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폭격명령은 내려오지 않았다! 
     
     현대전은 전쟁의지가 勝敗를 결정한다. 연평도 도발을 통하여 드러난 국가 지도부의 전쟁意志 문제. 북한은 이스라엘을 닮고, 한국은 아랍을 닮아 가는가? 
    趙甲濟    
     
       공산주의자들은 원래 지저분하게 싸운다. 변칙과 속임수가 長技(장기)이다. 뒷골목 싸움꾼이다. 이들과 싸울 때 저들이 만든 戰場(전장)에 들어가면 불리하다. 그들과 똑같이 뒷골목 싸움, 게릴라전, 기습전, 항공테러, 암살 등 비정규전으로 대응하여서는 勝算(승산)이 없다. 국제법이 통하는 정규전으로 싸워야 한다. 뒷골목이 아니라 규칙이 통하는 링 위에서 싸워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저들을 링 위로 끌어내야 한다. 2010년 11월23일은 그렇게 할 수 있는 絶好(절호)의 찬스였다. 북괴군이 연평도를 무차별 포격하고 있을 때였다. 한국 공군의 최신예 전투기 F-15와 F-16 여덟 대가 신속하게 출격, 연평도 상공에서 대기중이었다. 射程(사정)거리가 긴 고성능 유도폭탄과 미사일을 싣고 있었다. NLL(북방한계선)을 넘을 필요도 없이 한국 영공에서 발사, 敵(적) 진지를 불바다로 만들 수 있는 무기였다. 한국 공군은 늘 북한 공군과 붙으면 10대 0으로 깰 수 있다는 자랑을 하고 다녔다.
      대통령과 軍 수뇌부는 그러나 폭격명령을 내리지 않고 얻어맞는 쪽을 선택하였다. 얻어맞는 게 체질이 된 군대요 대통령이기에 찬스가 와도 잡을 수가 없었다. 폭격명령이 떨어졌더라면 F-15K 전폭기는 어마어마한 위력을 가진 유도폭탄으로 敵(적)의 해안포대를 박살내고 도전하는 북괴 공군의 낡은 미그23을 모조리 격추시켰을 것이다. 1982년 6월 이스라엘의, F-15가 主力인 공군이 미그23이 主力인 시리아 공군과 대결, 85-1로 이긴 베카 계곡 공중전이 再演(재연)되었을 것이다.
     
      최후통첩을 했어야
     
      敵陣(적진)을 초토화시켜놓고 데프콘 3을 발동하면 韓美동맹 체제가 가동한다. 미군이 사령관을 맡은 韓美연합사가 작전통제권을 행사한다. 미군 사령관은 멋대로 권한을 행사하는 게 아니고 한국과 미국의 대통령으로부터 합의된 지시를 받는다. 즉, 미군이 개입하는 것이다. 겁이 나서 비행기도 타지 못하는 김정일이 긴장된 韓美연합군에 도전하는 것은 自殺행위임을 잘 알 것이다. 이때는 물론 미국의 航母(항모)전단이 한국 海域으로 전개된다.
      국민들과 국군은 불타는 敵의 해안포 陣地(진지), 격추되는 미그 23의 동영상을 구경하면서 환호하였을 것이다. 6·25 남침 이후 얻어맞기만 하였던 한국이었다. 이 화려한 大勝은, 김정일 정권의 氣(기)를 꺾고, 조국이 오랜 피해의식에서 탈출, 자신감을 회복, 남북관계에서 주도권을 잡을 수 있도록 만드는 역사적 전환점이 되었을 것이다.
      李明博 대통령이 23일 놓친 기회는 바로 그런 것이었다. 軍 지휘부도 이런 대응을 건의하지 않은 듯하다. 국가 지도부는, 국군이 북괴군에 지도록 만들기 위하여 누군가가 꾸며놓은 것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희한한 交戰수칙을 들먹이면서 "擴戰(확전)하지 말고 위기를 관리하자"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대통령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찬스가 지나간 뒤였다. 그래도 기회는 남아 있었다. 북괴군은 포격 이후에도 再侵(재침)을 위협하고 위협사격을 가했기 때문이다. 敵(적)이 언제 다시 공격할지 모르는 상황이므로 우리가 전투기를 출격시켜 위협요인을 제거하는 것은 국제사회에서 통하는 自衛權(자위권)의 발동이다. 대통령은 이것도 하지 않았다.
      지난 11월29일 對국민 담화 때도 찬스는 있었다. 여러 번 不渡(부도)어음이 된, '추가 도발에 대한 단호한 응징'을 다짐하기 전에 김정일과 북괴군에게 최후통첩을 하였어야 했다. 예컨대 "12월12일까지 전쟁범죄행위에 대하여 사과하고 책임자를 문책하고 피해를 보상하고 해안포를 철거하지 않으면 우리는 자위권을 행사할 것이다"고 선언, 공을 김정일에게 던지는 것이다.
      그렇게 해놓고 한국空軍의 폭격 훈련 비행을 강화하고, 全軍에 비상을 걸고, 韓美공조를 굳힌다. 대통령과 軍 수뇌부는, "우리는 전면전을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敵이 원하면 응할 수밖에 없다. 이는 통일전쟁이 될 것이다"는 메시지를 계속하여 보낸다. "敵이 우리의 최후통첩에 응하지 않으면 우리의 막강 공군은 연평도 도발의 원흉인 해안포대를 없애버릴 것이다. 敵이 여기에 대항하면 擴戰도 불사, 북한의 核시설을 폭격할 것이다"는 정보도 언론에 흘린다. 미국의 대규모 航母전단이 한국海域에 투입된다. 중국 정부가 중재하겠다고 달려와도 우리는 응하지 않는다. 6者회담은 중국과 북한이 공모하여 국제사회를 속이는 사기 도박판임을 李明博 정부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1억 달러짜리 전투기는 에어쇼用이 아니다
     
      이렇게 압박하면 김정일은 고민에 빠진다. 全面戰을 결심하지 않는 한 한국 정부의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기습전이나 테러가 먹히는 戰場이 아니기 때문이다. 북한정권이 최후통첩에 응하지 않아도 좋다. 한국은 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는 행동의 자유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든지 때릴 권리를 갖게 된다. 이게 주도권이다. 이 주도권을 슬기롭게 구사하면 김정일을 갖고 놀 수 있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하는 武力은 해안포가 아니다. 한국 공군의 최신예 전투기이다. 1억 달러짜리 F-15전폭기를 에어쇼用으로 도입한 건 아니다. 敵의 해안포와 長射程砲(장사정포)에 대한 武力응징用으로 도입한 것이다.
      나의 최후통첩 전략의 핵심은, 韓美연합군의 海, 空軍이 前面(전면)에 나오는 정규전의 링 안으로 마적단 수준의 북한군을 끌어내는 것이다. 일부에서 우려하는 것과 달리 전면전은 우발적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홧김에 일으키는 것도 아니다. 김정일이 승산이 있다고 판단할 때만 일으킨다. 韓美연합戰力은 그런 승산의 기초를 무너뜨린다. 기회는 당분간 계속된다.
     
