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파진영, 이승만 공과에 대해 다양한 평가 공존
     '이승만 죽이기'외의 다른 의견 통제하는 좌파와 달라
      
    변희재 / pyein2@hanmail.net  
      
    KBS 친노 노조가 ‘이승만 띄우기’라 맹비난하고 있는 KBS의 이승만 특집 다큐멘터리는 총5부로 기획돼있다. 1부 ‘개화청년 이승만’, 2부 ‘독립운동에 뛰어들다’, 3부 ‘대한민국을 건국하다’, 4부 ‘이승만과 한국전쟁’, 5부 ‘제1공화국의 명과 암’ 등이다. 이는 이승만의 생애를 시간 순서대로 나열한 것으로, 이러한 5부 구성 자체만 놓고 ‘이승만 띄우기’라 비난하는 것은 그야말로 정치공세다. 또한 KBS 친노 노조가 비난하는 대로 애국우파 진영이 이승만의 모든 것을 다 업적으로 인정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승만과 건국 자체를 부정하는 KBS 친노 노조와 달리 구체적 자료를 바탕으로 훨씬 더 객관적으로 평가한다.

    이승만에 대해서는 다양한 연구결과가 있지만, 문화일보 사장 출신으로 위암 장지연상, 중앙언론문화상, 인촌상 등 각종 언론 수상경력을 갖추고 있는 남시욱의 ‘한국 보수세력 연구’에 수록된 이승만의 공과를 한 기준으로 삼을 수 있다. 이 책은 ‘한국 진보세력 연구’와 함께 우파진영에서 좌우 이념과 진영의 문제를 판단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기 때문이다.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과 만나 일본 침략 막아 달라 호소했던 이승만

    이승만은 22세에 배재학당을 졸업한 뒤 서재필의 독립협회에 들어가 급진파 회원으로 활약했다. 그러나 1899년 박영효 세력의 고종 양위 계획에 가담해 종신형을 선고받은 뒤 5년7개월 간 감옥생활을 했다. 이승만의 청년시절은 민주화운동을 하다 투옥된 민주화 인사의 그것과 별 다를 바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이승만은 고종의 밀명을 받고 미국에 건너가 일본의 한국침략 의도를 미국정부에 설명하고 협력을 구하는 활동을 벌였다. 특히 이승만은 당시 씨어도어 루스벨트 미국대통령을 만나 협조를 구했으나 실패했다. 이미 미국은 일본과 가쓰라-테프트 밀약을 맺어 조선과 필리핀을 분할 점령하는 것으로 합의를 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승만은 언젠가 미국과 일본이 충돌할 것을 예상하고 미국을 중심으로 독립 외교활동을 펼치는데 주력한다. 상해 임시정부 시절에는 약 6년 간 초대 임시대통령으로 부임한 바도 있다. 그러나 6년 재임기간 중 6개월만 상해에서 근무하고 대부분 미국에서 보냈기에 “상해로 돌아오라”는 임정 요인들과 마찰을 빚어 임시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이에 미국 워싱턴에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위원부를 이끌면서 한국 독립을 위한 외교활동을 벌였다.

    이러한 이승만의 독립운동에 대해서도 KBS 친노 노조는 왜곡선동하고 있다. KBS 친노 노조는 1903년 발표한 이승만의 ‘독립정신’을 거론하며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중국의 간섭에서 벗어나 조선이 비로소 독립을 회복했다고 하며 시종 일본과의 협력을 강조하고 있다. 즉 그가 생각한 독립은 중국이나 러시아 같은 서양 열강으로부터의 독립이었지,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이 아니었다.”라고 비판하고 있다.

    1800년 후반까지도 조선이 청나라 속국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현실을 교묘히 감추고,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된 시점에서 이승만이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났다는 사실도 은폐하고 있다. KBS 친노 노조가 직접 이승만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게 됐을 때 어떤 작품이 나올지 추측하기 어렵지 않다. 실제로 정연주 사장 시절 기획된 이승만 특집 2부작 다큐멘터리는 바로 이러한 친노 노조의 시각대로 역사와 사실을 왜곡해 ‘이승만 죽이기’로 일관한 바 있다.

    이승만이 독립운동가로서 명성과 권위 갖춘 건 역사적 사실

    이승만이 독립운동가로서 압도적 평가를 받았다는 점은 다양한 역사적 사실로 증명된다. 3.1운동 직후 한성 임시정부에서는 그를 집정관총재로, 상해 임시정부에서는 그를 대통령으로, 연해주의 대한민국의회정부에서는 그를 총리로, 서울에서 수립하려던 조선민국임시정부는 그를 부도령으로, 평북지방에서 세우려던 신한민국정부는 그를 국방총리로 각각 지명했다. 그만큼 이승만의 이름 석자가 명성과 권위를 지녔기 때문이다.

