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태준의 6·25 
     
      개전 초 연대 소속 중대장 12명 중 10명 전사,
    의정부-미아리-창동 전투, 낙동강 방어전, 화천전투 등 치러

    배진영   
     
     
    박태준 전 포철회장이 돌아가셨다. 어느 신문에서나 '박태준 전 총리'가 아니라 '전 포철회장'으로 쓰고 있는 게 눈에 띈다. '박태준=포철'이었다.
    작년에 그분을 인터뷰한 일이 있었다. 포철에 대해서도, 정치에 대해서도 아니라, 박태준의 6·25에 대해 듣기 위해서였다. 모두들 포철회장, 총리로 기억하고 있지만, 그 이전에 그는 군인이었다.

    6·25 당일 , 포천 주둔 7사단 중대장이었던 그는 서울에 나와 있었다고 했다.
    '최전방 중대장인 내가 자리를 비운 것만 봐도 6·25 북침은 말이 안 된다'고 했다. 그는 개전 초기 의정부전투, 미아리전투, 창동 전투 등을 치렀다. 연대 소속 중대장 12명 중 10명이 전사했다고 한다.

    박 전 회장의 회고담은 화려하지는 않았다. 전쟁 중에 주로 참모 보직을 받아서였을 것이다.
    그는 술 얘기를 많이 했다. 경주에서는 시가지를 수색하다가 경주법주 술통을 발견하고 원없이 마셨다고 했고, 흥남까지 진격했을 때에는 화학공장에서 발견한 카바이드술 드럼통에 고무 호스를 연결해서 줄기차게 마셔댔다고 했다. 흥남철수 와중에는 덜컥 급성맹장염에 걸려 철수선 안에서 수술을 받았다는 얘기, 6·25 종전 직전 화천전투를 치른 얘기도 했다.

     낙동강 방어전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을 때, 박 회장은 김종갑 참모장에게 '우리가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때 김종갑 참모장은 '야, 이 새끼야! 못 이기면 물에 빠져 죽어야지!'라고 일갈했다고 한다. 후일 그가 포철을 건설하면서 '실패하면 바다에 빠져 죽어야 한다'고 말하곤 했던 것은 어쩌면 전쟁 체험의 연장인 지도 모른다.

     대한민국은 그렇게 지킨 나라다. 그리고 그 전쟁에서 살아남은 이들이 전쟁 때 죽은 이들에게 빚을 갚는 심정으로 피땀 흘려 일으켜 세운 나라다.
    이제 와서 이 나라를 못 지키면 우리는 모두 물에 빠져 죽어야 한다. 박태준 회장의 명복을 빈다.
    월간조선 2011년 6월호 별책부록에 실린 박태준 전 회장의 6-25체험담을 옮겨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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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천, 의정부, 미아리전투 치러
    1군단 작전참모로 낙동강방어전, 청진까지 북진했다가 흥남에서 철수
    휴전 직전 부연대장으로 화천전투 치러
     

    朴泰俊 전 국무총리
    ⊙ 1927년 출생. 日와세다대 중퇴, 육사(6기) 졸업, 육군대학 졸업.
    ⊙ 예비역 육군소장, 포항제철 회장, 국회의원, 민주정의당 대표, 민주자유당 최고위원,
    자유민주연합 총재, 국무총리 역임.

    1949년 12월 대위로 진급한 나는 경기도 포천에 있는 7사단 1연대 2대대 5중대장으로 부임했다. 소총과 경포(輕砲)로 무장한 부대에는 장제스(蔣介石) 군대에서 중대장을 지냈다는, 사냥을 좋아하는 대대장이 있었다. 덕분에 나는 가끔 꿩 샤브샤브에 이동막걸리를 거나하게 마시곤 했다.

    가끔 북한 인민군과 교전(交戰)이 벌어졌다. 적 1개 중대 병력이 들어오는 것을 양측에서 공격해 적군 다수를 사살하고 무기를 노획한 적도 있었다. 노획한 무기는 육군본부로 보내져 전시됐다. 이런 무력충돌을 겪으면서 ‘이것이 적의 대규모 공격 징후가 아니냐’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1950년 1월 ‘한국은 미국의 방어선에서 제외된다’는 내용을 담은 애치슨 선언이 나왔다. 동료 장교들과 막걸리를 마시며 ‘애치슨 발언이 영 심상치 않다’며 걱정했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임무에 충실하자’는 다짐뿐이었다.

