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장 씨 "강종헌, 김일성이 베푼 시아누크 환영축하 공연장 갔었다고 했다"시아누크 방북 시기와 강종헌 밀입북 시기 겹쳐
  •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었음에도 선관위 전과기록이 증발된 강종헌(통합진보당 비례대표 후보)은 밀입북 혐의를 부인해왔으나, 최근 이를 뒤집는 증언이 나왔다.

  • ▲ 김현장 씨.
    ▲ 김현장 씨.

    1982년 美 문화원 방화사건을 주도했던 김현장 씨는, 2012년 5월14일 <조갑제닷컴>에 기고한 ‘김현장이 강종헌에게 보내는 편지(이하 편지)’에서 강종헌에게 들은 전언을 폭로했다.

    강종헌은 1975년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에 연루돼 13년을 복역한 인물이다. 그는 1988년 출소 후, 일본으로 추방돼 북한정권을 추종해온 반국가단체 한통련(在日한국민주통일연합)과 범민련(조국통일범민족연합) 해외본부 간부 등을 지냈다.

    당시 사건 판결문은 “피고인 강종헌은 1969년 고교 재학 시부터 1971년 2월 모국 유학 시까지 재일지도원 김영일, 기무라, 하시모도, 다카하시 등에게 주체사상 등 교양을 받고 포섭되었다”고 기술했다.

    또 1973년 8월, 북괴 공작선에 승선해 한 차례 북한을 방문, 공작금을 수수하고 김일성 회갑 축하선물로 노래를 작사·작곡하고 맹세문을 작성하여 하시모도에게 제공, 고무ㆍ찬양한 혐의도 있었다.

    강종헌은 2012년 1월1일자<민족21>과의 인터뷰에서 1973년 밀입북한 혐의를 부인했다. 그는 “제가 방북했다고 되어 있는데 저를 거물급 간첩으로 만들기 위해 방북과 노동당에 입당하는 내용 등이 필요했던 것 같다”고 주장했다.

    그는 ‘1심 재판 때는 방북사실을 인정했었다’는 질문에 “수사관들이 공작선을 타는 지점, 접선 방법, 북으로 들어가는 항로와 항구, 평양 교외 아지트의 위치와 거기서의 생활내용, 교육받은 내용과 구경한 장소를 모두 구체적으로 상세히 가르쳐줬다”고도 했다.

    그러나 김현장 씨는 편지에서 강종헌에게 들었다는 밀입북 당시의 일화를 다음과 같이 전했다.

    “너(注: 강종헌)는 오사카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가장 우수한 고등학교(이름은 잊었지만)를 졸업하였다. 공작선을 타고 평양에 가서 초대소에서 지도원과 함께 생활하였다. 그때 마침 캄보디아 시아누크가 평양에 왔고 김일성 주석이 베푸는 특별공연이 있었는데, 너의 지도원이 어디 좀 다녀올 데가 있다고 하여 따라 나섰는데 바로 그 시아누크 환영축하 공연장이었으며, 안내한 지도원이 말하기를 ‘주석님이 와 계시니 오늘은 멀리서나마 보는 것으로 하고 다음 기회에 직접 만날 수 있도록 하겠다’고 하여 약 20m 떨어진 좌석으로 안내되어 김 주석을 보고 왔다고 했지.”

    김 씨는 또 강종헌이 재판정에서 보여준 행동도 구체적으로 증언했다.

    “네가 체포되어 재판을 받을 때, 비겁한 모습을 보이느니 차라리 사실대로 조선노동당의 당원임을 떳떳하게 밝히기로 하였고 재판 과정에서 당당하게 혁명가답게, 평양에서 밀봉교육을 받고 유학생의 신분으로 남한에 들어와서 활동한 모든 것을 털어 놓았다고 했지.”

    이는 강종헌과 함께 연루됐던, 서 모 씨(서광태로 추정)의 증언을 토대로 밝힌 것이다. 김 씨는 “종헌이가 재판 과정에서 간첩임을 인정하자 서 모 군이 ‘종헌아, 왜 그러느냐 정신차려라’ 하고 소리 지르며 흥분을 하여 일대 소동이 일어났다는 이야기를 서 모 군의 가족으로부터 내가 직접 들었다”고 밝혔다.

  • ▲ 2003년 6월 15일 조총련 후쿠오카 지부에서 강연하는 강종현.
    ▲ 2003년 6월 15일 조총련 후쿠오카 지부에서 강연하는 강종현.

    노무현 정권 때 발족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위)’가 2010년 작성한 ‘재일동포 강종헌에 대한 간첩조작 의혹 사건’에는 강종헌 밀입북과 관련된 판결문 일부와 진실위의 조사개요가 수록돼 있다.