      전쟁의지의 대결
     
      김정일이 연평도 사태를 일으킨 의도에 대하여 여러 가지 분석이 전개된다. 多數說은 외부에서 긴장을 조성, 흔들리는 내부 체제를 단속하고 김정은 세습 과정을 편하게 하기 위한 도발이란 주장이다. 朴勝椿 전 국방부 정보본부장(예비역 육군 중장)은 다른 견해였다. 그는 對南적화 전략에 따른, 2012년 大選 판을 겨냥, 전쟁공포증을 확산시키기 위한 도발이라고 했다.
      "대낮에 민간 지역까지 포격한 것은 한국인들에게 그 장면을 보여주려고 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국민들이 전쟁을 두려워 하게 되면 강력한 대응을 할 수 없을 것이고, 2012년에 친북세력이 다시 집권할 수 있을 것이라고 계산한 것입니다. 남한의 容共정권을 통하여 韓美동맹을 해체, 남한을 赤化한다는 게 그들의 불변의 전략입니다."
      朴 장군은 "북한정권이 對南적화 전략을 포기하고 체제유지에 주력한다고 보는 것은 너무나 안이한 판단이다"고 했다. 對南적화 전략을 포기하면 북한정권은 존재이유를 상실한다. 체제의 생리상 赤化전략을 버릴 수가 없게 되어 있다. 북한정권은 武力도발의 목표를 군사적 승리에 두지 않는다. 남한에서 벌어지는 정치판에서 승리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연평도 도발에 대한 한국군의 응징으로 북측이 大敗하더라도 전쟁공포증이 남한에서 확산되어 從北세력이 집권할 수 있게 되면 정치적으로 이기는 것이 된다. 北의 도발은 한국인의 전쟁의지를 꺾기 위한 것이란 이야기였다.
      朴 장군은 "정부가 국민들을 안심시켜야 한다. 韓美동맹이 유지되는 한 김정일이 절대로 全面戰(전면전)을 일으킬 수 없다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알려 전쟁공포증 확산을 차단하여야 한다"고 했다. "국민들에게 전쟁은 없지만 敵의 도발은 계속된다고 솔직히 알리고, 도발이나 局地戰엔 적절히 대응할 것임을 설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안보에 관한 한 國論이 통일되어 있음으로 敵을 강력하게 응징할 수 있지만, 한국은 좌익들이 평화至上주의를 퍼뜨리고 정부와 여당은 安保를 경시, 그런 여론이 형성되지 않습니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의 안보 태세 해체 행위가 北의 도발을 불러들였으니 그들이야말로 전쟁유도세력이지요. 정부가 누가 진짜 전쟁세력인지를 국민들에게 설명해야 합니다."
      1996년 강릉 잠수함 사건으로 한국은 準戰時 상황이 되었지만 1년 뒤 국민들은 김대중씨를 대통령으로 당선시켰다. 2002년 6월 北은 서해교전으로 한국 해군 함정을 격침시키는 도발을 하였지만 그해 노무현씨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2006년 10월 北은 핵실험을 하였지만 노무현 정권은 韓美연합사 해체 계획을 밀어붙였다. 2010년 3월26일 천안함을 폭침시켰지만 그 직후 있었던 지방선거에서 親北세력이 승리하였다. 이런 일련의 사태를 관찰해온 김정일 정권은 자신들의 도발이 安保세력을 결속시키는 것보다는 전쟁공포증을 증폭시켜 친북세력을 돕는 측면이 더 강하다는 판단을 하고 있는 듯하다. 연평도 도발이 한국인의 생각을 전쟁공포증으로 바꿀 것인지, 一戰不辭쪽으로 바꿀 것인지에 따라 2012년 대통령 선거의 결과가 좌우될 것이다.
     
      ‘반격하면 전쟁 난다’는 誤判이 부른 2차 대전
     
      1936년 3월7일, 3개 대대의 독일군이 비무장 지대인 라인란트(라인강 주변의 독일영토)로 진주, 로카르노 조약을 위반하였을 때 히틀러가 독일군에 내린 명령은 '프랑스군이 나타나면 싸우지 말고 철수하라'는 것이었다. 히틀러는 독일군이 프랑스軍과 정면승부를 하기엔 아직 力부족이라고 판단하였다. 만약 프랑스군이 연대 규모의 병력을 투입하였더라도 독일군은 물러났을 것이고 독일 군부가 이를 빌미로 쿠데타를 일으켜 히틀러를 몰아냈을 가능성이 높다. 2차 세계대전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프랑스가 패망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왜 프랑스군은 安保의 생명선인 라인란트 완충지대가 독일군 주둔지로 변하는 것을 막지 못하였나? 프랑스 군부가 아주 패배주의적인 판단을 하였기 때문이다. 프랑스군 총사령관 모리스 가므랑 원수는 不法(불법)진주한 독일군에 반격하면 全面戰이 일어날 우려가 있으므로 총동원령을 내린 뒤 반격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국방부도 이 판단에 동조하였다. 그런데 총동원령을 내리면 하루 3000만 프랑의 경비가 들 것이다. 당시 프랑스는 外債가 많아 국가不渡 직전으로 몰렸고 선거를 앞두었다.
      프랑스 집권세력은 총동원령을 결단할 수 없었다. 오히려 독일군에 반격하지 않는 데 대한 변명을 찾아 나섰다. 외무장관을 영국으로 보내 "영국이 합세하면 독일군을 치겠다"고 압박한다. 영국이 냉담하게 나올 것임을 알고 그렇게 한 것이다. 프랑스 정부는, 국민들에게 영국의 소극적 태도 때문에 독일군의 라인란트 진주를 허용할 수밖에 없다는 변명꺼리를 만들었다. 프랑스 국민들도 決戰(결전)의지가 없어 정부의 애매한 태도를 수용하였다.
      연평도에 대한 북괴군의 포격이 있은 직후 한국군의 지휘부서와 대통령이 과감한 대응을 하지 못한 이유 중의 하나도 '우리가 전투기로 敵의 해안포대를 폭격하면 전투가 확대될 것이다. 그렇게 하면 한국군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는 판단이었을 것이다.
      프랑스 군대처럼 守勢的 자세를 취하고 만 것이다. 프랑스가 영국을 끌어들이려 한 것처럼 한국도 미국의 도움을 청하였다. 영국과 달리 미국은 신속하게 航母戰團을 전개하였다.
     
