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만복의 글을 게재한 日잡지 '세카이'(世界)의 정체  
     
     친북친중(親北親中)성향, 사양 길 접어든 좌파(左派)잡지 
    金泌材   
     
     
     김만복 전 국정원장이 글을 기고한 일본의 좌파성향 월간지인 세카이(世界)는 이와나미(岩波)문고가 발행하는 논단지로 1945년 12월에 창간됐다.
     
     초대편집장은 ‘여러분은 어떻게 살 것입니까’의 저자(著者)인 요시노 겐자부로(吉野源三郎)이며, 최고 책임자는 이와나미 문고의 창업자인 이와나미 시게오(岩波茂雄)의 친구였던 아베 요시시게(安倍能成)였다.
     
     훗날 이와나미 문고의 사장으로 일본 좌파인사 미노베 료키치(美濃部亮吉, 前동경도지사, 親北성향 사회주의자)의 문하에서 도지사 특별 비서를 지낸 야스에 료스케(安江良介)도 오랜 동안 세카이의 편집장을 맡았다.
     
     현 편집장은 오카모토 아츠시(岡本厚)이다.
     
     북한-중국 등 공산진영에 우호적 논조
     
     세카이는 스스로 학술성과 정확성을 중시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 내용을 면면히 살펴보면 소위 평화문제를 중심으로 동서냉전 문제와 관련, 공산진영보다 자유진영에 대해 비판적인 논조를 취해왔다.
     
     현재도 한국, 미국, 일본 등에 대해서는 매우 부정적 논조를 유지하고 있는 반면, 북한과 중국 등 공산진영에 대해서는 우호적인 논조로 일관하고 있다.
     
     과거 좌파 전성기에는 일본 좌파 진영 핵심 월간지로 그 권위(?)를 자랑하며, 좌파 논단의 중심적 위치를 점유했었다. 1980년대 들어 일본 내 좌파 논단의 쇠퇴로 세카이는 수많은 월간 논단지 중 하나일 뿐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혀 사양길로 접어드는 듯 했다.
     
     그러던 중 아사히(朝日)신문사가 발행하는 ‘논좌’(論座)가 폐간된 후 어부지리(漁父之利)로 유일한 좌파 논단지라는 타이틀이 붙었다. 발행부수는 1950~1960년대에는 20만부 정도였고, 1990년대 이후에는 7만부로 줄어들어 현재는 1만부 안팎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과거 일본의 마이니치(毎日)신문사가 실시한 ‘전국독서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세카이는 중앙공론(中央公論)보다 독자수가 훨씬 적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잡지 발행 초창기부터 다른 종합지-논단지에 비해 ‘특정이념’을 공유하는 정기구독자가 많았고, 이른바 학술전문잡지라는 타이틀을 붙인 탓에 현재까지 명맥이 유지되고 있다.
     
     전(前)편집장 야스에 료스케, DJ와 막역한 관계
     
     역사교과서문제, 오키나와 전쟁 등 특정 주제를 다루는 ‘세계임시증간호’(世界臨時増刊号)나 ‘별책세계’(別冊世界)등이 비정기적으로 발행되고 있다.
     
     2005년 다뤄진 특집 기사를 보면, ‘동아시아 공동체-미래에 대한 구상’(1월호), ‘현대 일본의 기분-어디로 향할까?’(2월호), ‘경기(景氣) 상승을 어떻게 볼 것인가?-양극화 확대 속에서’(3월호), ‘오키나와-미군 재편 '미일합의'는 깨지다!’(4월호) 등 이다.
     
      전(前) 편집장인 야스에 료스케의 경우 김대중(이하 DJ)과는 매우 막역한 사이로 알려져 있다. 1998년 10월9일 DJ는 일본을 방문해 같은 해 1월 사망한 야스에 료스케 전 세카이 편집장의 부인을 만났다.
     
     DJ는 당시 일본으로 출발하기 전에 야스에의 부인이 초청 대상에서 빠진 것을 발견하고, 명단에 추가할 것을 특별히 지시할 정도로 각별한 애정을 보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야스에 료스케와 DJ의 관계는 1971년 처음 시작됐다. DJ는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한 뒤 국내잡지에 소위 민주주의와 인권, 남북 평화공존 등에 대해 기고를 했는데, 글의 내용에 감탄(?)한 야스에가 자신이 발행하는 잡지 세카이에 이를 전재했다.
     
     김일성과 10여 차례 걸쳐 인터뷰
     박정희 ‘새마을 운동’ 비하에 열중
     
     1972년 10월 유신이 선포된 후 DJ는 망명을 결심하고 야스에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야스에의 도움으로 DJ는 많은 일본 정치인들에게 유신체제의 부당성을 알렸고, 이 과정에서 세카이의 지면을 적극 활용했다.
     
     1982년 말 DJ가 신군부에 의해 미국으로 쫓겨나자 야스에는 미국으로 달려와 인터뷰를 했으며, 무려 30쪽짜리 특집기사를 작성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DJ는 1985년 귀국길에 일본에서 하룻밤을 묵었는데, 이때도 야스에를 만났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야스에 료스케(安江良介)가 편집장으로 있던 시기 세카이는 "한국의 군사독재 정권이 민중을 탄압 하고 있다"면서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이라는 제목의 연재 기사를 게재, 국내 유언비어의 원산지로 역할을 했다. 그러나 같은 시기 북한에 대해서는 호의적 논조로 일관했다.
     
     특히 서방언론과 일체 접촉을 피했던 김일성과의 인터뷰를 10여 차례에 걸쳐 게재하면서 확인도 되지 않은 북한의 발전상(?)을 보도했다. 북한의 천리마운동은 생산을 증가시키기 위한 운동이라고 평가하는가 하면 한국의 새마을운동은 박정희 체제를 연장하기 위한 대중동원 수단으로 비하했다.
     
     'KAL기 폭파사건 조작설' 등 유언비어 퍼트려
     
     김일성은 1977년 4월호 세카이에서 “우리는 핵무장할 생각이 없다. 우리는 핵병기를 생산할 자금뿐만 아니라 그것을 실험할 장소도 없다. 조선반도에서 핵을 사용하면 모두가 멸망해버리기 때문에 사용할 수 없다”고 말했다.
     
     대한항공기 폭파사건 조작설, 1987년 대통령 선거 컴퓨터 조작설 등 터무니없는 유언비어도 세카이가 썼다. 그리고 문제의 기사들이 한국으로 역수입되어 남한 주사파들의 ‘무기역할’을 톡톡히 했다는 지적도 있다.
     
     영어에는 까막눈인 국내 386주사파들 중에 일본어 독해에는 유독 도사가 된 인물들이 많은 이유가 바로 일본 좌파와 세카이의 영향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한편, 세카이에 문제의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을 쓴 인물은 일본인이 아니라 한국인이라는 설이 있다.(세카이 측은 현재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음)
     
     문제의 한국인은 현재 국내 모 대학 석좌교수로 재직하며, 일본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다. 'TK생' 이란 가명으로 세카이에 글을 게재했던 그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취임사 작성 당시에도 깊이 관여했으며, 정연주를 KBS사장으로 앉혔던 인물이다.
     
     김필재 기자 spooner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