 함구령은 오랫동안 김경희의 존재를 ‘비밀문서’처럼 분류시켰고 그 스스로도 전면에 나서는 것을 꺼리는 듯 했다는 것이다.
     
    물론 북한의 고위관료들과 주변 인물들은 김경희의 존재를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최고 지도자밖에 몰라야 한다’는 체제의 특성상 주어진 환경과 직분 내에서만 그를 대해왔다는 것이 고위 탈북자들의 증언이다.
     
    최근 입국한 북한군장교출신 황영철씨는 “김일성 사망 후, 김경희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됐다. ‘수령님께서 마음 쓰시는 군인생활과 인민생활향상을 위해 누구보다 열심인사람’이라는 것이 우선 강조됐고 그 뒤 당 경공업부장, 수령님의 자제분이라는 이야기가 뒤따랐다.”고 말했다.
     
    또 다른 탈북자 이철승씨는 “김경희에 대해 떠도는 소문이 많았다. 자강도와 신포시 등에서 주민들의 생활고를 직접 목격하고 김정일에게 보고하는 등 암행어사 역할을 했다는 이야기가 많았지만 그보다도 김정일의 가장 충성스런 보좌역을 했다는 것이 이야기의 핵심이었다.”고 회고했다.
     
    결국 김정일의 누이동생으로서가 아니라 김정일의 ‘혁명전사’로서 김경희가 강조되었다는 이야기다. 이는 또 다른 말로 김정일에게 충성한 ‘혁명전사’가 아니었다면 김경희의 존재는 아직도 드러나지 않았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수령님 외엔 살아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절대로 우상화 하지 않는다’는 노동당 10대원칙이 김경희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는 논리다.
     
    이에 대해 탈북자 김선일 씨는 “북한주민들이 김 씨 왕조의 이른바 가계 중 김경희를 그나마 알고 있었던 것은 김경희가 중앙당 경공업부장이라는 공식직함을 갖고 김정일을 보좌했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따라서 김경희는 현 북한의 독재자 김정은에게도 충성을 바쳐야만 존재를 알릴 수 있는 도구에 불과했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독재시스템에 도전장을 내 밀었던 사람이 장성택이고 김경희가 그 부인이었다는 것은 김경희에 대한 ‘북한식 생매장’까지를 예측케 했던 일”이었다고 외교관 출신 탈북자 한철웅 씨는 말했다.
     
    김경희의 행적
     
    여기서 북한의 김경희를 다시 한 번 살펴보면, 그는 김정은을 북한의 최고 권력자로 등장시키는 과정에서 가장 큰 보좌역을 한 인물이다. 한편 당중앙위원회 경공업부장,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제12기)이었던 김경희는 정권초기의 김정은에게 어머니나 다름없는 고모이며 조언자였다.
     
    김경희는 김일성과 김정숙 사이에서 난 맏이 김정일(1941년생), 둘째 김만일(1944년생)다음으로 김일성의 외동딸(1946년 5월 30일)이 되었다. 평양인민학교와 남산고급중학교를 거쳐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 정치경제학과에서 공부했으며, 구 쏘련의 모스크바대학에서 어학연수를 받았다.
     
    1972년 대학에서 함께 공부하던 장성택과 결혼에 골인했다. 1975년 중앙당 국제부1과 과장에 발탁 되였고 1976년 당 국제부 부부장, 1987년 당 경공업부 부장, 1988년 11월 당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 되었다. 1990년 최고인민회의 제9기 대의원을 거쳐 1992년 김일성훈장을 수여받았으며 1995년에는 노력영웅 칭호를 받았다.
     
    그러다가 2003년 9월 최고인민회의 제11기회의 후 종적을 감추었다. 당시 노동당 국제담당비서였던 김용순과의 내연관계로 인해 남편 장성택과 불화를 빚었고 프랑스에 유학중이던 딸 장금송이 부모의 결혼 반대로 자살(2006년)한 일 등이 겹치면서 알코올중독에 빠졌고 우울증치료를 받았다는 설이 있다.
     
    이후 2009년 김정일의 함주군 동북협동농장 현지지도를 수행하면서 다시 모습을 드러냈고 당중앙위원회 부장으로 복귀, 2010년 9월에는 인민군 대장 칭호를 받고 노동당정치국위원과 노동당중앙위 위원에 선출됐다.
     
    2012년 2월 15일 김정일의 70회 생일을 맞으며 김정은 체제결속의 일환으로 권력층에 수여된 ‘김정일 훈장’을 받았고 김정은의 군부대 시찰에도 모습을 드러냈다.
     
    김정은 옹립과정에서 정성택이 비주류였다면 김경희는 확실한 주류였다는 것이 내부소식통들의 전언이다.
     
    한때 평양시 당위원에서 일했던 한 고위소식통은 “김정은 위대성 선전과 관련된 모든 사업을 김경희가 진두지휘했고 김정은에게 보내는 평양시 당위원회의 일체 서류는 김경희를 통해 (김정은에게) 전달되었다”고 증언한바 있다.
     
