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괴(北傀) 군사력의 '최후 개념'-자폭(自爆)정신  
     
     '핵으로 무장한 북한이 언제 붕괴할 것인가'를 논의할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이 무너지지 않도록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논의해야 한다.
    金泌材     
     
    [1] 북한의 간첩양성 기관-봉화정치대학 

    북한의 대남공작요원(고정간첩)은 사회문화부 소속의 ‘봉화정치대학’에서 양성되며 ‘전투원’ 즉 무장간첩은 노동당 작전부 산하 ‘김정일정치군사대학’에서 양성하고 있다. 이 두 대학은 지난 1957년 이후 ‘686훈련소’. ‘금강학원’, ‘금성정치군사대학’ 등으로 변천을 거듭해오다 지난 1992년 이후 지금의 명칭으로 정착됐다.

     고정간첩을 양성하는 봉화정치대학의 학제는 과정에 따라 1년 내지 3년이다.
    입학대상자는 ‘김정일정치군사대학’ 5년을 졸업한 ‘전투원’ 출신이거나 비밀리에 선발한 요원들로서 대상자의 출신배경에 따라 교육기간이 결정된다. 주요 교육내용은 지하당 건설이론, 정보학, 지형학, 적국활동 심리학, 외국어, 남한 및 국제정세. 비합법활동전술, 수영·잠수·운전 등이다.

     남한과 해외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생활하면서 각종 정보수집과 지하조직 건설, 그리고 와해활동에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최고의 환경에서 교육받는 것이다. 고령의 몸으로 맹활약한 이선실(2000년 사망) 등 공개·비공개 대남사업 종사자 거의 모두가 이 봉화정치대학 출신이다. 한편, 북한의 대남사업은 그 특성상 비밀보안 문제가 생명으로 그동안 김일성·김정일 이외는 어떤 인물도 이 분야를 건드릴 수 없다. 이와 관련한 일화가 하나 있다.

     《67년 1월 30일, 평양의 주요 기관과 기업소에 현지지도를 나왔던 김일성이 당시 연락부장이었던 이효순에게 “오늘은 동무들의 사업을 좀 알아보자”며 ‘686훈련소’(봉화정치대학)로 승용차를 돌렸다. 당시 민족보위상(현 인민무력부장) 김창봉 대장을 비롯, 당 간부와 정무원 간부 수십명이 김일성을 수행했다.  김일성이 탄 차가 용성구역으로 들어서자 김일성은 갑자기 차를 세우게 했다. 그는 책임서기(비서실장)를 시켜 연락부장 이효순 외에는 누구도 동행시키지 마라고 지시했다. 이날 김일성은 무려 6시간 동안 학교를 시찰했다. 그동안 고위간부들은 용성구역의 도로 위에서 김일성이 나올 때까지 꼼짝없이 기다렸다고 한다. (다큐멘터리 김정일, 김현식·손광주 공저)》

    80년경 김정일은 대남담당 4개부서 책임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남사업은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 시기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되, 정보수집과 관련해 다른 나라의 교훈을 참작할 필요가 있다. 그 모델로 2차 대전의 소련 정보원 리하르트 조르게(Richard Sorge, 1895∼1944)가 있다. 앞으로 정보사업은 ‘조르게식’으로 해야 한다.”

    이후부터 공작원들은 조르게를 많이 연구하게 됐다. 북한의 대남 공작원이라면 반드시 독파해야 할 ‘대외정보활동의 경험과 교훈 모음집 30권’이란 책의 각 권 첫장에도 “정보사업은 조르게식으로 하여야 합니다”라는 김정일의 말이 적혀 있다. 

    왜 김정일은 이처럼 ‘조르게’를 대남 공작원의 ‘모델’로 강조했던 것일까?
    ‘역사상 최고의 스파이’, ‘소련판 제임스 본드’라는 수식어가 붙는 리하르트 조르게의 면면을 잠시 살펴본다.

