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朴正熙-全斗煥 사이 尹必鏞 장군   
     1973년 수경사령관이던 그가 측근들과 함께 숙청된 사건은 朴正熙 정권 18년의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뉴데일리 보도: 尹必鏞 전 수도경비사령관이 24일 별세했다. 향년 83세. 7년 전 식도암 수술을 받은 尹 전 사령관은 최근 지병이 악화돼 병원에 입원한 뒤 이날 0시15분께 세상을 떠났다. 1949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尹 전 사령관은 최고회의 의장실 비서실장 대리(1961)와 연대장(1962), 육군본부 관리참모부 분석과장(1963), 육군 방첩대장(1965), 派越 맹호부대 사단장(1968), 제3대 수도경비 사령관(1970)을 거쳐 1973년 육군 소장으로 예편했다. 1980년 제4대 한국도로공사 사장을 맡았고 1982년 韓美 친선회 이사, 1987년 한국전매공사 이사장, 1989년 한국담배인삼공사 이사장을 역임했다.
     
     故人은 장성 시절, 朴 대통령의 신임을 받고, 정규 육사 출신 장교들을 후원하였다. 1973년 수경사령관이던 그가 측근들과 함께 숙청된 사건은 朴正熙 정권 18년의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권력암투 속에서 희생된 尹 장군은 제5공화국 때 잠시 公職을 맡았을 뿐 최근 20여년간 공개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다.
    필자의 '朴正熙 전기' 중 윤필용 사건을 다룬 대목을 소개한다.  
     
     ◆孫永吉과 全斗煥·盧泰愚
     1973년 1월 7일.
     
     朴正熙 대통령의 면담일지를 읽다 보면 재미있는 대목을 발견하게 된다. 권위주의 정권下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통령이 누구와 만나는가이기 때문이다.
     
     1973년 1월 7일은 일요일인데, 이날 朴 대통령은 首警司(수경사) 참모장 孫永吉(손영길) 준장과 공수특전단장 全斗煥(전두환) 준장을 청와대 집무실에서 만났다. 면담기록엔 낮 12시 24분부터 오후 2시 41분까지로 되어 있다. 아마도 점심 식사를 함께 했을 것이다. 朴 대통령이 40代 초반의 젊은 준장을 이렇게 대우하니 이들이 軍內(군내)에서 하나회를 만들어 큰 세력을 형성할 수 있었다.
     
     孫·全 두 준장은 육사 11기 출신이었다. 孫 준장은 위관장교 시절 朴正熙 장군의 전속부관으로 따라다녔고, 全 준장은 최고회의 의장비서실에서 근무했다. 朴 대통령은 장군 시절부터 정규육사 출신 장교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그는 한국군의 미래가 이들에게 있다는 이야기를 해주면서 격려했다.
     
     盧泰愚(노태우) 前 대통령은 1955년에 육사를 졸업하고(11기) 朴正熙 준장이 사단장으로 있던 5사단에 배치되었다.
    朴 사단장이 사격장 공사를 지휘하던 그를 불러 점심을 함께 했다.
    부대에 돌아가려고 경례를 하는 盧 중위에게 朴 사단장이 “내가 바닷가로 오리사냥을 가는데 같이 가자”고 했다. 盧 중위는 “저는 임무가 있어 못 가겠습니다”라고 했다.
     
     “무슨 임무?” 
     “사격장을 닦다가 왔습니다. 그래서 못 가겠습니다.” 
     “할 수 없지. 잘 가게.”
     
     盧 중위가 돌아서는데 朴 사단장이 다시 부르더니 “내가 사단을 떠나게 되었어”라고 했다. 
     “어디로 가십니까?” 
     “아마도 陸大로 갈 거야.” 
     盧 중위는 착잡했지만 할 말도 없어서 “잘 가십시오”하고 경례를 붙이고 나왔다.

    5·16 군사혁명 뒤 盧 소령을 만난 朴 의장은 “야 임마, 그때 내가 서운했다”고 했다. 
     
     孫·全 두 사람은 일찍부터 정치장교의 역할을 했다. 1963년 2월 18일 朴正熙 의장이 민정불참-원대복귀를 선언하자 두 사람은 동기생들과 함께 장충동 의장 공관을 찾아갔다. 이들이 응접실에서 기다리는데 陸英修 여사가 나왔다.
     
