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 해양문명권에 대한 적응능력을 갖추려하다

    출옥과 함께 미국 유학길에 오르다

       1904년 2월에 터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해감에 따라 한성감옥의 정치범에 대한 석방이 시작되었다. 그에 따라 감방 동료들이 하나씩 자유를 찾고 있었다.
       이승만을 아끼던 민영환과 한규설, 그리고 미국 선교사들은 그의 석방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그러나 그는 좀처럼 석방자 명단에 끼지 못했다. 그러자 이승만은 영영 감옥을 나오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초조해졌다.
       거의 막바지인 1904년 8월 9일에 가서야 석방 허가가 났다.
       간수가 감방 문을 열고 그에게 나오라고 손짓했을 때, 이승만과 그를 도와주려 했던 감옥서장 김영선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 순간 감옥 뒤뜰에서 처형당할 때 만세를 부르며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하던 애국자 장호익이 떠올랐다. 장호익은 일본에서 군사교육을 받은 개화파 장교로서 박영효의 쿠데타 실패로 잡혀 들어와 처형을 당했던 것이다. 
       감옥 밖으로 나온 직후, 이승만은 전덕기 목사가 이끌고 있던 남대문 안쪽의 상동교회(지금의 새로나백화점 자리)에서 청년학교 교장을 맡았다. 
      

  • ▲ ⓒ이승만이 1904년 11월 미국으로 떠나기에 앞서 아버지 경선공을 모시고 찍은 가족 기념사진. 오른쪽 끝이 이 박사의 첫 부인 박씨이고 그 다음이 이승만이다. 이승만 옆의 어린이가 아들 봉수, 그 옆에 경선공이 앉아있다. 왼쪽 맨 끝의 여인은 이 박사의 맏누님이며 봉수의 뒤에 서 있는 남아는 그녀의 아들(이 박사의 생질) 우종구이다.
    ▲ ⓒ이승만이 1904년 11월 미국으로 떠나기에 앞서 아버지 경선공을 모시고 찍은 가족 기념사진. 오른쪽 끝이 이 박사의 첫 부인 박씨이고 그 다음이 이승만이다. 이승만 옆의 어린이가 아들 봉수, 그 옆에 경선공이 앉아있다. 왼쪽 맨 끝의 여인은 이 박사의 맏누님이며 봉수의 뒤에 서 있는 남아는 그녀의 아들(이 박사의 생질) 우종구이다.

    그때는 이른바 제1차한일협약으로 나라가 사실상 일본의 지배로 넘어간 상태였다. 일본은 군사적 목적에서 한반도의 어떤 시설도 이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자 고종은 마지막으로 독립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미국에게 도움을 요청해보려고 했다.
       그러나 그때쯤해서 미국도 기대할 만한 나라가 못되었다. 왜냐하면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과 국무부 관리들은 서양화를 추진해 가던 일본에 대해 호감을 가졌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서양인들이 그러했다.   
       그러므로 대한제국에 대해 호감을 가진 외국인들은 소수의 미국인 선교사들뿐이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제중원을 설립한 의료선교사로서 주한 미국 공사가 된 호러스 알렌이었다. 그는 미국 정부의 훈령과는 달리 대한제국의 편을 들었다가 미 국무부로부터 공사 자리에서 쫓겨나는 수모를 당했다.
       그런데도 개화파 정치인인 민영환과 한규설은 유학을 떠나는 이승만을 통해 미국에 도움을 요청해볼 생각이었다. 그것은 1882년에 체결된 한미수호통상조약의 거중조정(居中調整) 조항에 따라 대한제국의 독립 유지를 위해 미국이 개입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 나온 조치였다. 
  • ▲ 이승만을 미국에 밀사로 파견한 충정공 민영환. 이승만은 이 사진을 그의 처녀작 [독립졍신](초판본, 1910)에 실었다.
    ▲ 이승만을 미국에 밀사로 파견한 충정공 민영환. 이승만은 이 사진을 그의 처녀작 [독립졍신](초판본, 1910)에 실었다.