     《1895년 독일인 석유기사와 러시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조르게는 1차대전이 터지자 자원입대해 철십자 훈장도 받았다. 그런 조르게의 직접적인 변신계기는 부상으로 병원에서 만난 간호사로부터 ‘공산주의’를 접하면서 부터다. 의병제대와 함께 베를린대학에서 정치학박사 학위를 받은 조르게는 이후 기자로 일하며 소련을 제발로 찾아가 간첩교육을 받았다.

    ‘프랑크푸르트차이퉁’지 상하이 특파원으로 부임(1930년)한 그는 중국어와 일본어를 익히고 아시아 농업사를 탐구하며 인맥을 쌓아나갔다. 소련의 지시로 도쿄로 가게된 조르게는 독일인 사회에서 단연 돋보이는 존재였다. 일본 문화에 대한 심층기사로 일본 권력층의 환심도 얻었다. 이를 통해 조르게는 일본 수상실을 비롯한 고위층에 일본인 첩자들을 심기도 했다. 

    1941년 소련은 독일군의 공격으로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그러나 일본군이 시베리아로 진격할 위험성 때문에 소련은 시베리아 방면에 배치해 놓은 100만 병력을 대(對)독일 전선으로 이동시킬 수가 없었다.  


    이때 조르게는 ‘일본이 시베리아를 침공하지 않는다’는 극비정보를 모스크바로 타전한 후 일본 헌병에 체포된 다. 조르게는 도쿄의 스가모(巢鴨) 형무소에 감금, 조사를 받고 재판에 회부되어 1944년 1월 20일 사형이 확정되고 동년 11월 7일 사형이 집행됐다.  
    당시 조르게의 존재 자체를 부인했던 소련은 그가 제공한 정보를 바탕으로 시베리아사단을 독소전에 투입·대대적인 반격으로 승리의 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조르게의 스파이 활동은 성공적인 공작활동의 모범적인 사례로 각국 정보기관의 연구 대상이 되고 있다.》 

    어쨌든 김정일의 지시 이후 세계 유명·무명의 정보원들에 대한 분석이 대남교육내용에 많이 포함되기 시작했다. 실제로 북한의 대남공작요원들은 이들의 정보수집 사례와 공작원 개인의 정보활동을 서로 비교해보기도 하고 실기토론도 진행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2] 북한의 간첩양성기관-‘김정일 정치군사대학’

    주요교육내용: 자폭론·혁명역사교육·게릴라전술  


    ‘봉화정치대학’과 더불어 김정일이 가장 신뢰하는 대남공작요원들의 대부분은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이하 군사대학)에서 양성된다. 
    연간 100-200명의 대남침투 요원들을 양성해내는 것으로 알려진 이 대학은 지난 92년 학교 창립 35돌을 맞으며 북한의 교육기관 사상 처음으로 김정일의 이름을 사용했다. 
    5년제 군사대학의 교과과정은 김일성·김정일 혁명역사를 비롯한 사상교양이 40%, 전투원으로서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신체단련 사격·격술 등이 40%, 사진 운전 등 기술교육이 20%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구체적인 교육과정은 우선 일상적인 정치사상교육 즉 당과 수령을 위해서는 자신의 육신을 초개와 같이 버릴 수 있다는 사고의식을 가진 친위전사로 교육시키고 있다. 
    실제로 김정일은 대남사업을 장악하면서 ‘자폭론’을 교과목에 집어넣도록 했다. 전투원이든 공작원이든 ‘자폭론’을 배워야 한다. 그 예로 ‘철학교재’를 들 수 있다. 전체 5장 21절로 된 이 책은 1장-철학이란 무엇인가, 2장-주체의 혁명적 세계관, 3장-주체의 혁명적 수령관, 4장-주체의 혁명적 인생관, 5장-혁명적 자폭관으로 되어 있다. (출처: 손광주 저, 김정일 리포트-북한 최고 권력자 김정일의 모든 것) 

    군사대학과 봉화정치대학에서는 이 같은 내용을 1학년 때부터 배운다. 이 과정을 거치고 나면 정보원들은 자폭을 ‘옆집에 물 길러 갔다 오는 정도’로 여기게 된다고 한다. 군사훈련의 내용은 기초적인 훈련을 단련하기 위해 태권도는 평균 3∼4단 이상이며, 수영은 먹을 것만 있으면 바다나 강에서 수십 시간 이상은 살 수 있도록 육성하고 있다. 또 하루 저녁 약 1백50리 정도는 지형지물에 관계없이 5∼6시간 내에 도달할 수 있어야 한다.