     “이 양반이 일을 저질러 놓고 다시 軍에 돌아가겠다니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이미 내친 발걸음인데 정치를 하셔야지요. 여러분들이 생각을 바꾸시도록 건의 좀 해주세요.”
     
     청년장교들이 그런 건의를 하자 朴 의장은 “여러분의 뜻을 잘 알아요. 그러나 정치는 그렇게 하는 게 아니야”라고 했다. 민정불참 선언이 하나의 전술이라는 말투였다.
     
     朴 대통령은 全斗煥이 중심이 되어 만든 ‘하나회’를 후원했다.
    정보부가 軍內 사조직을 소탕해야 한다는 건의를 하자 방첩대를 시켜 형식적인 조사를 하고 끝내도록 했다. 육사 11기의 선두주자였던 全·孫 두 사람은 중령 시절 청와대 경호를 맡은 수경사 30대대장으로 근무했다. 孫永吉이 먼저였고, 그가 全斗煥을 후임으로 추천했다. 朴 대통령은 두 사람을 가끔 식사자리에 초청하기도 했다.
     
     朴 대통령이 키운 하나회 중심의 정규육사 출신들은 그 報恩(보은)을, 10·26 사건 이후에 하게 된다. 全斗煥 국군보안사령관은 합수본부장으로서 朴 대통령 시해범 金載圭(김재규) 일당을 단죄하는 것이 서거한 朴 대통령에 대한 의리라고 믿었다. 이들은 국가원수 시해사건은 성역 없이 수사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鄭昇和(정승화) 계엄사령관까지 연행하려다가 12·12 사건을 일으키고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 정권을 향해 진격했다.
     
     朴 대통령이 자신의 친위세력으로 키운 하나회와 정규육사 출신 장교단은 10·26 사건 이후에 유신이 매도당하는 분위기에서도 유신의 당위성을 확신하고 있었다. 이들은 朴正熙의 죽음을 민주화의 好機(호기)로 보고 있었던 정치인들과는 달리 그의 죽음을 국가안보의 위기라고 해석했다.
     
     정규육사 출신 장교단에 대한 朴 대통령의 오랜 투자는 그의 死後 격하를 막았다.
    朴 대통령이 키운 하나회 출신들이 그의 사망 후 13년간 한국을 이끌고 가면서 朴正熙에 대한 흠집내기를 잘 막았기 때문이다. 제5공화국 시절 안기부와 문공부의 중요한 일 중의 하나는 <月刊朝鮮>과 <신동아>에 朴 대통령에 대한 폭로기사가 못 나오게 막는 일이었다. 
      
     ◆尹必鏞 계열 숙청
     1973년 4월 28일.
     
     朴正熙 대통령을 가장 오랫동안 모신 측근이자 군부內 실력자이던 尹必鏞 장군이 육군보안사에 연행된 것은 1973년 3월 9일, 정식 구속된 것은 3월 26일, 軍 검찰에 의해 기소된 것은 4월 17일, 비공개 공판 끝에 육군보통군법회의에서 선고가 있었던 것이 4월 28일이었다.
    尹必鏞 소장, 孫永吉 준장 등 10명의 장교들이 군복을 입은 차렷 자세로 선고를 받는 사진이 이 날짜 석간에 실리면서 그들의 ‘죄상’이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그 소스는 판결문과 국방부 장관 담화문이었다.
    내용은 尹 장군 등의 부정·부패적 사생활, 軍內 사조직 운영을 중점 부각시키는 것이었다. 판결문은 법률적 판단을 한 내용이 아니라 ‘치부와 엽색행각에 치달음으로써 反유신적 죄악을 자행했다’는 식의 인신공격적인 규탄문이었다.
     
     <대한일보> 사장 金連俊(김연준) 씨의 수재의연금 횡령사건에 대한 수사를 尹 장군이 압력을 넣어 중단시켰다는 대목이 눈길을 끌었다. 그 얼마 뒤 金 씨는 횡령 혐의로 구속되고(나중에 무죄 판결을 받음) <대한일보>는 폐간되었다.
     