    6월 23일, 국방부는 4월 21일 이후 계속되어 온 비상경계명령을 그날 24시부로 해제했다. 1연대 11중대장으로 있던 나는 두어 달 만에 서울 시내로 외박을 나왔다. 서울 용산 청파동에 있는 와세다대 선배 집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나누었다. 창밖에는 오랜 가뭄 끝에 단비가 내리고 있었다.

    6월 25일 아침 일찍 눈을 뜬 나는 왠지 가슴이 먹먹했다. 몇 군데 전화를 걸어보았다.

    38선에서 전쟁이 터졌다는 얘기였다. 시계를 보니, 아침 7시. 라디오를 켜 보았지만, 라디오에서는 낙관적인 얘기만 하고 있었다.

    서둘러 달려나온 나는 무조건 북쪽으로 가는 차를 잡아탔다. 서울을 벗어난 지점에서 북으로 향하는 군용트럭을 만났다. 이 차 저 차 갈아타면서 간신히 부대에 도착했지만,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개전(開戰) 초기 중대장이 자리를 비우고 있었으니 싸움이 될 리 없었다.

    연대 중대장 12명 중 10명이 전사

    의정부방어전에 투입됐지만, 소련제 T34전차(戰車)를 앞세우고 쳐내려 오는 인민군을 막기는 역부족이었다. 60㎜박격포나 2.36인치 바주카포로는 적 전차를 부술 수 없었다. 이후 미아리전투, 창동전투 때도 마찬가지였다. 국군은 전차 소리만 들리면 전의(戰意)를 상실했다.

    중대에는 일본군 출신의 고참 하사관들이 있었다. 과거 중국 대륙에서 싸운 적이 있는 그들은 초급장교들보다 훨씬 전투에 대해 잘 알았고, 용감했다. 그들은 “탱크는 옆구리가 약점”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측면에서 전차 위로 올라가 해치 안으로 수류탄을 던져 넣었다. 이런 식으로 전차 두 대를 잡았다.

    이런 용전(勇戰)에도 불구하고 전(全) 전선이 무너지고 있었다. 우리 중대는 6월 27일 저녁 무렵 서울 미아리 서라벌중학교에 자리 잡았다. 1연대와 9연대 잔여병력으로 창동에서 미아리에 이르는 방어선이 구축됐지만, 무기도, 병력도 부족했다.

    빗줄기는 점점 굵어졌다. 어느새 참호는 웅덩이가 되어 있었다. 절친한 육사 동기생 김동혁 대위가 함께 있었다. 이미 연대장과 대대장, 그리고 연대 소속 중대장 12명 가운데 10명이 전사(戰死)한 뒤였다. 우리 두 사람이 마지막 남은 중대장이었다.

    김 대위와 “이제 어떻게 되는 거냐?”라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여기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 서울을 포기한다는 것은 그때까지만 해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술 생각이 간절했다. 한 모금 마시고 나면 배고픔과 한기(寒氣)를 물리칠 수 있을 것 같았다.

    수유리 쪽에서 총성과 포성이 들려왔다. 공병학교 간부후보생으로 구성된 특공대가 수유리 쪽으로 진출하는 적 전차부대를 격퇴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다음 날 새벽 1시경, 캐터필러 소리가 들려왔다. 중대원들이 적 전차를 향해 사격을 하고 있을 때, 누군가 나를 불렀다. 육군본부에서 나온 연락장교 김 대위라고 했다. 육군본부의 명령을 전달할 장교를 찾고 있던 그는 우리를 보고 “중대장이라도 이 명령을 접수하라”고 말했다. “잔여병력은 한강을 도하(渡河)해 시흥에 집결하라”는 명령이었다. 김동혁 대위와 “한강을 건너도 되는 모양이다”라는 얘기를 나누었다.