    KBS 친노 노조를 비롯한 이승만 부정세력이 집중하는 부분은 건국과 제1공화국 관련이다. 제1공화국에서의 부정선거와 4.19를 비판의 고리로 삼아 대한민국 건국 자체를 부정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미 소련연방 해체 이후 공개된 외교문서를 통해 한반도를 분단한 세력은 소련이고, 이승만은 이를 인지하고 차선책을 택했다는 점이 역사적 사실로 드러난 상황이다.

    이러한 떼쓰기식 선동을 제외하더라도 제1공화국 당시 이승만에 대한 평가는 공과가 뚜렷하게 나눠진다. 남시욱은 농지계획, 남침격퇴, 한미동맹조약 체결, 교육혁명을 그의 업적으로, 친일파 두둔, 전쟁예방의 실패, 헌정유린, 언론탄압을 그의 과로 평가한다. 실제로 남시욱의 저서에서는 상식적인 이승만 비판에 대해 이를 적극 수용하는 입장을 취한다.

    “이승만이 2기 임기만 끝내고 1956년에 깨끗이 물러났더라면 불명예스러운 독재자라는 비난도 안 듣게 될 것이고 한국의 민주정치 역시 한 단계 높은 발전을 이룩했을지 모른다. 만약 그랬었더라면 그는 ‘한국 민주주의 아버지’로서 국민들의 존경을 받았을 것이다. 설사 그의 후계자들 중에서 ‘민주주의 파괴자’가 나오는 경우에도 초대 대통령인 그의 업적은 영원한 귀감이 될 것이다.”

    남시욱은 이에 대해 “기본적으로 그 자신이 조선왕국의 양반계급 출신인데다 프린스턴 대학에서 국제법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지적 엘리트여서 권위주의와 엘리트의식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힘들었을 것”이라며 그의 한계를 지적했다. 또한 필라델피아 제1차 한인의회에서 채택된 ‘건국종지’ 제2항에서 한국에 가급적으로 미국의 정체를 모방한 정부를 수립하되, 정부 수립 이후 초창기 10년간은 중앙정부에 권력을 집중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규정한 점도 거론했다. 바로 이 결의안을 통과시키는데 이승만이 앞장섰다는 것이다. 이승만이 미국식 민주주의 원리를 몰랐던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 자치 경험이 부족한 점을 고려해 과도기적으로 권위주의 통치를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감안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남시욱은 “이런 주장은 어떤 경우에도 어떤 특정인의 장기집권을 합리화하는 논리가 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이승만 자신이 더 잘 알았을 것”이라 비판했다. 반면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는 다른 의견을 제시한다.

    우파진영, 남시욱과 조갑제 등 이승만에 대한 다양한 평가 공존

    “1948년 이후 한국의 민주화 과정은 서양에서 수백년 걸려[영국의 경우 마그나 카르타(대헌장) 제정부터 시작하면 보통선거 쟁취까지 약 800년이 걸렸다] 발전시킨 민주주의 제도를 시행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압축적으로 겪고 있는 과정이라고 보여진다. 우리는 민주주의란 연극, 민주주의란 연습을 해온 셈이다. 연극과 연습을 많이 하면 실연(實演)이 되긴 하지만 외래 제도나 사상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내기 위해선 엄청난 대가(代價)를 치러야 한다.

    서구(西歐)의 민주주의를 기준으로 하여 이승만(李承晩)과 박정희(朴正熙)를 독재자라고만 단정하는 것은, 메이저 리그의 통계를 기준으로 삼아 동네 야구 선수들을 혹평하는 것과 같다. 세종대왕에게 왜 민주주의를 하지 않았느냐고 욕설을 퍼붓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남시욱과 조갑제는 이승만의 민주주의 문제에 시각이 크게 엇갈리는 듯하나 본질에서는 차이가 없다.
    남시욱은 이승만이 미국 초대대통령 워싱턴의 길을 걸었더라면 대한민국 건국에 정통성이 부당하게 공격당하는 부분에서 훨씬 자유로웠으리라는 입장인 반면, 조갑제의 경우 전체적인 대한민국 민주주의 현실까지 감안한 비판을 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분명한 것은 맹목적으로 ‘이승만 죽이기’ 이외 일체 다른 의견을 내세우면 안 된다는 KBS 친노 노조와 달리 우파 진영에서는 이승만에 대한 다양한 평가가 공존하고 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