     이날 징역 15년에서 2년까지의 유죄선고를 받은 사람은 尹必鏞 소장(징역 15년)과 수경사 참모장 孫永吉 준장(육사 11기. 징역 15년)을 비롯하여, 육군본부 진급인사실 보좌관 金成培 준장, 육본중앙수사단장 池聖漢 대령, 26사단 연대장 權翊鉉 대령(나중에 무죄 확정. 육사 11기. 뒤에 민정당 대표), 육본 진급인사실 辛再基 대령(육사 13기. 뒤에 민자당 의원) 등 10명이었다.
    기소는 되지 않았으나 尹必鏞 계열로 알려졌던 장교들 30여 명이 전역당했다.
     
     이들은 盧泰愚 대통령 시절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을 지냈던 安敎德(안교덕·육사 11기)을 비롯하여, 鄭東喆(정동철·육사 12기. 506보안대장), 裵命國(배명국·육사 14기. 청와대 민정비서관실 파견. 뒤에 민자당 의원), 朴正基(박정기·육사 14기. 뒤에 韓電 사장), 金相球(김상구·육사 15기. 뒤에 민자당 의원), 鄭奉和(정봉화·육사 18기. 수경사령관 비서실장) 등이었다.
    이때 숙청되었던 군인들이 5공화국 때 重用(중용)되는 경향이 있었다.
     
     尹 장군 계열의 숙청은 정보부로도 번져 李厚洛 부장의 고향(울산) 후배인 李載杰 감찰실장이 구속되었고 30여 명이 해직되었다. 李 실장은 동향인 孫永吉 수경사 비서실장과 연락하여 사이가 좋지 않던 李 부장과 尹 소장을 친하게 만들어 준 것이 화가 되었다. 이 사실은 이 사건의 핵심적 의미를 담고 있다.
     
     尹必鏞 계열의 숙청은 朴正熙 대통령이 갖고 있던 권력자 고유의 의심과 불안을 반영한다.
    그는 전해의 7·4 공동선언 이후 李厚洛 정보부장의 대중적 인기가 높아지는 것을 주시하고 있었다.
    李 부장은 朴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제2의 5·16 쿠데타’인 10월 유신도 기획, 실행했고 많은 여당 국회의원 후보를 추천하는 등 새로운 정치판을 짜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1973년 초 李厚洛 부장의 영향력이나 그에 대한 대통령의 신임은 절정에 달해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위기의 씨앗이 자라고 있었다. 朴 대통령이 내려다보니 尹必鏞 수경사령관까지도 李厚洛 부장과 가까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朴 대통령은 권력의 4대 파수꾼인 정보부장, 육군보안사령관, 수경사령관, 경호실장을 서로 견제시켜 놓음으로써 권력의 안정을 기하는 방식을 애호했다.
    尹必鏞 장군도 李厚洛 부장에 대한 좋지 않은 정보를 朴 대통령에게 많이 올렸다. 그를 잘라야 한다는 건의도 했다. 그런데 尹 장군이 朴 대통령에게 올린 보고서 내용이 李 부장에게 넘어가는 것이었다. 李 부장이 尹 장군에게 전화를 걸어 “내가 그렇게 못마땅하냐”고 말한 적도 있었다. 尹 장군은 李 부장에 대한 朴 대통령의 신임이 굳다는 판단을 한 뒤에는 그에 대한 견제役을 회피했다.
     
     尹 장군은, 李 부장이 평양에 들어가서 金日成을 만나고 온 뒤엔 그에 대한 평가도 달리 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李 부장과 尹 장군 두 사람의 측근이 나서서 권부의 2大 실세를 친하게 만들고 있었다. 朴 대통령으로서는 심기가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1972년 10월 17일의 유신 선포와 동시에 계엄령이 선포된 직후 李厚洛 정보부장은 요인들을 초대하여 저녁 식사 자리를 마련했다. 尹必鏞 수경사령관도 초청되었다. 尹 장군이 그 자리에 가보니 李 부장 이외에 朴鐘圭 경호실장과 대기업 회장 몇 명이 와 있었다. 尹 장군은 “계엄下인데 두 사람 이상이 모이면 내 허가를 받아야 합니다. 이건 불법집회입니다”라고 농담을 했다.
     