    광나루에서 한강 건너
     


  • 무공훈장을 받는 박태준.

    나와 김 대위는 150여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왕십리를 거쳐 광나루로 향했다. 광나루는 이른 아침부터 피란민으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한강 인도교는 이미 폭파된 다음이었다. 피란민과 국군을 서울에 두고 다리부터 폭파한 정부에 대해 분노가 치밀었다.

    나는 하늘을 향해 카빈총 두 발을 쐈다. 피란민들이 잠잠해졌다. 나는 그들에게 “지금부터 내가 도하를 지휘하겠다”고 소리쳤다.

    “전쟁에서는 군인이 최우선입니다. 지금부터 우리 병사들이 먼저 강을 건너갑니다. 강을 건너간 병사들은 건너편에서 엄호를 맡게 될 것입니다. 시민 여러분은 우리의 지시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건너가시기 바랍니다. 적이 나타나면 그때는 남아 있는 우리 병사가 먼저 건너갑니다. 모두 내 지시에 따라주기 바랍니다.”

    쪽배 다섯 척이 보였다. 세 척으로는 군인, 두 척으로는 민간인을 건너게 했다. 1시간쯤 지났을까. 시내 쪽을 감시하던 하사관 하나가 달려왔다. 적 전차가 나타났다는 것이었다. 김동혁 대위에게 “이제 우리도 건너자”고 했다.

    강을 건넜다. 지금은 아파트촌으로 가득한 잠실은 당시에는 너른 밭이었다. 덜 자란 오이를 따서 배를 채우며 시흥에 있던 육군보병학교로 이동했다. 시흥에 이르러 오래간만에 밥을 먹었다.

    시흥에서는 중국군 출신 김홍일(金弘壹) 중장이 패잔병력을 재(再)편성해 한강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김홍일 장군에게 인사를 드렸더니, “지시를 줄 테니 기다리라”고 하고 사라졌다. 명령을 기다렸지만, 명령은 없었다. 한참 후에 우리는 노량진으로 이동해 한강을 방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노량진에서 우리는 예비대였다.

    전투다운 전투도 치러보지 못하고 다시 철수가 시작됐다. 때때로 호주공군기가 우리 행렬을 공격했다. 군의관 등이 목숨을 잃었다.

    7월 5일경, 충청도 북단 성환 인근에서 미군 흑인 병사들과 처음으로 마주쳤다. 미군이 참전했다는 것을 알게 된 기쁨도 잠시, 후퇴는 계속됐다.

    추풍령 인근 황간에서 인민군과 소규모 교전(交戰)이 있었다. 후퇴하다가 우연히 모인 소규모 국군 부대들이 남한강을 사이에 두고 인민군과 싸운 것이다. 제대로 된 지휘관도 없이 벌인 조우전(遭遇戰)이었지만, 그래도 제법 질서 있게 싸운 전투였다.

    1군단 작전참모

    경북 경주에서는 소개(疏開)된 시가지를 수색하다가 술통을 발견했다. 누군가 “그게 유명한 경주법주(法酒)”라고 했다. 몇 잔을 거푸 마셨다. 잊지 못할 술맛이었다. 여기서 나는 앞에 있었던 전투에서의 공적 때문인 듯, 충무무공훈장과 화랑무공훈장을 전달받았다. 나도 모르게 결정된 것이었다.

    그동안 죽 행동을 같이하던 김동혁 대위는 언제부터인가 보이지 않았다.

    “야, 누구 김 대위 못 봤어?”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게 절친했던 동기였는데, 이후 지금까지 나는 그의 소식을 듣지 못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했던 김 대위의 아버지는 후일 이승만(李承晩) 대통령 암살미수사건으로 옥고(獄苦)를 치렀다고 들었다.

    8월 초 우리는 안강·기계에 도착했다. 얼마 후, 새로 연대장이 된 한신(韓信) 대령의 지휘 아래 1연대는 낙동강방어전 가운데 가장 중요한 전투 중 하나인 안강·기계전투를 치렀다.