      역사는 세 번째 기회를 주지 않았다
     
      프랑스 군부가 독일군을 치면 전면전이 일어날 것이라고 내각에 보고한 것은 전쟁을 기피하기 위한 고의적 과대평가였을 가능성이 높다. 민간인들에게 그렇게 겁을 주어야 전쟁을 말리려 할 것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1939년 가을과 겨울 프랑스 군부는 똑 같은 실수를 한다. 이때 독일군의 主力은 폴란드 침공에 투입되어 서부戰線에선 프랑스 군사력이 독일군을 압도하는 형국이었다. 이때 프랑스가 先制공격을 하였더라면 독일군은 손을 들었을 것이라는 게 戰史學者들의 거의 일치된 평가이다. 이때도 프랑스군은 가므랑 원수가 지휘하고 있었다. 그는 開戰을 결심하지 못하여 결정적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전격전으로 폴란드를 점령한 독일군은 서부전선으로 병력을 이동시킨 뒤 1940년 5월 프랑스를 공격하였다. 라인란트 비무장 지대가 있었으면 독일군의 기습은 성립할 수 없었다. 독일 기갑군단의 아르덴느 돌파전이 성공, 프랑스는 6週만에 손을 들었다. 역사는 두 번 기회를 놓친 프랑스를 버린 것이다.
      李明博 정부와 한국군 지휘부는 천안함 爆沈에 대한 응징을 포기하는 첫번째 실수에 이어 연평도 도발에 대한 응징도 포기하곤 '추가 도발에 대하여서만 응징한다'고 물러났다. 두 번 절호의 기회를 놓친 李明博 정부에 역사가 한 번 더 기회를 줄 것인지, 아니면 이것으로 끝이 될 것인지, 귀추가 주목된다.
      <라인란트 점령은 군사작전으로는 사소한 것에 지나지 않았으나 유럽에 커다란 새로운 전망을 열어 놓았으며, 라인江의 다리를 건너 3개 大隊가 진주한 것으로 유럽의 戰略(전략) 정세가 뒤흔들렸을 뿐 아니라, 다시는 회복시킬 수 없을 만큼 변경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깨달은 사람은 오직 한 사람 히틀러(그리고 영국에서는 처칠)뿐이었던 것 같다. 1936년 3월 西歐(서구)의 두 민주주의 국가는 중대한 전쟁의 위험 없이 나치스 독재자와 그 제도를 붕괴시킬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를 가졌었다. 그리고 그 기회가 사라지는 것을 내버려두었다>(윌리엄 L. 샤이러, ‘제3제국의 흥망’)
     
      舊正공세의 교훈
     
      毒가스를 쓴 1차 세계대전은 化學의 전쟁, 原爆을 쓴 2차 대전은 물리학의 전쟁, 월남전쟁은 심리학의 전쟁이라 불린다. 월맹이 심리전으로 미국의 전쟁意志를 꺾었기 때문이다.
      핵폭탄과 신예 전투기로 무장한 미국이 거지군대 같은 월맹군에 진 것은 무기가 뒤져서가 아니다. 군인 숫자가 모자라서도 아니다. 돈이 부족해서도 아니다. 국가지도부의 전쟁의지가 월맹 지도부의 혁명전쟁 방식에 의하여 꺾여버렸기 때문이다.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패배한 것도 전쟁의지가 강한 거지 군대가 이긴 경우이다. 전쟁에 대한 최근 연구는 전쟁의지의 문제를 해명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한국군이 천안함 爆沈, 연평도 도발 등 계속해서 북한군에 패배하고 있는 것도 武器가 모자라서가 아니라 전쟁의지에서 북괴군에 지고 있기 때문이다. 김정일의 전쟁의지가 李明博의 전쟁의지를 압도하고 있다. 김정일은 고물 해안포에다가 전쟁의지를 더하여 연평도를 공격하는 데 성공하였다. 李明博 정부와 군은 최신예 전투기에서 전쟁의지를 빼버림으로써 고철덩어리로 만들어버렸다. 전쟁의지가 약하면 기회는 위기로 둔갑한다.
      1968년 1월30일 월남의 공산군(越盟 정규군과 베트콩)은 휴전약속을 깨고 유명한 舊正공세를 시작하였다. 공산군은 全國에서 서른 곳의 목표물을 일제 공격하였다. 사이공의 미국 대사관 건물 안으로까지 쳐들어왔고 미군 사령부를 쳤다. 古都 후에는 공산군에 한달간 점령당하였다.
      군사적으론 공산군의 大敗였다. 게릴라들이 숨어서 싸우지 않고 미군을 상대로 정규전을 한 것이다. 그들이 유리한 정글이 아니라 大路上에서, 도시에서 싸우니 火力이 우세한 美軍과 월남군 등 연합군의 밥이 되었다. 특히 베트콩은 구조적인 대타격을 입었다. 그 후 월남전은 월맹 정규군이 主導하게 되었다.
     