     李 부장은 “그래서 우리가 尹 장군을 모신 것이 아닙니까. 계엄업무로 고생하시는데 우리가 격려금이라도 내놓아야겠습니다”라고 했다. 李 부장은 참석자들의 지갑을 털게 해서 수백만 원을 몽땅 尹 장군에게 건네주었다. 이날 尹장군은 軍 선배인 李 부장을 “형님”이라고 불렀다. 尹 장군은 또 李 부장에게 “앞으로 구성될 국회에는 軍 출신들이 많이 들어갈 수 있도록 해주시오”라는 부탁도 했다.
     
     “이제 어차피 계엄정치를 하게 되었으니 군인이 정치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러려면 유정회 의원의 3분의 1을 장군, 영관, 위관급 출신자들로 메워야 합니다. 태국처럼 군인들이 국회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렇게 朴 대통령한테 건의해 주시오.”
     
     李 부장은 “각하께 보고하여 30석 정도는 마련해 보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尹 장군이 나중에 들으니 이런 보고를 받은 朴 대통령이 “건방진 놈들, 지들이 뭔데 국회의원을 마음대로 고르려고 해”라면서 화를 냈다는 것이었다. 이런 모습들을 朴 대통령 편에 서서 지켜보던 이가 朴鐘圭 경호실장이었다.
     
     尹必鏞 사건의 단초가 된 뉴코리아 골프장에서의 申範植 사장의 提報(제보)도 朴鐘圭 실장이 미리 그 이야기를 듣고 자연스럽게 朴 대통령에게 전달될 수 있도록 그 자리를 마련했던 것으로 보인다.
     
     尹必鏞 씨는 자신이 거세된 경위에 대해서는 이렇게 설명했다.
     
     “1972년 말인가, 1973년 초인가 하루는 朴鐘圭 경호실장이 저를 보자고 하더니 전날 뉴코리아 골프장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골프 한 코스를 돈 뒤 커피숍에서 朴 대통령, 申範植 당시 <서울신문>사장, 朴鐘圭 경호실장이 담소를 하고 있었다. 申 사장이 느닷없이 이런 말을 꺼냈다는 것이다.
     
     “각하께서 연만하시니 더 노쇠하시기 전에 후계자를 키우셔야 한다는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李厚洛 부장이 후계자로 좋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朴 대통령은 “미친 놈들, 내가 아직 노망하려면 멀었는데”라고 대수롭지 않게 받았다.
    세 사람은 다시 골프장으로 나갔다. 골프를 다 치고 필드에서 나왔을 때 朴 대통령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그는 申 사장에게 무섭게 물었다.
     
     “아까 그 말 말이야, 누가 그런 소릴 했어? 李厚洛이가 그랬나?”
     
     朴鐘圭의 설명에 따르면 申 사장은 그 자리에 꿇어앉았다고 한다.
     
     “이름을 못 대겠습니다.”
     
     朴 실장이 권총을 뽑아 “이름을 대라”고 위협했다는 것이었다. 申 사장은 “尹必鏞 장군이 그럽디다”라고 했다는 게 朴 실장의 설명이었다. 尹 사령관은 그 말을 듣자마자 피가 역류하는 듯하여 전화기를 들고 申사장을 부르려 했으나 朴 실장이 말렸다. 朴 실장은 “이 문제는 나한테 맡겨 주십시오”라고 했다.
     
     “제가 형무소에 있으면서 아무리 생각해도 왜 申 씨가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 이해가 안 돼, 어떤 추리까지 해 보았습니다. 그때까지 申 씨는 저와는 가깝고 李 부장과는 사이가 아주 나빴어요. 그런데 7·4 공동성명과 유신 이후에 李 부장의 힘이 세어지니까 혹시 李 부장이 후계자가 되면 어쩌나 하는 공포심에서 직접 각하의 의중을 시험해 보고자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닐까….
     
     그러다가 무섭게 추궁하니까 다급해서 내 이름을 갖다 붙인 것이고…. 朴 대통령께서는 제가 그런 말을 했다고 하면 가볍게 넘겨 버릴 것이란 계산에서 말입니다. 그전에 申 씨와 함께 한 술자리에서 노망 운운하는 이야기가 오간 적은 있었습니다.”
     
     尹 씨에 따르면 유신 선포 뒤의 어느 날 申 씨가 尹 사령관, 鄭韶永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 金詩珍 민정수석비서관, 육군본부 池聖漢 대령 등을 이태원 식당으로 초대하여 대접을 했다. 이 자리에서 申 씨는 대강 이런 뜻의 말을 했다는 것이다.
     