    하지만 나는 그 전투에 참가하지는 못했다. 내가 도착했을 때,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새로 창설된 제1군단 작전처 차장으로 가라는 명령이었다.

    군단장은 처음에는 중국군 출신 이준식(李俊植) 장군이었다가, 얼마 후 만주군 출신 김백일(金白一) 장군으로 교체됐다. 김백일 장군은 ‘우리 군(軍)에 이런 분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출중한 군인이었다. 1951년 3월, 김백일 장군이 비행기 추락사고로 순직(殉職)했을 때, 나는 고인(故人)의 유품인 가죽점퍼를 수습해서 부인에게 전했다.

    작전처장은 처음에는 김종갑(金鍾甲) 대령이었고, 그가 군단 참모장으로 옮긴 후에는 박임항(朴林恒), 공국진(孔國鎭) 대령 등이 거쳐간 것으로 기억한다.

    낙동강방어전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을 무렵, 나는 김종갑 참모장에게 약한 소리를 했다.

    “제가 1연대에 있으면서 본 우리 군의 병력, 사기 등으로 볼 때, 우리가 이길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김종갑 참모장은 “야, 이 새끼야. 못 이기면 물에 빠져 죽어야지”라고 말했다.

    9월 어느 날, 미군 장교가 나와서 전선 상황을 알려달라고 했다. 나는 그를 안내하면서 “너희, (우리가 있는 쪽으로) 오기는 오는 거냐?”고 물었다. 그는 씩 웃었다. 곧이어 미군이 합류해 공세를 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맥아더 원수가 지휘하는 유엔군은 인천에 상륙했다.

    9월 16일, 낙동강전선의 국군 부대들에 북진(北進) 명령이 떨어졌다. ‘일제(日帝)식민지에서 광복이 되고, 간신히 나라를 되찾았는데, 이제는 나라와 목숨을 함께 잃는구나’라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너무나 감격적이었다.


    흥남철수
     

  • ▲ 휴전 무렵 어느 날의 박태준.
    ▲ 휴전 무렵 어느 날의 박태준.


    우리는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북진했다. 10월 14일, 1군단은 원산에 입성했다. 다음 날 나는 소령으로 진급했다. 그때 내 나이는 만 23세.

    원산에 있을 때 육사 동기생 배무남(裵武男)이 찾아왔다. 그는 전쟁이 나고 인민군이 들어오자 부천에서 숨어지냈다고 했다. 일본군 특별간부후보생 출신인 그는 유능한 장교였지만, 그동안 전투에 참가하지 못했기 때문에 경력관리에 문제가 생겼다. 나는 중국군 출신 부군단장에게 부탁해 그를 전속부관으로 쓰도록 했다.

    우리 부대는 추위와 험한 지형과 맞서 싸우면서 영흥, 흥남, 함흥을 점령하고, 단천, 길주, 명천을 거쳐 주을까지 진격했다. 온천으로 유명한 주을에서 잠시 몸을 녹인 우리는 청진에 입성했다. 청진시청 국기게양대에 올라가는 태극기를 보면서 감격에 겨워 한 것도 잠시, 우리는 얼마 후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어야 했다. 중공군 개입!

    한반도의 끝 나진으로의 진격을 꿈꾸고 있던 우리는 올라갔던 길을 따라 후퇴하기 시작했다. 후퇴하는 지프 뒷자리에는 어느 화학공장에서 손에 넣은 카바이드 술을 가득 채운 드럼통이 있었다. 술잔은 필요 없었다. 나는 드럼통에 기다란 고무호스를 연결해 줄기차게, 그러나 취하지 않을 만큼 마셔댔다. 통일을 목전에 두고 있다가 후퇴하는 내게 술은 유일한 위안이었다.

    1950년 12월, 역사에서 말하는 ‘흥남철수’의 와중에 나는 덜컥 급성맹장염에 걸렸다. 야전병원에는 부상자보다 동상환자가 훨씬 많았다. 수술대 밑에 놓인 요강 같은 바가지에는 도끼로 잘라낸 썩어버린 손가락, 발가락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수술은 세브란스의대 출신 신 대위가 했다. 그는 초등학교 교실의 책상을 몇 개 묶어 만든 ‘수술대’ 위에 누운 나의 손발을 묶은 후 수술을 했다. 마취약이 모자라 마취가 중간에 풀리는 바람에 정말이지 죽는 줄 알았다.