      군사적 승리가 정치적 패배로
     
      군사적으로 大敗한 공산 월맹측은 그러나 정치적으로 大勝하였다. 미국 존슨 행정부의 전쟁의지를 꺾는 데 성공한 것이다. 3월31일 미국의 존슨 대통령은 극적인 연설을 하였다.
      <북위 20도 以北에 대한 폭격을 일방적으로, 그러나 부분적으로 중단한다. 만약 공산군측이 협상에 응하면 완전히 중단한다. 미군의 增派를 중단한다. 나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 않는다>
      닉슨 대통령의 안보보좌관으로서 월남 평화 협정을 맺은 헨리 키신저는 '외교술'이란 책에서 <이 연설은 戰後 미국 역사에서 가장 운명적인 대통령의 결정 중 하나였다>라고 했다. 실패한 舊正 공세에 의하여 막다른 골목으로 몰린 공산군을 계속해서 압박하였더라면 훨씬 유리한 高地에서 협상을 할 수 있었는데, 일방적인 양보를 한 것이 돌이킬 수 없는 실수가 되었다는 것이다. 월남전의 패배는 여기서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존슨 대통령의 전쟁의지는 왜 부러지고 말았는가? 여론 때문은 아니었다. 당시 여론조사에 따르면 61%는 '매派(강경대응지지층)'였고, 23%가 '비둘기派(온건대응론자)'였다. 70%는 北爆의 지속을 지지하였다.
      문제는 言論과 식자층의 비관론이 정치인들에게 준 영향이었다. 영향력의 절정에 있던 CBS 뉴스 진행자 월터 크롱카이트는 "이 전쟁은 이길 수 없다. 우리가 擴戰하면 敵도 擴戰으로 대응한다. 끝없는 지구전으로 갈 것이다"는 요지의 논평을 했다. 존슨 대통령의 월남전을 지지하던 월스트리트저널과 타임誌도 反戰으로 돌았다. 時事논평가 월터 리프만도 "월남전에서 우리는 질 수밖에 없다"고 단정하였다. 言論이 만든 비관적 분위기에 흔들린 것은 정치인들이었다. 맨스필드, 풀브라이트 같은 大정치가들도 擴戰에 반대하고 나섰던 것이다.
      존슨 대통령의 협상제의를 월맹측은 즉시 받았다. 그 전의 협상제의들을 거부해오던 월맹이 서둘러 협상테이블로 나오기로 한 것은 舊正공세의 실패로 위기에 몰렸기 때문이다. 1996년 월맹의 전쟁 영웅 지압 장군은 CNN과 인터뷰하면서 "舊正공세의 전략적 목표는 미국측으로 하여금 擴戰을 중단시키고 협상으로 나오도록 유도하려는 것이었다"고 회고하였다. 월맹은, 舊正공세를 통하여 미국의 여론과 언론을 反戰으로 돌아서게 함으로써 미국 정부를 압박, 불리한 입장에서 협상을 제의하도록 꾸몄다는 것이다. 월맹의 작전은 월남의 戰場에선 실패하였지만 미국내의 심리戰場에선 성공한 것이다. 미국 지도부의 전쟁의지를 꺾은 것이다.
      존슨 대통령의 협상제의는 미국이 월남전에서 공산군에 이길 생각이 없다는 공개선언이었다. 시간이 자신들의 편이라고 확신하게 된 공산월맹측은 협상을 질질 끌면서 '완전승리'라는 목표를 향해 나아갔다. 파리에서 시작된 평화 협상은 5년간 이어졌다. 월맹측은 '미군철수와 월남정부의 顚覆(전복)'를 요구하였다. 이는 미국의 무조건 항복에 다름 아니었다. 미국은 미군철수는 약속하였으나 사이공 정부는 포기하지 않겠다고 버티었다. 미국과 월맹이 주도한 협상에서 사이공 정부는 들러리로 전락하였다.
      1973년 초 미국과 월맹측은 평화협정을 맺는다. 駐越미군은 철수하고, 월남에 들어온 월맹군은 그대로 두고 휴전하기로 하였으니 사이공 정부의 붕괴는 시간문제였다. 월맹은 휴전협정이 발효되자 말자 그것을 어기면서 전투를 재개하였다. 미국의 닉슨 행정부는 그러나 이를 응징할 의지를 상실하였다. 미국의 언론과 의회가 휴전협정 준수를 강제할 美軍의 개입을 막았다. 1975년 월남은 공산화되었다.
     