     군사전술 및 비합법 훈련의 내용으로서 육상에서 이루어지는 유격전술훈련, 습격, 매복, 암살, 납치훈련, 전투조훈련, 각종 군사 장비를 다루는 법을 배우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격전술훈련은 유사시 후방에서 제2전선을 구축하는 산악 및 도시 게릴라전법을 말한다. 

    습격훈련은 일정한 목표물을 불시에 매복 기습하며 암살 납치 또는 소규모 인원으로 다수를 테러하는 것이다. 전투조훈련은 2∼3명이 한 개조를 구성해 중요시설폭파, 군사정찰, 고정간첩간의 연락공작 및 일정한 장소까지의 안내와 공작장비지원, 암살, 납치 등의 훈련을 말한다. 각종 군사 장비를 다룬다는 것은 육상에서 움직이는 각종 수송수단을 다루는 법, 아주 작은 권총에서부터 비반충포까지 발사할 수 있는 등의 기술을 말한다. 

    해상전술훈련에는 항해전술, 엔진운전법, 통신, 수중폭파, 수중잠수훈련 등이 있다. 항해전술훈련이란 배가 정확한 지점에 도달할 수 있는 항법, 즉 군사학적 측면을 접한 항해사 기술과 선박엔진 운전법 선박통신을 자유자재로 교신하여 단독으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보통 5톤급 이상 2백 톤급 이하의 선박은 군사대학을 졸업한 사람이면 누구나 단독으로 운전할 수 있는 수준이다. 

    한편, 김정일은 대남사업 지휘에 발을 들여놓은 79년 이후 전투원들에게 정신력과 함께 강인한 체력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이 해에 전투원 3명이 남한에 침투했다가 나무꾼에 발각되어 10여 일간 국군 포로망에 걸려 있었던 일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 3명은 그 포위망을 뚫고 무사히 북한으로 돌아갔다.

     
    이들 전투원 3명을 접견한 자리에서 김정일은 “이번에 동무들이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당에 대한 충성심이 높았고, 또 무쇠 같은 체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라며 “전체 전투원들이 훈련을 강화해 하룻밤에 40-80km를 돌파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 때부터 전투원들은 매일 20kg이상의 모래 배낭을 메고 혹독한 행군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공작원들에게는 이 훈련을 시키지 않았다. 고정간첩 활동을 주로 하기 때문에 정보활동 환경 자체가 자유스러운 사회생활이기 때문이다. 또 주요 활동도 자료수집이나 인물 포섭이어서 행군을 굳이 해야 할 이유도 없었다. 그러나 84년부터 이들도 행군을 해야 했다. 

    이유는 그해 일어난 사건 때문이었다. 그해 가을, 네팔 등지에서 활동하던 북한공작원이 노출되어 여권과 공작금을 챙겨 나오지 못한 채 북한으로 비상복귀하게 됐다. 이들은 40일간 온갖 고생을 다 겪으며 중국국경 등 3개국 국경을 행군으로 돌파하고 북한에 복귀했다. 이들은 이후 영웅으로 부각되어 김정일을 접견하게 됐다.

     이 자리에서 김정일은 공작원도 행군을 강화하도록 지시했다. 이 때부터 북한의 공작원들은 물론 해외로 드나들면서 잠시 쉬는 초대소 인원들에 이르기까지 매일 4km, 주말 20km, 월말 40km미터씩 뛰게 됐다. 이처럼 군사대학에서 혹독한 교육을 마친 북한의 대남 공작요원들은 100% 작전부 등에 취직한다. 건강이 나빠 퇴교한 학생도 워낙 신분과 실력이 좋기 때문에, 각 군(郡)에 있는 조선로동당 군당 위원회 지도원으로 채용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필재 기자 spooner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