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장경제신문 연재 [인보길의 역사 올레길]<43>

    불쌍한 고종 황제, ‘앨리스 공주’에 매달리다

    110년전의 한반도: 파워 게임(2)

    ▶러일전쟁도 끝나고 추석을 앞둔 가을날 한성(漢城: 서울)에 귀한 손님이 나타났다.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의 딸 앨리스가 중국을 거쳐 요동반도 여순에서 배를 타고
    제물포(인천)에 상륙한 것은 9월19일(1905)이었다.

    너무나 뜻밖의 방문에 놀란 고종황제는 루즈벨트가 고마웠다.
     그토록 밀사를 보내 대한제국의 독립유지를 도와달라고 애원했건만
    들은 척도 않던 미국 대통령이 딸을 파견하다니
    드디어 “구원의 천사가 왔구나” 감격할 수 밖에 없었다. 
  • ▲ 1905년 9월 대한제국을 방문한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의 딸 21세 앨리스.
    ▲ 1905년 9월 대한제국을 방문한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의 딸 21세 앨리스.
"국빈 이상의 대접을 해야한다.“ 고종이 앨리스에게 베푼 환대는 민망할 지경이었다.
인천에서 황제 전용열차를 탄 앨리스가 서울에 들어서자
 거리에는 새옷을 차려입은 군중이 빽빽이 늘어서서 청홍(靑紅)색의 장명등을 흔들고
성조기를 흔들었다. 황실악단은 미국 국가를 연주했으며
황제용 가마를 탄 앨리스는 깨끗이 청소한 거리를 달려 미국 공사관에 여장을 풀었다.

고종은 당초 제물포에서부터 한국기병대 사열과 예포를 발사하는 국빈영접을 계획했으나
일본측의 저지로 포기해야했다.
당시 고종은 경운궁 화재(1904년, 일본소행 추정)로 황실도서관 중명전(重明殿))에
머물렀기 때문에 옆집 미국 공사관에선 창문으로 황제의 움직임까지 보일 정도였다. 

20일 정오 첫 오찬이 베풀어졌을 때
고종은 앨리스를 같은 식탁에 앉혔다.
고종이 외국인을 공식적으로 같은 식탁에 앉힌 것은 처음이었다.
나머지 일행은 작은 테이블에 한국 고관들과 앉았다.
황제의 특명으로 처음 양복을 입은 관리들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미국인들이 웃었다.
다음날 고종은 황실 여성들이 앨리스에게 극진한 식사대접을 하도록 했다.
앨리스는 연일 만찬과 오찬에 참석하면서 서울 주변 관광으로 시간을 보냈다.
명성황후 능도 찾아가 구경한 사진도 남아있다.
대한제국 황실이 할 수 있는 ‘최상의 대접’을 받은 앨리스는
열흘 뒤 9월29일 기차로 서울을 출발, 10월2일 부산에서 배를 타고 귀국길에 올랐다.
  • ▲ 고종황제의 가마를 탄 앨리스.(1905년 프랑스 신문에 보도된 그림)
    ▲ 고종황제의 가마를 탄 앨리스.(1905년 프랑스 신문에 보도된 그림)
  • ▶앨리스는 뒷날 한국 방문 소감을 이렇게 말했다.
    “아무튼 감명은 없었다. 좀 서글프고 애처로왔다. 황제와 식사하러 들어갈 때 그는 내 팔을 붙잡았다. 그는 여러벌의 아름답고 하늘하늘한 옷을 입었는데 호화롭기는커녕 연민의 분위기를 자아냈다. 떠나 올 때 환송회견장에서 황제와 황태자는 각각 자신의 사진을 주었다. 황제다운 존재감은 거의 없었고 둔감하고 슬퍼 보였다. 그 나라는 이미 일본의 손에 넘어가고 있었고, 궁을 드나드는 일본군 장교들은 대단히 민첩하고 유능해 보였다.”

    ▶앨리스의 수행원 윌러드 스트레이트도 기록을 남겼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일본의 방해공작이었다.
    앨리스 양이 왕족이 아니라면서 황실 차량을 이용하지 못하게 했으며 사사건건 끼어들어
     비열하게 행동했다. 일본인들은 앨리스 양의 방한이 한국인들을 고무시킬까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중략)....
    황실의 오찬은 황제가 통제하고 있었지만, 그 황제는 일본인이 통제하고 있었다.
    고종은 필사적으로 미국의 도움을 원했다.
     상원의원 뉴랜즈를 옆으로 불러 ‘미국 대통령에게 조정역할을 하도록 요청해달라’고
    거듭거듭 부탁했다. 뉴랜즈 의원은 ‘공식창구를 통해 적법하게 요청하라’며
    비웃는 투로 대답했다. 실로 한국인들은 지푸라기라도 잡으려 했으며
    앨리스 양과 우리가 생명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붙잡고 매달렸다....“
  • ▲ 1905년 7월 일본에서 총리 가쓰라와 비밀협약을 맺은 태크트(왼쪽)와 루즈벨트의 딸 앨리스.(일본방문 사진). "한국은 일본이 가져도 좋다"고 밀약을 맺은 두달 후 9월 앨리는 서울에 와서 고종을 만난다.
    ▲ 1905년 7월 일본에서 총리 가쓰라와 비밀협약을 맺은 태크트(왼쪽)와 루즈벨트의 딸 앨리스.(일본방문 사진). "한국은 일본이 가져도 좋다"고 밀약을 맺은 두달 후 9월 앨리는 서울에 와서 고종을 만난다.
  • ▶앨리스는 왜 대한제국을 찾아왔던가.
    그녀는 육군장관 태프트와 함께 ‘만추리아호’를 타고 7월 하순 일본에 도착했을 때
    역시 여왕 같은 환대를 받았다.
     그때 태프트는 7월27일 은밀하게 일본 가쓰라 총리와 ‘한국-필리핀 바터밀약’을 맺었다.

    며칠 후 태프트는 식민지 필리핀으로 갔고 앨리스가 중국 방문후 서울로 간 9월19일은
    이미 아버지 루즈벨트가 일본에게 ‘한국을 가져도 좋다’고 약속한지 두 달 가까이 지난 후다.

    그러면 루즈벨트는 ‘일본식민지’로 낙착된 한국 땅에 왜 자기 딸을 보냈는가.
    일본과의 땅따먹기 비밀거래를 숨기려는 연막작전이었다.
    미국 의회의 승인도 없이 국제밀약을 완료한 그는
    자기 딸을 전면에 내세워 한바탕 쇼를 하듯이 비밀보호막으로 이용한 것이었다.

    당시 앨리스는 미국에서 ‘앨리스 공주’(Princess Alice)로 불리며
     매스컴의 인기를 독차지할 때였다. 재클린 케네디보다 더 아름다운 21세의 대통령 딸은
     ‘드레스를 입은 야성동물’이란 별명처럼 ‘튀는 행동’으로 유명하여
    보도경쟁의 아이컨이 되어있었다.
    미국민과 국제사회의 시선을 ‘국제음모’로부터 앨리스에게로 돌려놓은
     ‘홍보의 귀신’ 루즈벨트의 시나리오에서
     ‘희생물 한국’의 황제는 피에로 역을 맡은 셈이다.

    불쌍한 고종황제!
    나라가 이미 망한 것도 모른채 내탕금만 축내고,
    두 달 뒤 11월엔 을사늑약에 도장을 찍고 만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