      이스라엘 정부의 ‘빅 스리’는 特攻작전통
     
      이스라엘 정부는, 11월 23일 북한군의 연평도 포격 직후 직설적인 용어를 사용, 강력하게 비난했다. 한국 정부의 반응이 ‘擴戰 말라’는 수준이었는데 우리보다 더 분노한 모습이었다.
      리베르만 외무장관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이번 사건은 ‘미친’ 체제를 저지하고 쓰러 뜨려야 할 필요성을 그 어느 때보다 절감케 한다”고 했다.
      천안함 爆沈과 연평도 도발 이후 “우리도 이스라엘식으로 보복해야 한다” “우리도 이스라엘식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들이 많이 나왔다. 이스라엘, 월맹, 북한정권의 공통점은 지도부의 강력한 전쟁의지이다. 이스라엘은 국가 지도부의 구성과 생리가 한국과 너무 다르다.
      이스라엘의 現 국가지도부는 ‘특공대’라 불릴 만하다. 대통령 시몬 페레스는 국방차관 시절엔 비밀 핵(核)개발을 주도하였다. 국방장관으로서 1976년 7월4일에 있었던 엔테베 작전을 총괄적으로 지도한 사람이었다. 엔테베 작전은 팔레스타인 테러 조직이 이스라엘 사람 약100명이 탄 에어 프랑스기를 납치, 우간다의 엔테베에 착륙시켜놓고 이스라엘에 수감된 테러리스트 석방을 요구한 데서 발생하였다. 특공대원을 실은 이스라엘 공군기 석 대가 엔테베 공항에 착륙, 전광석화(電光石火) 같은 작전으로 테러리스트들을 제압, 인질(人質)들을 구출한 사건이다. 이 특공작전의 지휘관은 요나탄 네탄야후 중령이었다. 그는 적탄(敵彈)을 맞고 죽었다. 이 작전에서 죽은 유일한 이스라엘 군인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요니’라는 애칭으로 부르는 이 영웅의 동생이 현재의 총리 벤자민 네탄야후이다.
      그 또한 특공대원이었다. 1972년 5월 벨기에의 항공사 사베나 여객기가 100여 명의 승객을 태운 채 납치되어 이스라엘의 벤구리온 공항에 착륙하였다. 이 인질 구출작전에 투입된 이스라엘 특공대의 지휘관은 현재 이스라엘 국방장관이자 부총리인, 참모총장 출신 에후드 바락이다. 총리 네탄야후는 그때 바락의 부하였다. 네탄야후는 구출작전 때 동료가 쏜 총탄을 맞고 중상을 입었다. 대위로 제대한 그는 미국에 건너가 하버드와 MIT에서 공부하였다. 1973년 제4차 중동전이 터지자 귀국, 전투에 참여한 뒤 다시 도미(渡美)하였다.
      에후드 바락이 지휘한 벨기에 여객기 인질구출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이스라엘 특공대는 정비사로 위장, 기내(機內)에 들어가 테러리스트 남자 두 명을 사살하고 여자 두 명을 체포하였다. 인질이 된 승객은 한 사람도 죽지 않고 다 구출되었다. 이 특공작전 성공의 경험이 엔테베 작전을 낳은 것이다. 엔테베 작전을 기획하는 모임에 바락도 참여하였다. 바락은 수많은 특공작전과 암살 작전을 지휘하고 3군 참모총장이 되었으며 총리를 지낸 뒤 지금은 국방장관 겸 부총리이다.
      역대 이스라엘 총리 중 1996년에 암살된 라빈과 바락은 3군 참모총장 출신이고, 샤론은 4차 중동전쟁 때 수에즈 운하 도하(渡河) 작전을 성공시킨 전쟁 영웅이다. 전임 총리 에후드 오메르트는 장교 출신이다. 사병으로 종군(從軍)하였던 이 사람은 국회의원 시절에 장교 교육을 따로 받았다. 이스라엘 내각엔 군 장성 출신들이 많다.
      이스라엘의 국가적 성격인 된 ‘특공정신’은 특공(特攻) 전력을 가진 이들을 중용(重用)한 데서 생긴 것이다. 한국 국가 지도부의 ‘빅 스리’인 대통령, 국무총리, 여당 대표는 군대 경험이 없고, 이스라엘의 빅 스리인 대통령, 총리, 부총리는 특공작전 전문가들이다. 이게 국격(國格)의 차이로 나타난다. 한국도 내각, 국회, 청와대에 장교 출신들이 많이 들어가면 연평도 도발과 같은 사건에서 대처가 달라질 것이고 국가의 분위기도 많이 바뀔 것이다.
     
      부시 만류 묵살, 시리아 원자로 폭격
     
      2007년 여름 이스라엘 수상 오메르트가 부시 미국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시리아가 북한의 도움을 받아서 짓고 있는 원자로를 미군이 폭격해달라고 요청하였다. 부시는 安保관계 참모들에게 검토를 시켰다. 답은 부정적이었다. 특공대를 보내 부수어버리는 방안도 검토하였으나 위험이 크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미국 CIA 부장 헤이든은 문제의 시설 안에 북한의 도움으로 만들어지는 원자로가 있을 가능성은 높지만 핵무기 제조시설이 보이지 않아 시리아의 핵무장 의도에 관한 가능성을 낮게 평가한다는 보고를 하였다.
      부시는 오메르트 총리에게 "우리 정보기관이 核무기를 만들기 위한 시설이란 점을 확인하지 않는 한 다른 主權국가를 공격할 순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외교적으로 해결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의하였다.
      부시 회고록에 의하면 이때 오메르트는 "이 건은 우리나라의 신경을 매우 심각하게 자극하는 것이다"고 했다. 그는 "시리아의 핵개발 계획은 우리에겐 생존 차원의 문제이다"고 덧붙이면서 "귀하의 전략은 나에겐 매우 실망스럽다"("Your strategy is very disturbing to me.")"고 섭섭한 감정을 드러냈다고 한다. 부시는 통화를 끝낸 뒤 옆에 있던 보좌관에게 "그래서 이 사람이 좋단 말이야. 그는 배짱이 있어"라고 말하였다.
      이스라엘 공군기는 2007년 9월 시리아의 원자로 시설을 폭격, 몽땅 부숴버렸다. 때린 쪽은 물론이고 얻어맞은 시리아도 침묵하였다. 부시는 회고록에서 '이스라엘은 미국의 事前 허가를 받지 않았다"고 밝혔다. 부시는 또 얻어맞은 시리아가 침묵하였고, 폭격 받은 시설을 서둘러 위장한 것으로 봐서 '핵무기용 원자로를 짓고 있었음이 확실해졌다'면서 CIA의 조심스런 평가에 대하여 '정보는 정확한 과학이 아니란 사실이 입증되었다'고 평하였다.
      국가생존에 관련된 문제는 스스로의 결단에 의하여 해결해야지 아무리 우방국이라도 외국에 매달리면 안 된다는 것이 이스라엘 지도부의 확고한 철학이다. 부시는 이 폭격 작전의 성공을 널리 알리는 게 어떠냐고 이스라엘 총리에게 이야기하였다. 그는 그렇게 하면 시리아의 지도자 아사드를 코너로 몰 것이라면서 거절하였다고 한다.
     
      “믿을 것은 우리뿐이다.”
     