    대한제국의 밀사 임무를 띠고 미국으로

       이승만이 미국 유학으로 진로를 굳힌 것은 미국 선교사들의 강력한 권유 때문이었다.
       또한 아버지의 희망도 있었다.  아들이 과격한 행동을 하다가 또다시 감옥에 가거나 죽는 불행을 당할까 걱정했기 때문이다. 
       떠나기 전에 이승만은 민영환의 주선으로 고종 황제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어느 날 저녁 그가 집에 돌아 왔을 때 고종이 보낸 궁녀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승만은 고종의 면담 요청을 거절했다. 자신을 오랫동안 감옥살이를 시키고 나라를 망친 무능한 군주와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1904년 11월 4일, 29세의 이승만은 신분을 숨긴 채 인천항을 떠났다. 정부의 밀사 자격이었기 때문에 워싱턴의 대한제국 주미공사관에 보내는 정부 훈령을 가방 밑에 숨겼다.
      동행자로 이중혁이란 청년이 있었다. 그는 이승만이 감옥에 있을 때 많은 도움을 주었던 한성감옥서 부소장 이중진의 동생이었다.
       두 사람을 태운 배는 목포와 부산을 거처 일본으로 향했다. 배가 항구에 머물 때마다 이승만은 일본 관리들에게 잡힐까 마음  졸였다. 그의 짐에는 조선정부의 밀서가 있었기 때문이다.
       돈도 없었다. 가진 것이라고는 일본까지 가는 배표와 선교사들의 소개장뿐이었다. 
       두 사람은 일본 고베 항에 도착해서 한국 교민들의 환영을 받았다. 미국인 선교사 로건은 이승만에게 여비를 보태 주기 위해 그가 운영하는 교회에서 특별헌금을 했다.
       그 돈으로 두 사람은 하와이로 가는 조선인 노무자들과 3등 선실에 탔다.

  • ▲ 미국에 도착한 이승만이 워싱턴 D.C.로 향하여 여행하던 중 1904년 12월 말 시카고에 들려 그곳 한인유지들과 함께 찍은 기념사진. 오른쪽이 이승만.
    ▲ 미국에 도착한 이승만이 워싱턴 D.C.로 향하여 여행하던 중 1904년 12월 말 시카고에 들려 그곳 한인유지들과 함께 찍은 기념사진. 오른쪽이 이승만.

    하와이, 캘리포니아를 거처 워싱턴으로

       1904년 11월 29일 아침 배는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부두에는 윤병구(尹炳求) 목사와 하와이 감리교 선교부의 존 와드먼 박사가 환영을 나왔다.
       그들은 그날 저녁 호놀룰루에서 20km 떨어진 에바의 한인 농장에서 집회를 가졌다. 200명 이상의 한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승만은 밤 11시까지 길게 연설했다. 집회 마지막에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랭사인’ 멜로디에 가사를 붙인 애국가를 부르고 헤어졌다.

  • ▲ 이승만과 함께 미국 대통령 데오도어 루즈벨트를 만났던 하와이 교민대표 윤병구 목사.
    ▲ 이승만과 함께 미국 대통령 데오도어 루즈벨트를 만났던 하와이 교민대표 윤병구 목사.

       그리고 나서 이승만은 윤병구 목사집으로 갔다. 밤새도록 두 사람은 나라의 독립 보존을 위한 방법을 의논했다.
       일단은  앞으로 열리게 될 포츠머스 강화회의에 조선의 독립 보존  의지를 전달하도록 결정했다.  그 회의는 막 끝난 러-일전쟁을  마무리하기 위해 뉴햄프셔 주에서 열리도록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 준비를 위해 이승만이 먼저 워싱턴으로 떠나고, 윤병구는 경비를 마련하는 대로 뒤따르기로 했다.
       이승만과 이중혁은 한인들이 모아준 30달러로 3등 배표를 샀다. 그리고는 1904년 12월 6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거기서 두 사람은 두 아들을 한국에 선교사로 보내고 있는 휘시 부부를 찾아 갔다. 휘시 부부는 두 사람을 돕기 위해 샌안셀모 신학대학 학장에게 데리고 갔다. 그리고는 3년간 전액 장학금을 받도록 주선해 주었다. 졸업 후 한국에 선교사로 돌아간다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그들의 호의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대한제국 정부의 밀서를 미국 정부에 전달해야 할 임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두 사람은 남쪽의 로스앤젤레스로 갔다. 거기에는 서던캘리포니아 대학에 유학하고 있던 옥중 동지 신흥우가 있었다.
       그러나 여비가 모자라 이승만만 동부로 떠나고, 이중혁은 그대로 남았다.

     <이주영 /뉴데일리 이승만연구소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