     “각하께 정말로 충성하는 분이라면 ‘각하께서 연만하셔서 노쇠하시기 전에 청와대를 물러나십시오. 우리가 모시겠습니다. 그러면 영원한 대통령이 되십니다’ 이렇게 말씀드려야 합니다. 그런 말씀을 하실 분은 尹 장군뿐이십니다.”
     
     尹 사령관은 “술집에서 당치도 않은 말씀하십니다”면서 입을 막았다고 한다. “그런데 내가 조사받을 때 보니 申 씨가 한 말은 내가 한 말로 돼 있고, 내가 한 좋은 말은 전부 거두절미하여 오해하기 좋게 만들어 놓았더군요.”
     
     尹必鏞 사건의 발단이 되었다는 뉴코리아 골프장에서 있었던 일은 언제인가? 기자가 입수한 朴 대통령 업무일지 1972년 11월호분을 찾아보았다. 이 무렵은 유신조치에 따른 비상계엄 기간임에도 朴 대통령은 골프장에 자주 나갔다. 申範植 <서울신문> 사장이 말동무로 따라다녔다.
     
     11월 5일 한양 컨트리 클럽에서 대통령, 朴경호실장, 申範植 회동.
     
     11월 12일(일) 대통령, 경호실장, 申範植이 뉴코리아 골프장行(이것이 朴 실장이 말한 문제의 회동으로 추정되나 1973년 초의 일이라는 주장도 있다).
     
     11월 18일에도 뉴코리아 클럽에서 골프.
     
     흥미로운 것은 이 무렵 朴 대통령이 尹必鏞 수경사령관은 거의 만나지 않고 육군보안사령관 姜昌成 소장을 자주 청와대로 불러 만나고 있었다는 점이다.
     
     尹 장군에 대한 감시역인 姜 장군을 朴 대통령이 자주 만난다는 것은 尹 장군에 대한 신임이 약해졌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특히 유의할 대목은 11월 12일의 뉴코리아 골프장 회동 직후 姜昌成 사령관의 청와대 출입이 부쩍 잦아졌다는 점이다.
     
     姜昌成 보안사령관
     1972년 11월 14일 오전 朴 대통령은 姜 장군을 불러 약 30분간 요담했다. 그 이틀 전의 골프 회동 때 申範植 사장의 提報가 있었다면 이날 朴 대통령은 姜 장군에게 수경사령관과 李厚洛 부장의 관계에 대한 뒷조사를 지시했을 가능성이 크다.
     
     11월 18일에도 朴 대통령은 姜 장군을 초치하여 약 한 시간 동안 이야기했다. 그 이틀 뒤 姜昌成 장군은 또 朴 대통령에게 불려와 약 40분간 요담했다. 11월 29일에도 姜 장군은 朴 대통령을 만나 35분간 軍內의 동향을 보고했다. 尹 장군에 대한 첩보수집 결과도 알렸을 것이다.
     
     尹必鏞 사건의 진행과정에 대한 각자의 주장을 검증하려면 1973년 3, 4월의 朴 대통령 업무일지를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朴 대통령은 1972년 11월 뉴코리아 골프장에서 申範植 <서울신문> 사장으로부터 尹必鏞 수경사령관의 불순한 언동에 대해서 보고를 받은 지 넉 달 만인 1973년 3월 8일에 姜昌成 육군보안사령관을 불러 수사를 지시한다.
     
     이 넉 달 동안 朴 대통령은 姜 장군, 朴鐘圭 경호실장, 그리고 軍內의 다른 루트를 통해서 尹 장군에 대한 첩보를 보고받고 숙청을 결심하기에 이른 것이다. 尹 장군의 발언뿐 아니라 李厚洛 정보부장과의 밀착이 수사 지시의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
     
     1973년 3월 8일 낮 12시 7분에 朴 대통령은 姜昌成 소장을 초치하여 12시 35분까지 28분간 尹 사령관에 대한 수사지시를 내렸다. 姜 장군은 “朴 대통령이 나에게 수사를 지시하면서 ‘全斗煥 준장에게도 물어 봐’라고 말했다”고 기억한다. 朴 대통령은 한 장짜리 보고서를 건네주면서 “직위 고하를 막론하고 철저히 조사하라”고 강조했다.
     
