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甲寺 가는 길 

     갑사(甲寺) 가는 길엔 아직 단풍이 채 들지 않았다. 간혹 빨간 단풍나무가 숲 사이로 살짝 보이긴 했지만 산야가 온통 붉게 타오르려면 한 보름은 더 있어야 할 모양이었다. 공주(公州)서 갑사까지는 넓직한 고속화 도로가 시원히 뚫려 있었다. 옛날 거길 가려면 먼지가 뽀얗게 날리는 비포장 도로를 털털거리는 버스로 한 나절 씩 걸려야 했다.  

     6.25 후 좌익 우익 하는 통에 멸문지화(滅門之禍)를 입고 풍비박산 된 우리 류(柳)씨집, 외가 윤(尹)씨집, 진외가 소(蘇)씨집을 생각하면 참으로 가기 싫은 어릴 적 성묘길이었다. 찢어지는 가난, 황량한 시골 풍경, 오나가나 상처투성이 가정들, 고통스런 삶으로 일그러진 얼굴들, 그리고 여행이 즐거움 아닌 고생길이었던 그 시절 공주행(行)이었기에 나는 늘 마지못해 할머니(蘇씨)한테 등 떠밀리 듯 하며 그 길을 가곤 했다.  

     그런데 이번엔 모든 게 달라져 있었다.
    친족, 외가, 진외가를 막론하고 이 땅의 가정들이 이제는 모진 세월들을 뒤로 한 채 악몽의 가위눌림에서 깨어나 있었다. 시골 마을은 이미 그 때 그 시절 시골 아닌 마치 공원 안의 전원주택 단지 같았다. 마을로 들어가는 모든 도로가 정갈하게 포장되어 있었고, 개울 곳곳엔 예쁜 돌다리가 놓였다.

    경황없던 그 시절엔 있어도 보이지 않던 좌청룡 우백호가 마을을 안온하게 감싸고 있는 정경이 비로소 처음인 듯 눈 안에 들어왔다. 지붕엔 파란색 빨강색 기와가 입혀져 있었고, 공주 중심가 커피숍에서는 발랄한 남여 대학생들이 깔깔거리며 틈새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우리 내외 역시 이제는 아들 며느리 손자 손녀를 거느린 여유 있는 귀성객이었다.  

     고조부 내외분, 증조부 내외분, 조부 내외분 앞에 절을 하면서 말이 저절로 튀어 나왔다. "'대종손' 녀석(8살) 데리고 왔습니다. 훗날엔 이놈이 올 겁니다" 성묘를 마치고 내친 김에 큰 며느리 계획에 따라 무령왕릉, 공주박물관, 공산성을 거쳐 갑사로 갔다.  

     갑사 경내는 한 폭의 선경(仙景)이었다. 아름드리 노송, 단풍나무, 목백일홍, 대나무가 어우러진 숲속, 청류(淸流)가 굽이굽이 휘돌아 감는 계룡산 자락 갑사 대웅전에선 한창 불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천주교 영세를 받은 '대종손' 놈이 법당 안에 냉큼 올라가더니 108배를 시작하는 게 아닌가? 한 열 차례 했을까 그놈이 뜰로 내려 왔다. "그래, 신통하다. 잘했다"며 등을 두드려 주었다. "산꼭대기에 오르는 길이 다를 뿐, 목적지는 같지 않겠느냐? 남의 집에 오면 그 댁 주인께 그렇게 인사를 드리는 법이다" 할애비 마음 속 말이었다.  

     절에서 내려오면 이내 진외가 소씨 집성촌이었다. 옛날 소씨 댁 총각 형들이 우리 집에 와 묵곤 했다. "그랬시유~" "저랬시유~" 하는 충청도 말을 흉내 내며 악동 노릇으로 어지간히 짓궂게 괴롭히던 그들은 이제 거의 고인이 되었다. 혹시 남아 있는 소씨들이 있을까 궁금하기도 하고 야릇한 향수도 느껴서 계룡면 갑골 마을로 살살 들어가 보았다. 집들은 초가집에서 양옥집으로 바뀌었지만 마을 앞 저수지며 마을의 구조는 그대로였다.  