    강종헌은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이 조작이라며 2009년 진실위가 재심 권고 판정을 내렸다. 강종헌은 2011년 서울고등법원에 재심을 청구해 현재 심리가 진행 중이다.

    “가혹행위는 인정되나 범죄 자체가 조작됐다고 단정할 수 없어”

    진실위 자료에는, 사건 판결문에 기초해 강종헌이 1973년 8월3일 일본 니가타 카시와자키에서 북 공작선에 승선, 밀입북했다고 적시돼 있다.

    “‘1973년 8월3일 니가타 카시와자키 해수욕장 부근에서 북괴공작선 승선하여, 8월6일 청진항에 도착’하였고, ‘사상교양, 노동당입당, 당증(번호) 7217번을 교부 받고, 김중린과 회합, 남한정세를 보고하고, 공작임무, 공작금 500,000엔을 받고 8월23일 일본 가시와자키 해안 도착’하였다는 것이다. 또, 강종헌은 1973년 11월26일 서광태에게 방북사실과 노동당 입당사실을 말하고, 2. 9. 및 2. 10.에 걸쳐 서광태를 통해 전성환, 황혜헌, 송군식, 장무환 등에게 강종헌이 (북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왔다’고 말하게 하여 정체를 계속 위장하였다는 것이다.”

    강종헌은 1심에서 이 같은 혐의를 인정, 사형을 선고 받았었다. 그러나 1976년 11월1일,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항소심 공판에서 “계속 가해지는 고문과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면하기 위해서는 수사기관에서 하라는 대로 하고 쓰라는 대로 쓰는 도리밖에 없었다”며 기존의 주장을 뒤집었다.

    그는 1977년과 1980년에도 재심 청구했으나 모두 기각되었다. 강종헌은 이때 일본 북해도의 한 민박집에서의 숙박기록, 홋카이도 여행 중 모친에게 보낸 편지지와 봉투, 일본에서 가져온 선물을 반박자료로 제시했다.

    진실위는 이 자료를 바탕으로 재조사했다. 그 결과 강종헌이 일본 체류 중 묵었다는 민박집의 숙박기록에 나가지마[永島, 注: 강종헌의 일본식 이름(永島宗憲)의 성으로 추정]로만 기재돼, 나가지마와 강종헌이 동일인인지 여부를 알 수 없고 모친에게 보낸 편지는 타인이 부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들어 “수사 기관에서 방북한 것으로 범죄사실을 조작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했다.

    진실위는 그러나 “수사기록, 관련 기록, 관련자 진술을 종합해보면, 강종헌이 장기간 보안사에서 불법 구금되어 수사받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고, 보안사 수사관들에게 상당한 강도의 가혹행위를 당하였음이 인정된다”며 수사 과정에서의 일부 문제점은 인정했다.

    1973년 시아누크 방북과 강종헌 밀입북 시기 동일

    <조갑제닷컴>은 김현장 씨의 주장대로, 강종헌의 밀입북 시기에 시아누크도 방북했는지 여부를 확인해 보았다.

    1973년 7월21일자 <경향신문>은 “시아누크가 20일 3주일간의 북한 방문을 위해 열차편으로 평양을 향해 떠났다”고 보도했다.

  • ▲ 1973년 7월 21일자 경향신문.
    ▲ 1973년 7월 21일자 경향신문.

    캄보디아 국가원수였던 시아누크는 1970년 론 놀의 쿠데타에 의해 실각, 망명을 감행했다. 이때 중국의 주은래와 북한의 김일성은 시아누크에게 망명지를 제공했다.

    특히 북한과 캄보디아는 1964년 수교를 맺은 이래, 현재까지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시아누크는 김일성 생존 시 자주 북한을 방문, 김일성과 회담을 가지기도 했다.

  • ▲ 1973년 8월13일자 동아일보.
    ▲ 1973년 8월13일자 동아일보.

    같은 해 8월13일자 '동아일보'에는 “시아누크 공은 11일 그의 부인과 함께 평양 근방의 트랙터 공장을 시찰했다”고 전했다. 이를 종합해보면, 적어도 시아누크가 8월 중순까지 평양에 체류했음을 보여준다. 즉, 시아누크의 방북 시기와 강종헌의 밀입북 시기가 서로 겹치는 것이다.

    김현창 씨는 지난 16일 <조갑제닷컴>과의 전화통화에서 “나는 시아누크가 북한에 갔었는지도 몰랐다. 그것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었고, 강종헌의 전언만으로 알게 된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