    수술을 했지만 꿰맨 뱃살이 아물려면 최소한 일주일은 병상에 누워 있어야 했다. 그럴 형편이 못 됐다. 내가 데리고 다니던 강릉상고 출신 학도병 조규기가 이리저리 뛰어다니더니 LST(상륙함)에 자리를 구해 놓고 돌아왔다. 수술 다음 날 나는 링거병 두 개를 매달고 들것에 실려 배에 올랐다. 배의 이름은 조치원호. 조규기의 수완 덕에 나는 선장실 신세를 지면서 남으로 내려올 수 있었다.

    후일 나는 똑똑하고 수학 잘하던 조규기에게 육사 입교를 권했다. 그는 육사 12기로 임관했지만, 대위 시절 낚시를 갔다가 익사(溺死)하고 말았다.


    忙中閑
     

  • ▲ 휴전 무렵 어느 날의 박태준.


    1·4후퇴 후 어느 날 비보(悲報)가 날아들었다. 나보다 한 살 위인 사촌형 박태정이 죽었다는 소식이었다. 와세다대 대학원에 재학 중이던 사촌형은 6·25 발발 소식을 접하고 대한해협을 건너와 자원입대했다. 중위 계급을 받고 병기 담당 장교가 된 그는 포탄을 옮기던 중 뜻하지 않은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고 했다. 그가 죽은 곳은 포항이었다.

    외삼촌이 사라졌다는 소식도 들어왔다. 좌익사상을 갖고 있던 그는 아내와 아들을 남겨놓고 종적이 묘연해졌다고 했다.

    흥남에서 내려온 나는 묵호항에서 내려 강릉의 병원으로 옮겨졌다. 우리 부대도 한동안 강릉에 주둔했다.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졌고, 나는 한동안 ‘평화’를 즐길 수 있었다.

    이때 나는 한 아가씨와 알게 됐다. 여고를 졸업하고 간호부대에 자원했던 예쁘고 날씬한 아가씨였다. 노래도 잘 불러 그녀의 아버지가 얘기하면 장교들 앞에서 청아한 목소리로 가곡을 부르곤 했다. 그녀의 이름은 명란. 처음 인사를 받았을 때 ‘명랑’인가 ‘명태 알’인가 하는 싱거운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그녀와 제대로 사귄 것은 아니었다. 어느 봄날, 그녀의 아버지와 유명한 초당두부를 안주 삼아 막걸리를 나누었다. 그는 “우리 딸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딸을 주겠다는 얘기였다. 나도 그녀에 대해 ‘참한 아가씨’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전시하(戰時下)의 군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선뜻 그 청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나는 “언제 전선에 투입될지 모른다. 따님을 불행하게 만들 수는 없다”며 고사(固辭)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못내 섭섭해했다.

    1952년 나는 중령으로 진급했다. 그 무렵 중석불(重石佛) 사건이 터졌다. 당시 중석(텅스텐)은 우리나라의 몇 안 되는 수출품목 중 하나였다. 중석을 수출해 벌어들인 달러를 민간회사에 불하하여 밀가루와 비료를 수입하게 하고, 그것을 농민에게 비싼 가격으로 되파는 과정에서 정부와 정치권이 부당한 이익을 챙긴 사건이 중석불 사건이었다. 전쟁 중에 그런 비리가 자행되는 데 대해 분노를 금할 수 없었다. 하지만 훗날 내가 대한중석 사장으로 가게 되리라고는 그때는 생각지도 못했다.

    화천전투 승리로 화천저수지가 破虜湖로 이름 바뀌어

    이후 1953년까지 나는 최전방에서 한 발 물러나 있었다. 5사단 작전참모로 있었다.