     마을 안쪽 둔덕 위의 집 앞마당에서 40대 부부로 보이는 남여와 80객은 족히 돼 보이는 할머니가 타작을 하고 있었다. 차에서 내리니 웬 선글래스를 낀 외지인 내외와 40대(아들)를 본 할머니가 불안한 듯 쳐다보았다. 낯선 선글래스 외지인의 돌연한 출현-그 할머니한테는 이런 방문객은 어쩌면 남편과 아들을 잡으러 오던 무서운 사람들의 악몽을 연상 시켰는지도 모른다.  

     열 살 쯤 됐었나. 할머니가 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내가 그 때 12살이었어. 아, 낮엔 관군이 들어와서 밥해내라 하고, 밤에는 동아꾼(동학군)이 들어와서 밥해내라 하는 기여. 안 해 줄 수 있나? 그러면 관군이 또 들어와서 왜 동아꾼들 밥해줬느냐고 닦달이여" 아무 것도 모르는 민초들은 토벌대와 빨치산 틈바구니에서도 그런 세월을 살았다. 그리고 6.25 때도 이래 죽고 저래 죽고, 이래서 잡혀가 몽둥이질로 골병들어 죽고, 저래서 끌려가 이름 모를 전장에서 총 맞아 죽고. 동네 아는 이웃이 계룡산 연천봉에 봉화 집히라 하길래 별것 아닌 줄로만 알고 불붙이고 내려오다 잡혀서 맞아 죽고...마을에는 그 자손들이 여전히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윽고 나뭇가지를 한 아름 메고 돌아온 마을 최연장자. “여기가 우리 할머니 친정이에요”하고 말을 건네기가 무섭게 그들은 이내 나를 알아보는 게 아닌가?
    “류근일 씨?” 하며 내 손을 덥썩 잡았다. 나를 알아보았다기보다는 내 선친을 알아 본 것이었다. “아, 그때(1950년 5.30 총선) 아버님 선거 포스터 사진을 우리가 여태 보관하고 있지...” “참 잘 생기시고 체격이 크시고, 공주에선 인물이셨지” “조선일보에 끌 쓰더니 요샌 안 쓰더구먼...” 그들의 말에는 감개무량 같은 게 묻어나 있었다.  

     피하려야 피해 갈 수 없는 핏줄의 인연과 가족사의 중압, 그리고 서로 얽히고 섥히는 사회적 관계가 나를 향해 죄어옴을 느꼈다. 필리핀을 갈 때마다 “아, 여기선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않아서 참 좋다“ 하던 나의 ‘자유’와 ‘도피’는 적어도 그 순간에만은 한낱 물거품이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는 막내아들의 4살배기 딸애 얼굴을 힐끗힐끗 쳐보았다. 저 티 한 점 없는 천사의 얼굴. 할애비 내외, 애비 에미, 3촌들, 사촌들에 둘러싸인 채 불행이 뭔지 모르면서 마냥 좋아만 하는 오늘의 내 3세들. 그 아이들의 해맑고 예쁘고 밝은 표정을 보면서 나는 아련한 비장감 같은 것을 느꼈다.

    “그래, 얘들아, 너희들이 지금처럼 살게 해주려고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우리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우리 내외 3대가 그토록 오랜 세월 그렇게 고심참담하게 살았던가보다. 너희들만은 우리처럼 살지 않게 해 주려고... ”산 자여 우리를 따르지 말아라“ ”산 자여 우리를 따르라고 하는 사람들 말일랑 절대로 듣지 말거라, 응?“ 혼자 속으로 읊조렸다.  

     거긴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 고조 할아버지 고향이지 내 고향은 내가 태어나 자란 서울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그런데 고향은 역시 아버지 고향이 내 고향인가? 나무는 뿌리에서 자란다는 사실을 결국은 실감하게 된 성묘길이었다. 나도 별수 없이 늙었다는 이야기일까? 서울에서는 수입 꽃에 밀려난 옛날 한국 꽃 백일홍, 채송화를 만날 수 있었던 성묘길-조선조 초기에 공주로 이주하신 조상님들, 그래서 사화(士禍)와 양난(兩亂)과 망국(亡國)과 식민지와 6.25 참극과 산업화-민주화를 겪은 옛 세대와 오늘의 행복한 내 3세들을 인연과 과보(果報)의 한 줄기 흐름 속에서 바라보게 한 잔잔한 감회의 성묘길이었다.  

    <류근일 /본사 고문, 언론인>

    류근일의 탐미주의 클럽(cafe.daum.net/aestheticismclu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