      2009년 1월 이스라엘을 포격하는 하마스 조직을 치기 위하여 가자 지역을 침공했다. 그들이 테러조직으로 규정한 하마스 섬멸 작전은 국제여론에서 많은 지탄을 받았다. 이스라엘 정부는 유엔 안보리가 즉시 휴전을 결의한 데 대하여 오메르트 당시 총리는, "우리는 이를 무시하기로 하였다. 이스라엘 국가는 국민들의 안전을 지키는 문제에 대하여 외부기관이 결정권을 가지도록 동의한 적이 없다. 이스라엘 국방군은 국민들을 지키기 위한 작전을 계속할 것이다”고 선언하였다.
      한국의 識者(식자)들은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에 대하여 우리가 응징을 할 경우 유엔헌장에 위배되는지 여부를 놓고 말씨름을 벌이곤 한다. 이스라엘은 安保를 모든 정책의 최상위에 둔다. 安保문제에 대하여는 "유엔도, 미국도 이래라 저래라 해선 안된다. 국가생존의 문제는 우리가 결정한다"는 자세를 견지한다. 이스라엘은 압도적인 다수 아랍인들에 의하여 포위된 가운데서 한 번도 외국군대의 도움을 받아 나라를 지킨 적이 없다. 미군은 물론이고 어떤 외국군대의 주둔을 허용한 적이 없다.
      외국군대가 주둔하여 안보를 도와주게 되면 국민들의 정신상태가 해이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국회도 자주 격돌하지만 정치의 주제는 항상 국가 생존이다. 거창한 주제를 놓고 벌이는 정치투쟁은 나름대로의 美學이 있다. 한국처럼 安保를 무시하고 사소한 데 목숨 거는 정치는 추하다.
      이스라엘의 가자 침공전에 대하여 국제여론은 비판적이었지만 이스라엘 국내에선 지지여론이 90%나 되었다. 가자 전투에서 1,202명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죽고, 5000명 이상이 부상, 이스라엘 군인은 10명이 戰死, 200명 이상이 다쳤다고 발표되었다.
      2010년에 이스라엘은 가자 지구로 구호품(이스라엘은 危害물품이 있다고 주장)을 싣고 가던 터키 배를 公海上에서 停船(정선)시키고 반항하는 운동가 9명을 사살하였다. 국제사회에서 비난 여론이 높았으나 네탄야후 수상은 직후 연설에서 한 마디도 사과하지 않았다. 당당하게 이스라엘 軍의 조치를 옹호하면서 배가 또 들어오면 똑같이 저지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그 뒤부터 구호선은 이스라엘 군대의 停船, 檢問(검문), 檢索(검색)에 순응하였다.
      이스라엘군과 정보기관의 특공작전은 그 발상의 기발함과 행동의 대담성에 있어서 ‘다이하드’와 같은 영화를 연상시킨다. 특공작전은 이스라엘식(式) 생존방식을 보여준다. 학살과 핍박의 희생양으로 오랫동안 경멸받던 나약한 유태인이 더 이상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자 하는 신생국가 이스라엘의 결의에 찬 행동, 또 그러한 과거로 돌아가지 않으려고 건너온 다리에 불을 질러버리는 모진 자기다짐인 것이다. 그들은 국제법을 어기고 국제여론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특공작전도 사양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렇게 해야만 국가로서 살아남을 수 있다. 600만 유태인이 학살될 때 당신네들은 어디에 있었는가”라고 쏘아붙이면서 “믿을 사람은 우리뿐”이라고 서로를 일깨우는 사람들이다.
     
      중국을 협박, 굴복시킨 이스라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2010년 6월 핵무기 개발 의혹을 사고 있는 이란에 대한 추가 제재 결의안을 표결에 부쳐 찬성 12표, 반대 2표로 통과시켰다. 브라질과 터키가 반대표를 던졌으며 레바논은 기권했다.
      거부권을 가진 상임이사국인 중국은 당초 추가 제재에 부정적이었으나 이스라엘이 강하게 중국을 압박해 결의안에 동조하도록 한 것으로 드러났다고 뉴욕타임스가 보도하였다. 이스라엘은 지난 2월 중국에 고위급 대표단을 파견했다. 이들은, 중국 측에 이란의 核무기 개발 의지를 담은 비밀문서를 보여주곤 국제사회가 이란의 核무기 개발을 막지 못한다면 이스라엘이 이란의 核시설을 폭격하겠다고 통고하였다고 한다. 그럴 경우 原油의 11%를 이란에 의존하는 중국 경제가 어떤 타격을 받게 될지도 자세히 설명했다는 것이다. 중국은 이스라엘의 前歷(전력)으로 보아 이런 압박이 공갈이 아님을 잘 알았을 것이다.
      한국이 중국에 대표단을 보내 "만약 천안함을 폭침시키고 연평도를 포격한 북한을 중국이 계속 감싼다면 우리는 북한의 잠수함 기지와 해안포대를 폭격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었을 때 廣州(광주) 아시안 게임이 제대로 치러지겠는가"라고 압박하였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페레스 이스라엘 대통령: "지도자는 앞에 서는 사람"
     