    당시 중공군은 춘천까지 점령한 후 휴전을 마무리지을 요량으로 마지막 대공세를 펼치고 있었다. 그해 4월 5만1900발의 포탄을 퍼부었던 적군은 7월에는 37만5565발을 퍼부었다. 아군(我軍)도 이에 맞서 포격량을 4월의 125만5015발에서 7월에는 200만982발로 늘렸다.

    부연대장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던 36연대장 고광도(高光道) 대령은 박병권(朴丙權) 사단장에게 나를 부연대장으로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사단장이 “작전 참모를 내줄 수 없다”고 하자, 고 대령은 “연대가 무너지고 나면 사단이 무슨 소용이냐?”며 고집을 부렸다.

    ‘전투현장을 너무 오래 떠나 있었다’는 부채(負債)의식을 갖고 있던 참이라 나는 기꺼이 36연대로 내려갔다. 36연대에 가 보니 연대 참모들은 그들대로 연대장의 지휘능력에 대해 불만스러워하고 있었다. 다행히 연대 작전과장 등은 내가 사단 작전참모로 있는 동안 내 밑에 있던 이들이었다. 나는 그들과 호흡을 맞춰서 6·25 마지막 전투를 잘 치러낼 수 있었다.

    내게 주어진 임무는 화천 949고지를 방어, 화천수력발전소를 지켜내는 것이었다. 중공군과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전투의 와중에 대대장과 대대 참모들이 한꺼번에 희생되는 참사도 있었다. 완전무장하고 고무보트를 타고 북한강 상류로 철수하다가 포탄에 당한 것이다.

    아군은 적의 대공세를 저지하고 화천수력발전소를 확보했다. 당시 화천발전소 확보는 군사적 측면에서뿐 아니라 전후(戰後) 경제재건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은 승전 소식에 크게 기뻐하면서 화천저수지를 ‘중공오랑캐를 깨뜨렸다’는 의미에서 파로호(破虜湖)라고 명명(命名)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休戰)협정이 조인됐다. 전쟁은 끝났지만, 내 임무는 끝나지 않았다. 5사단 작전참모로 복귀한 내게 5사단을 지리산으로 이동, 배치하는 계획을 수립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지리산 공비토벌작전을 위해서였다. 지리산에서는 공비토벌전이 계속되고 있었다.

    마지막 임무

    나는 10일 동안 보좌관 1명을 데리고 계획을 짰다. 1만2000여 명의 병력을 수송할 차량은 몇 미터 간격으로 시속 몇 킬로미터의 속도로 전진해야 하는가? 중간의 돌발변수에 대한 예측과 그 대응은? 이동 시 부대를 몇 개로 나눌 것인가? 부식보급은? 식사시각과 장소는? 사단본부와 연대의 배치는? 고등수학 문제가 따로 없었다.

    정일권(丁一權) 군단장, 박병권 사단장, 한신 참모장 앞에서 이동계획을 브리핑하자 정일권 군단장은 “이런 작전계획은 어디서 배웠나? 우리 군대엔 제대로 가르치는 교육기관도 없지 않나? 나는 아직 이만한 작전계획을 보고받은 적이 없다”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스스로의 가능성을 확인한 것 같아 기뻤다.

    사단은 계획대로 지리산으로 이동을 완료했다. 얼마 후 남로당 전북도당을 이끌어오던 부위원장 조병하가 5사단 토벌대에 의해 생포됐다.

    사단본부에서 근무하는 나는 비교적 여유가 있었다. 주말에는 대전으로 나가 동기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기도 했다.

    그해 가을, 박병권 사단장은 내게 연대장 자리를 제안했다. 하지만 나는 지쳐 있었다. 사단장에게 “이젠 장가도 가야겠고, 육대(陸大·육군대학)도 가야겠습니다. 이제 그만 놓아 주십시오”라고 부탁했다. 1951년 설립된 육대는 고급장교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밟아야 하는 코스였다. 이미 많은 동기가 육대 과정을 마친 상태였다. 사단장은 내 청을 들어주었다.

    나의 6·25는 이렇게 끝났다. 그때 내 나이 만 26세, 계급은 육군중령이었다.⊙

    <정리=裵振榮 月刊朝鮮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