    또한 소식통은 “김정은의 현지시찰 수행자명단도 김경희가 직접 체크했고 노동당 선전선동부와 간부사업에도 김경희가 개입하고 있다”고 했다. 더하여 “김경희는 절대로 장성택을 업고 김정은을 넘어서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점치기도 했다.
     
    이러한 김경희의 ‘역할’은 김정은의 고모이며 혈육이라는 배경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지만, 정철(형), 정남(이복형)등을 떠올리면 ‘역할’ 없는 혈육역시 존재가 없다는 북한현실의 또 다른 반증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김경희는 북한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대장의 계급을 달았고 노동당 제4차 당대표자회에서 당중앙위원회 비서로 발탁되었으며 김정은과의 정치적 신뢰관계를 돈독히 쌓아갔다.
     
    북한주민들은 김경희를 장성택의 부인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이러한 시점에서 이름 하여 장성택 사건이 터졌고 김정은은 고모부를 처형, 독재자로서의 입지를 굳건히 했다. 그러자 세간의 관심은 김정은의 고모이며 장성택의 부인인 김경희에게 모아졌고 그의 운명을 점치는 이야기들이 꼬리를 물었다.
     
    더구나 장성택 숙청이후 김경희가 공식 석상에 나타나지 않게 되자 이미 식물인간이 됐거나 죽었을 수도 있는 김경희를 향해 끝없는 의혹이 증폭되어왔다. 위에서 필자가 김경희는 이미 ‘식물인간이 됐거나 죽었을 수도 있다’고 한 이유는 한가지다.
     
    우선 북한주민들의 입장에서 봤을 때 ‘장성택은 혁명의 배신자’이지만 김경희는 ‘김정일-김정은에게 충실했던 혁명전사’이다. 이미 알려질 때부터 김경희는 장성택의 부인으로가 아니라 김정일에게 충실한 혁명전사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이런 김경희는 부디 장성택과 ‘이혼’시키지 않아도 북한주민들의 마음속에 ‘동지’로 남게 되며 그 까닭에 장성택처럼 화보첩에서 사진을 긁어내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다.
     
    한편 그러한 김경희를 주민들 앞에 내 세우는 것이야말로 북한내부는 물론 외부세계에도, 잔인했던 장성택처형의 후과를 그나마 해소시킬 수 있는 절대의 기회라는 것을 김정은이 모를리 없다.
     
    때문에 김경희 만큼은 휠체어에 태워서라도 ‘건재함’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 김정은의 애타는 심정일 것이다. 하지만 김정은의 고모이며 충직한 혁명전사인 김경희는...소생할 길이 없어 보인다.
     
    김경희와 장성택이 없는 북한
     
    위에서도 언급됐지만 김경희는 김정은 체제를 떠받치고 있는 이른바 ‘백두혈통’ 의 상징적인 인물로서 그마저 부재하게 된다면 향후 북한의 정치적 안전성에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 일각의 견해이다.
     
    또한 ‘2인자’행세를 하던 장성택이 처형됨으로 북한의 권력 지형이 크게 요동치고 있으며 그로 인해 북한의 미래가 불투명하다는 것이 최근 북한을 바라보는 일반적 시각인 것 같다.
     
    맞는 이야기지만, 북한주민들의 시각으로 바라볼 때는 현실적이지 않다.
    지금 북한주민들은 장성택으로 인해 잠시나마 수령의 권위가 훼손됐다고 믿고 있으며 사회주의혁명이 퇴보했다고 믿고 있다.
     
    그 때문에 주민들 스스로가 장성택 처형을 주장했고, 이러한 ‘민의를 반영한’ 조선노동당정치국확대회의 결정서가 채택됐으며 ‘국가안전보위부 특별군사재판’소에서 그에 대한 사형이 보란 듯이 결정됐다.
     
    장성택의 처형으로 오히려 김정은 체제가 더 공고화 됐고 ‘민의’가 결집되었다는 이야기다. 장성택이 사라짐으로 북한에는 김정은만의 유일독재체제가 완성됐고 지도자 1인에게만 집중되어온 독재시스템이 부활, 복원됐다.
     
    한편 김경희의 존재는 수면 아래로 사라져버렸다. ‘국가가 만들어주지 않으면 스타가 될 수 없는’ 북한사회의 특성을 감안할 때 ‘움직이지 못하는’ 김경희가 다시 나타나 ‘칭송’의 대상이 될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설사 팔팔하게 살아서 다시 나타난다 해도 ‘김정은 체제 옹립’과 같은 과거의 환경이 사라진 북한에서 김경희의 역할은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훗날, 북한 국사교과서 어느 구석에 ‘장군님께 충직했던 혁명전사’ 정도로 김경희의 이름이 올라있을지도 두고 봐야 할 노릇이지만...그보다는 장성택 처형으로 되살아난 북한의 독재시스템을 경계해야 하며 고모부마저 처형한 어린독재자의 ‘오판과 방종’을 한반도의 자유통일과 지혜롭게 연계시켜야 함을 강조하고 싶다.
     
    김성민

    위 글의 출처는 자유북한방송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