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 소속 거제시의원도 철거 운동에 동참 경상남도-거제시, 기념사업회에 자진철거 종용
  • 6.25 전쟁 영웅 김백일 장군(金白一·1917~1951) 동상이 수난을 겪고 있다.

    이 동상은 지난 5월27일 설치됐다. 흥남철수작전 당시 미군을 설득해 10만명의 함경도 피란민을 무사히 거제로 철수시키는 데 공을 세운 김 장군을 기리기 위해 함경도민들이 7천8백만원을 모아 세운 것이다.

    동상은 거제시 고현동 거제포로수용소 유적공원에 자리 잡았다.

    동상이 세워지자 일부 시민단체는 “독립군을 잡던 만주군 장교 동상을 세우는 건 포로수용소 유적공원 취지에  맞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즉각 철거를 요구했다.

  • 거제경실련, 거제YMCA·YWCA, 거제환경운동연합, 거제참교육학부모회 등 지역 10여개 시민단체로 구성된 ‘거제시민단체연대협의회’는 지난 20일 동상을 검은 천으로 덮어씌우고 쇠사슬로 묶었다.

    김 장군이 간도특설대에서 활동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이 부대는 일제가 세운 만주국이 조선독립군·중국인 연계 항일조직을 공격하기 위해 1938년 조선인 중심으로 조직해 일제 패망 때까지 존속한 800~900명 규모의 특수부대다.

    거제시의회(의장 황종명)도 지난달 28일 동상철거 촉구 결의안을 채택했다.

    경상남도(도지사 김두관)가 문화재 영향 검토가 이뤄지지 않았으니, 이전 또는 철거하라는 명령을 지난 4일 거제시에 내렸기 때문이다.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99호로 지정된 거제포로수용소 반경 300m 이내에서 건설공사 시 문화재에 영향을 미치는지 검토해야 하는데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자 거제시도 태도를 바꿔 기념사업회 측에 자진 철거를 종용하고 있다.

    거제시의원 총 15명 가운데 7명(한기수·이행규·옥영문·박장섭·전기풍·유영수·김은동)이 철거 서명운동을 주도했다. 이 중 전기풍 시의원은 한나라당 소속이다.

    이에 대해 동상 건립 주체인 흥남철수기념사업회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며 격앙했다.

    황덕호 흥남철수기념사업회 회장은 “김백일 장군은 대한민국 국군의 표상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모욕적인 행위를 하는 것은 국군의 정체성을 크게 훼손하는 일”이라고 목청을 높였다.

    그러면서 “김백일 장군은 간도특설대 소속으로 중국 공산당과 김일성 세력에 대해 저지활동을 했을 뿐 항일독립군을 토벌하지는 않았다”고 강조했다.

  • ▲ 27일 오후 경남 거제시 포로수용소 유적공원 흥남철수작전기념비 옆에서 흥남철수작전 당시 미군을 설득, 피란민을 함대에 승선할 수 있게 한 고 김백일(金白一, 1917∼1951) 장군의 동상 제막식이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 27일 오후 경남 거제시 포로수용소 유적공원 흥남철수작전기념비 옆에서 흥남철수작전 당시 미군을 설득, 피란민을 함대에 승선할 수 있게 한 고 김백일(金白一, 1917∼1951) 장군의 동상 제막식이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아울러 기념사업회는 철거에 강력 반발하며 법적 대응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거제시를 지역구로 둔 한나라당 윤영 의원은 “시민들이 충분히 토론하고 있으니 좀 더 추이를 지켜보겠다”며 한발 물러서는 모습이다.

    윤 의원은 22일 <뉴데일리>와의 통화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다. 상황을 보니 친일을 두고 양측의 시각차가 있는 듯하다. 다만 철거와 관련한 문제는 시장이 결정할 문제지, 내가 관여할 입장은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김백일은 누구?

    전쟁기념관 자료에 따르면 김백일 장군은 북간도 연길현 출신이다. 본명은 김찬규. 월남하면서 ‘세상이 붉게 물들어도 청천백일과 같이 살겠다’는 뜻으로 이름을 ‘백일’로 개명했다.

    만주의 2년제 군사학교인 봉천군관학교(후일 만주군관학교) 졸업 후 1940년부터 만주군 한인특설부대(간도특설대)에서 근무했다. 8.15 광복 후에는 조선국방경비대에 입대해 대한민국 국군 창설에 참여했다. 1946년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한 뒤 중위로 임관, 그 후 제3연대 초대 연대장에 올랐다. 조선경비사관학교 교장을 맡았을 때 박정희 전 대통령의 상관이었다.

    1948년 여순 반란을 진압했고, 1949년 옹진반도 전투에서도 북한군을 격퇴하는 공을 세웠다. 1950년 4월 육본 행정참모부장에 부임한 직후 6.25가 일어나자 작전참모부장을 겸해 초기 전투를 이끌었다.

    1950년 10월 1일 새벽 5시 38선을 돌파해 압록강 유역인 혜산진까지 북상함으로써 후일 '국군의 날'을 10월 1일로 제정하는 근거가 됐다. 중공군 개입 후에는 흥남 해상 철수작전을 지휘했다. 당시 국군과 미군은 병력 10만5,000명과 피란민 10만여명을 안전하게 철수시켰다. 군 기록에는 “김백일 군단장은 스파이가 섞여 있을 가능성 때문에 피란민 승선을 반대한 미군 측을 설득해 피란민을 철수시켰다”는 취지로 적혀 있다.

    전쟁 중 1951년 3월 부대 복귀 중 비행기가 대관령 인근 상공에서 악천후로 추락하면서 34세의 나이로 숨졌다. 사후 중장으로 추서되면서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