      지난 여름 訪韓(방한)한 시몬 페레스 이스라엘 대통령은, 중앙일보 김영희 기자로부터 "대통령께서는 인정하지 않겠지만 이스라엘은 核보유국입니다. 核을 가진 이스라엘이 남의 나라에 대해 核을 갖지 말라고 요구할 도덕적 권위가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자 이렇게 답하였다.
      “이스라엘의 核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이스라엘은 누구를 먼저 공격한 적이 없어요. 위협을 받는 건 우리입니다. 이스라엘은 核무기를 보유하고 있다고 선언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의혹이 있다는 것은 잘 압니다. 그리고 이런 의혹 자체가 억지력이 될 수 있다면 그걸 왜 마다하겠습니까. 核을 이용하는 것보다 核보유 의혹을 이용하는 것이 더 낫지요. 예전에 아랍연맹 사무총장이 내게 이스라엘 核시설이 있다고 의심받는 지역을 좀 가보자고 해요. 내가 말했지요. ‘내가 미쳤습니까? 가보면 아무 것도 없을 텐데 그렇게 되면 의혹이 해소되고 나는 목이 잘릴 거요.’ 의혹으로 충분해요.(웃음)”
      87세의 페레스 대통령은 세계 국가원수 중 가장 나이가 많다. 그는 리더십의 원리를 이렇게 설명하였다.
      “사람들 위에 서지 않고 낮은 자세로 섬기는 것입니다. 사람들 위가 아니라 앞에 있는 것뿐입니다. 리더가 되려면 어디를 향해 가야 할지 방향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군대는 '돌격 앞으로!"가 없다고 한다. 장교는 항상 "나를 따르라!"라고 호령한다.
      이스라엘은 1956년 이집트의 나세르에 의한 수에즈 운하 국유화 사건 때 프랑스·영국과 합세하여 對이집트 작전에 가담한 것을 기회로 삼아 프랑스와 비밀核개발 협정을 체결했다. 프랑스 기술의 도움으로 네게브 사막에 재처리시설, 원자로 등 핵무기 개발 단지를 만든다. 이스라엘 建國의 아버지인 벤구리온 총리는 이 사업을 적극적으로 지원했으나 골다 메이어(뒤에 총리 역임) 등 반대자들도 만만치 않았다.
      국방차관으로서 비밀 핵개발을 지휘하였던 페레스는 회고록에서 그 과정을 자세히 썼다. ‘核무장 선택권’이란 의미이지만 사실상 핵개발을 뜻하는 ‘뉴클리어 옵션’(Nuclear Option)이란 용어를 사용, 비밀核개발을 성공시키는 과정에서 돌파해야 했던 여러 난관들을 설명했다. 그중의 하나. 페레스 당시 국방차관이 1959년 아프리카의 세네갈을 방문하고 있는데 벤 구리온 총리로부터 남은 일정을 취소하고 급히 귀국하라는 연락이 왔다. 비상사태가 발생한 줄 알고 돌아오니 벤구리온 총리, 골다 메이어 장관, 정보기관인 모사드 책임자 하렐이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총리의 설명인즉, 소련의 첩보위성이 네게브 사막의 核시설 건설공사 현장을 촬영했고 이 사진을 갖고 그로미코 소련 외무장관이 지금 워싱턴으로 날아갔다는 것이다. 덜레스 美 국무장관에게 그 사진을 들이대고서 미국과 소련이 힘을 합쳐서 이스라엘에 대해 核개발을 포기하도록 압력을 넣으려 하는 것 같다는 정보를 입수했다는 것이다. 특사를 미국으로 보내 간청을 해보자는 쪽으로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었다. 이때 페레스가 단호하게 반대하고 나섰다.
      “우리가 미리 이실직고하면 약점을 잡히게 된다. 그냥 가만히 있자. 도대체 소련 첩보위성이 찍은 사진에 뭐가 나오나. 땅을 판 구멍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딱 잡아떼면 그만이다.”
      이런 취지의 설득이 통해서 이스라엘 정부는 얼굴에 철판을 깔고서 核개발을 계속 추진해 지금은 核강대국이 되었다. 이스라엘이 유독 核무장에 성공한 것은 벤구리온과 페레스 같은 배짱 있는 정치인의 리더십과 自主국방에 대한 정치권의 全面的(전면적)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한국처럼 美軍에 국방을 의존하고 있었다면 核개발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라빈, “테러두목 죽었다고 애도하란 말인가”
     
      북한정권은 남파간첩의 존재를 인정하고 2000년 9월에 63명의 비전향 장기수들을 데리고 가서 영웅으로 대우하였다. 한국의 歷代 정권은 북파 공작원의 존재를 숨겼다. 북한으로 공작원을 들여보내는 것을 무슨 죄나 짓는 일로 생각한 것이다. 공작원을 영웅으로 만드는 체제와 죄인시하는 체제가 대결하면 승부는 명백하다. 이스라엘은 북한식이다. 시리아 고위층에 잠입, 골란高原(고원)의 병력 배치상황을 파악, 조국을 도왔다가 붙들려 사형집행된 코헨은 이스라엘 사람들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다. 이스라엘은 테러리스트 암살 작전도 거의 공공연하게 인정한다.
      기자는 1996년 11월 초 라빈 당시 수상을 인터뷰하였다. 피살되기 하루 전이었다. 이런 問答(문답)을 남겼다.
      <―며칠 전 '이슬라믹 지하드'의 지도자가 말타에서 암살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정부는 모사드의 관련설에 대해 확인도 부인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총리께서는 올해 초 지하드를 지칭하여 “우리는 당신들을 추적하여 제거할 것이다. 어떤 국경도 당신들의 보호막이 되지 못할 것이다”고 경고한 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인접 국가의 主權도 침범할 각오가 돼 있다는 뜻입니까.
      “1993년 이후, 이스라엘-PLO 사이의 평화 협상이 진전되어 갈수록 지하드와 하마스 조직에 의한 테러는 더욱 심해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동차 폭탄으로, 수류탄으로, 자살공격법으로 우리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모든 테러 희생자의 70%가 이스라엘人들입니다. 그들이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정치적인 방법으로 평화협상에 반대하면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우리에게 해온 방식 그대로 그들에게 대항하고 있습니다. 지하드 두목을 누가 죽였는가는 먼 장래에 역사가 알려 주겠지요. 우리는 그 可憎(가증)할 테러 조직의 두목이 제거된 데 대해서 애도할 입장은 아닙니다.”>
     
      뮌헨 올림픽 테러 관련자 20년간 추적, 모두 암살
     
      1972년 西獨의 뮌헨 올림픽 기간에 선수촌으로 침입한 팔레스타인 '검은 9월단' 이 이스라엘 선수 및 코치 11명을 죽였다. 독일 경찰과 총격전으로 테러단 5명이 사살되고, 세 명이 잡혔다. '검은 9월단'은 그 뒤 서독의 루프트한자 여객기를 납치하여 西獨 정부를 위협한 끝에 잡혀 있던 세 명의 동료를 구해냈다.
      화가 난 골다 메이어(여성) 이스라엘 총리는 이 테러를 기획하고 가담한 범인들을 암살하는 조직을 만들게 하였다. 정보기관 모사드와 이스라엘군이 합동으로 특수조직을 구성했다. 이 팀의 첫 작전은 1973년 4월 레바논의 베이루트로 침투,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의 정보책임자 모하메드 유수프 알 나자르 등 세 명을 죽이는 일이었다. 이 特攻(특공)작전의 지휘관은 나중에 참모총장, 그리고 수상이 된 에후드 바락(현재 국방장관)이었다. 이 국가公認(공인) 암살단은 주로 유럽과 중동을 돌아다니면서 팔레스타인 테러단을 추적하여 죽이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실수를 하였다. 1973년 6월 노르웨이 릴리함메르에서 한 모로코인을 뮌헨사건 관련자 알리 하산 살라메로 誤認(오인)하여 암살하였다가 요원 다섯 명이 붙들렸다. 이스라엘 정부는 끈질긴 외교 교섭 끝에 옥살이하던 요원(여성 2명, 남성 3명)을 2년 뒤 전원 송환받았다. 이스라엘 암살 팀은 살라메 추적을 포기하지 않았다. 드디어 1979년 1월22일 그를 베이루트에서 찾아내 원격조종 폭탄으로 죽였다.
      뮌헨 보복작전은 '신의 분노'라는 암호명을 가졌다. 1992년까지 20년 동안 계속되었다. 얼마나 많은 테러관련자들을 죽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수십 명으로 추정된다. 한국이 이스라엘 같이 보복하였더라면 1·21 청와대 습격사건 관련자, 육영수 여사 암살사건 관련자, 아웅산 폭파사건 관련자, KAL기 폭파사건 관련자들은 다 죽었을 것이다. 거기에 김일성, 김정일이 포함되었을지도 모른다. 전쟁의지의 핵심은 보복의지이다. 보복의지의 핵심은 애국심과 분노일 것이다.
     