     그 보고서는 申 사장의 제보가 요약된 것이었다. 姜 장군이 대통령 집무실에서 물러나오는데 朴鐘圭 경호실장이 들러 주었으면 좋겠다는 연락을 해왔다. 경호실장 방에 들렀더니 朴 실장은 대단히 흥분하여 “모조리 잡아 넣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姜昌成 보안사령관은 수사관들에게 조사를 지시하고, 별도로 수도경비사 소속의 지휘관 몇 명을 불러서 “어떤 일이 있더라도 수사에 저항하지 말고 협조해 달라”고 당부, 사전조치를 취했다는 것이다. 姜 사령관은 尹必鏞 소장에게 전화를 걸어 “퇴근길에 한 번 들러 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두 사람은 육사 8기생으로 동기생인데다가 장성 진급도 같은 날에 했다. 姜 씨가 중앙정보부 차장보와 육군 보안사령관을 거치는 동안 수도경비사령관인 尹 소장과는 업무상으로도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왔었다. 姜 소장은 尹 소장에게 수사에 착수했음을 알렸다. 尹 소장은 모함이라고 펄쩍 뛴 뒤 “모든 것을 姜 사령관에게 맡길 것이니 선처해 달라”고 했다고 한다.
     
     姜 소장은 “이 문제를 푸는 길은 각하께 찾아가 사과하는 것뿐이다”고 말했다고 한다. 尹 장군은 3월 9일 해임되고 보안사로 연행된다.
     
     바로 이 무렵 池聖漢 육군본부 중앙수사단장(대령)에게 金詩珍 정보비서관이 전화를 걸어왔다. 金 비서관은 떨리는 목소리로 “빨리 내 방으로 오라”고 했다. 池聖漢 대령은 청와대 비서실에서 현역으로 근무했고 朴 대통령의 신임도 두터웠다. 池 대령이 金 비서관을 찾아갔더니 “그날 우리 尹 장군 하고 저녁 먹은 날이 며칠이지?”하고 물었다.
     
     池 대령은 “작년 연말입니다”라고 했다. 申範植 <서울신문> 사장의 부탁으로 이태원동 식사 자리를 만든 것이 池 대령이었다.
     
     金 비서관은 그 몇 시간 전에 朴 대통령에게 불려갔다는 것이다. 朴 대통령은 대뜸 “내가 너를 신임하여 그 자리를 맡겼는데 못된 자들 하고 돌아다니면서 술이나 마시고 나를 두고는 영감이니 노망이니 뭐니 그 따위 소리만 한다면서. 너도 그 자리에 있었다면서?”
     
     朴 대통령이 말한 그 자리란 尹必鏞, 申範植, 鄭韶永, 金詩珍, 池聖漢이 만났던 이태원동의 식사자리였다. 金 비서관은 “각하, 그 자리에서는 그런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했다. 朴 대통령은 “이 친구야, 더 알아봐”라고 했다.
     
     池 대령도 그 식사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朴 대통령에게 불경스러운 이야기는 나온 적이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池 대령은 청와대에서 바로 수도경비사령부로 직행했다. 尹必鏞 장군은 장교식당에서 식사 중이었다. 池 대령이 “그날 申範植 사장과 만났을 때 무슨 말씀을 하신 겁니까”라고 물었다. 尹 사령관은 “허, 왜 자꾸 그것 가지고 이야기가 있는지 모르겠네. 얼마 전에도 朴鐘圭 경호실장이 나한테 그것을 물어와서 내가 다 이야기해 주었는데…”라고 했다.
     
     尹 사령관은 이런 부연설명을 했다.
     
     “그날 식사자리에서 나와 申 사장이 화장실에 다녀오다가 홀의 소파에 앉아 이야기를 하던 중 그 이야기가 나왔다. 申 사장과 ‘이제부터는 朴 대통령이 건강하셔야 한다, 각하의 판단이 흐려지시면 물러날 시기를 우리가 알려드려야 한다’는 정도의 이야기를 했다. 그게 전부인데 왜 문제가 되는지 모르겠다.”
     
     池 대령은 다시 申範植 <서울신문> 사장을 찾아가 물었다. 申 사장도 “맞아, 맞아. 尹 장군이 말한 게 맞아”라고 했다. 안심한 池 대령은 金詩珍 정보비서관을 찾아가 자신이 파악한 내용을 보고했다. 두 사람이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 鄭韶永 경제수석 비서관이 들어왔다. 이태원동 식사모임의 동석자였던 그도 조금 전에 朴 대통령에게 불려갔다는 것이다.
     
     朴 대통령은 “자네도 그 자리에서 날 욕했다면서”는 취지로 이야기했다고 한다. 鄭 수석은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고도의 모략입니다”라고 말했다. 鄭韶永 수석이 대통령 집무실에서 물러나오는데 朴 대통령이 전화 버튼을 누르더니 “姜昌成 보안사령관 대줘!”라고 말하는 게 등 뒤로 들렸다고 한다. 이 말을 들은 金詩珍 비서관은 그 자리에서 姜昌成 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金詩珍 비서관이 ‘각하께서 오해하고 있다’는 취지로 이야기했더니 姜 사령관은 이렇게 말했다.
     
     “무슨 말씀입니까. 尹 사령관이 불경스런 이야기를 했다는 것을 申範植 사장이 다 시인했습니다. 보안사에서 조사했고 그때 申範植 사장이 그렇게 진술했습니다.”
     
     金詩珍 비서관은 얼굴이 하얗게 되더니 “申 시장이 시인했대. 나도 이제 그만둬야겠어”라고 했다. 池聖漢 대령은 “가만 계십시오. 제가 한번 더 갔다 오겠습니다”라고 말한 뒤 申範植 사장을 다시 찾아갔다. 외투 속에 녹음기를 숨기고 가서 대화를 녹음했다. 申 사장은 “내가 시인을 했다고? 무슨 소리야 아까 말한 그대로야”라고 했다. 池 대령은 “틀림 없지요?”라고 확인을 받은 뒤 사장실을 나와 녹취록을 작성하여 金詩珍 비서관에게 전달했다.
     
     申 사장은 池聖漢 대령이 나간 뒤 姜昌成 보안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어 신변보호를 요청했다고 한다. 池聖漢 대령도 며칠 후 구속되어 다른 尹必鏞 계열사람들과 함께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재판에 넘겨졌던 그는 나중에 무죄로 석방되었다.
     
     전역 뒤 기업인으로 변신했고, 마주협회 회장을 지내기도 했던 池聖漢 씨는 “이 사건은 유신 조치 뒤에 영향력이 커진 李厚洛 부장과 尹 사령관이 밀착되어 가는 것을 의심하고 있던 朴正熙 대통령에게 朴鐘圭, 申範植 두 사람이 과장된 보고를 올린 것이 계기가 되었다. 수사를 지시받은 姜昌成 보안사령관은 尹 사령관의 군복을 벗기는 선에서 그쳤으면 좋은데 가혹한 수사로 억울한 희생자를 너무 많이 만들었다”고 평했다.
     
     朴 대통령 업무일지를 살펴보면 姜 소장의 육군보안사령부는 즉각적으로, 또 집중적으로 尹必鏞 사령관과 그 계열 장교들에 대한 수사에 착수한 뒤 수시로 대통령에게 상황을 直報(직보)했음을 알 수 있다.
     
     3월 9일 朴 대통령은 오전 10시 10분부터 37분간 姜 장군의 수사착수 보고를 들었다. 그 한 시간 뒤 朴 대통령은 劉載興 국방장관과 李敏雨 육군참모차장을 불러 尹必鏞 수경사령관의 교체를 지시했다. 후임은 육사 8기인 陳鍾埰(진종채) 소장이었다.
     
     이날 오후 3시 25분 李厚洛 정보부장은 朴 대통령을 만나 약 55분간 업무보고를 했다. 자신의 운명에 큰 그림자를 남기게 될 尹必鏞 수사가 시작된 것을 알았을 李 부장은 상당히 불안했을 것이다.
     
     다음날인 3월 10일에도 姜昌成 사령관은 오전 9시 27분부터 30분 동안 수사상황을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보안사령관이 거의 매일 대통령에게 직보하고 있었다. 이는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수도권의 안전을 책임진 수경사사령관에 대한 조사였으므으로 朴 대통령도 신경을 무척 썼다. 朴 대통령은 3월 12일 오전 10시 55분 신임 수경 사령관 陳鍾埰 소장을 불러 부대 장악에 만전을 기하라고 지시했다.
     