      “외국군 주둔하면 국민정신 망가진다”
     
      1996년 기자가 이스라엘 군대를 취재할 때 만난 군사전문기자 지브 쉬프氏를 잊을 수 없다. 그는 당시 텔아비브市에서 발행되는 일간지 하레츠(HAARETZ)의 국방부장으로서 이스라엘에서 제일 가는 安保분야의 전문기자였다. 이스라엘 상류층에서는 “라빈 수상도 쉬프 기자에게 보고한다더라”는 우스개가 있을 정도였다. 쉬프氏는 “자주국방을 위해서 중요한 것은 방위산업의 기초이다”고 했다. 그는 “방위산업의 독자적 운용이 있어야 무기수입이 금지되는 상황에서도 버틸 수 있기 때문에 그 국가는 외교적으로 여유를 갖게 된다”고 충고했다.
      내가 물었다.
      “유태인의 역사를 살펴보면 군사적 천재성(天才性)은 발견되지 않는데 어떻게 이처럼 독창적인 군사조직과 전술을 개발하여 나라를 지켜내는 데 성공했습니까.”
      “유태인은 군사 면에선 아주 형편없는 전통밖에 가지고 있지를 못했지요. 우리는 군대를 조직할 때(영국 식민지 시대) 다른 나라와 아주 다른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는 이스라엘 사람들 모두가 비밀전투요원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전통 속에서 이스라엘 군대가 탄생했으므로 우리는 IDF(Israel Defense Force)를 국민군(People's Army)이라고 부릅니다. 우리의 건국 주역들은 농업을 일으키는 데 주력했고 그 뒤에 군대를 만들었습니다. 당시엔 무역이나 산업처럼 人力수요에 대한 다른 경쟁부문이 없어서 가장 뛰어난 人材가 군대로 몰려들었습니다.
      이스라엘 군대는 유태인들 중에서도 가장 머리 좋은 사람들이 그 기초를 놓은 조직이란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또 하나 이스라엘 군대를 강군(强軍)으로 만든 요인은 싸우지 않으면 국가와 국민의 생존이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생존이냐 멸망이냐, 여기서 살 것인가 다시 쫓겨날 것인가, 예속이냐 독립이냐의 상황에서 우리는 다른 선택이 없었습니다.”
      ‘노 아더 초이스’(No other choice)-이 말을 기자는 이스라엘 취재 중에 수십 번은 더 들어야 했다. 용감하게 싸우는 수밖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벼랑에 선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강박관념이 맹렬한 투지로 전환된 곳에 이스라엘 군대가 있다는 얘기다. 쉬프 기자는 잊을 수 없는 충고를 하였다.
      “우리는 수십 배의 국력과 병력을 가진 아랍의 적들에 의해 포위돼 있었지만 우리의 영토에 외국군이 장기 주둔한다는 것은 국가의 단합성과 정신무장에 아주 나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일찍부터 깨달았습니다.”
     
     
      가끔 ‘웰빙 체질’ ‘살찐 돼지’로 표현되는 한국의 국가 지도부와 ‘야윈 늑대’ 같은 북한정권의 지도부를 비교하면 北은 이스라엘, 南은 아랍을 닮은 것 같다. 가령, 한국이 북한 처지가 되었더라면 어떻게 행동하였을까?
     
      1. 東西 냉전에서 국제공산주의 세력이 승리, 미국과 일본이 赤化되고 韓美동맹이 사라진다.
      2. 북한정권은 미국, 일본과 수교한다. 한국은 중국, 러시아와 수교하지 못하여 외교적으로 고립된다.
      3. 외교적으로,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고립된 한국은 미국, 일본 시장을 잃고 성장동력을 상실, 실업률이 늘고 무역赤字가 계속된다.
      4. 북한은 중국, 소련, 일본, 미국과 교역을 하면서 고도 경제성장을 계속한다.
      5. 2010년 현재 북한의 1인당 주민소득은 2만 달러를 넘었다. 한국은 300 달러 수준으로 떨어졌다.
      6. 드디어 한국에서 餓死者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한국을 탈출, 중국을 거쳐 북한지역으로 넘어가는 인원이 한 해에 5000명 정도이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한국의 대통령, 여당, 군대가 지금과 같다면 과연 북한의 공세에 며칠을 버틸 것인가? 전쟁도 못해보고 자진하여 북한에 흡수당하지 않을까?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만 김정일의 북한정권은 불리한 조건에서도 이스라엘처럼 外軍의 도움 없이 自主국방을 하고 있고 한국은 유리한 조건에서도 美軍의 도움을 받아 국방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북한정권의 鬪志가 한국 지도부의 그것을 압도하고 있다. 아시아 역사는 잘 사는 나라가 못 사는 유목민족에게 당한 사례를 수도 없이 기록해놓았다. 북방유목민족들이 만든 거란, 금, 몽골에 차례로 당한 宋은 부자나라였다. 여진족에 당한 明, 징기즈칸 군대에 당한 이란의 文明은 찬란했다. 신라에 당한 백제도 그러했다. 한국의 풍요가 가난한 北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안이하다. 한국의 군대와 정치인들은 좋은 권총을 갖고도, 몽둥이를 든 惡黨을 향하여 방아쇠를 당길 수 없는 비겁자들이 아닌가. 富를 武器와 勇氣로 전환시키지 못하면 빼앗긴다.
      나쁜 세력은 자동적으로 망하고 착한 사람들은 자동적으로 이긴다는 환상을 버려야 한다. 착한 사람과 똑똑한 사람이 모자라서 망한 나라는 없다. 惡黨에게 몽둥이를 드는 용감한 사람이 없어서 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