     1973년 3, 4월 중 朴 대통령의 업무일지를 보면 중대한 변화가 감지된다.
     
     姜昌成 육군보안사령관이 하루가 멀다 하고 朴 대통령을 獨對하여 보고를 하는 동안 거의 매일 朴 대통령을 만나던 李厚洛 정보부장의 청와대 출입이 줄어든다. 朴 대통령이 부르지 않았던지 면담요청을 받아주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3월 21일에서 4월 2일까지 朴 대통령은 李厚洛 정보부장을 한 번밖에 만나 주지 않았다. 그 한 번이란 것도 15분간의 보고였다. 4월 3일 李 부장으로부터 약 50분간 보고를 받았던 朴 대통령은 다시 4월 8일까지 그를 만나 주지 않았다. 그가 4월9일 밤 10시에 李부장을 만나 준 시간은 불과 5분이었다.
     
     거의 매일, 하루에도 몇 차례 찾던 정보부장을 대통령이 근 보름간이나 소외시켜버린 것이다. 이 기간에 姜昌成 육군보안사령관은 朴 대통령에게 獨對보고를 세 번 올렸다. 그 보고의 핵심은 尹必鏞과 李厚洛 부장의 밀착관계에 대한 것이었다.
     
     朴 대통령은 이 기간 중 金致烈 정보부 차장을 한 번 불러 결재를 해준 것으로 나타나 있다. 노골적으로 부장을 따돌린 셈이었다. 朴 대통령이란 태양의 둘레를 도는 행성에 불과했던 李厚洛 부장의 초조와 불안은 대단했을 것이다. 朴 대통령은 이런 조치를 통해서 李 부장에게 확실한 경고신호를 보낸 것이었다.
     
     朴 대통령이 이 무렵 李厚洛 정보부장에 대해서 의구심을 갖고 보는 대목이 또 하나 있었다. 朴 대통령은 李부장이 1972년 5월에 평양에 가서 金日成을 만나고 와서 하는 행동에서 북한 측의 영향을 감지했던 것이다.  
     7·4 공동성명 문안부터 북한의 對南공작노선을 상당히 반영하였고, 한때 李厚洛 부장은 북한 측이 요구하는 보안법 폐지를 추진하다가 金鍾泌 총리의 강한 반대와 朴 대통령의 신경질적인 반응에 부딪혀 포기한 적도 있었다.
     
     朴 대통령은 남북회담을 하면서도 金日成의 약속이나 말에 아무런 신뢰를 두지 않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하는 자료가 있다. 1972년 8월 남북적십자 본회담이 평양에서 열렸다. 朴 대통령은 돌아온 남측 대표 李範錫 씨 일행을 격려하는 자리에서 북한 당국을 상대할 때의 지침을 내렸다.
     
     <남북적십자 본회담時 지침>
     
     1. 평양에서 있었던 일은 공식·비공식을 막론하고 모두 보고해야 한다.
     
     2. 공산주의자들과 접촉할 때는 사전에 전략을 세워놓고 해야 한다.
     
     3. 북한 위정자들과 우리가 핏줄이 같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4. 우리 적십자사는 인도적 사업이라고 보나 북한은 정치적 사업으로 본다.
     
     5. 북한 요인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모두 정치적이다.
     
     6. 우리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는 신념이 있어야 한다.
     
     7. 술을 마실 때도 상대방이 공산당이란 사실을 잊지 마라.
     
     8. 북한 사람들과는 어떤 자리에서도 감상적으로 흐르지 마라.
     
     9. 북한이 남한 언론을 비판하면 자문위원들은 즉각 반박하라.
     
     10. 대표단과 자문위원 사이는 긴밀한 협의를 하되 매일 저녁 결산토록 하라>
     
     당시 權府(권부)에서 李厚洛 부장의 獨走(독주)를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던 이는 金鍾泌 총리와 朴鐘圭 경호실장이었다. 尹必鏞의 수경사와 姜昌成 소장의 보안사는 전통적으로 라이벌 관계였다. 이런 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