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년 12월 민주혁명후 루마니아 국민들에게 매년 돌아오는 크리스마스는 남다르다. 발칸의 김일성이라고 불리우던 독재자 차우셰스쿠가 12월 23일 체포된지 3일만인 25일 오후 특별군사법정에서 사형언도 즉시 총살형에 처해졌기 때문이다.

    차우세스쿠 실책 중 국민들이 가장 참기 힘들었던 것은 경제난이라고 할 수 있다. 루마니아는 과거 우리나라처럼 보리고개가 있었던 가난한 나라가 결코 아니었으니 80년대말경에는 외채를 갚기위해 기아 수출을 하면서까지 배급제를 실시하였으니 국민들의 민생고가 최고조에 달한 시기였다

    70년대 북 김일성 통치체제를 그대로 받아들여 국민통제, 우상화를 강화하면서도 외채를 도입해 갑작스레 공업화정책을 펼쳤으나 중동오일쇼크, 부카레스트 대지진 발생 등으로 인해 경제정책은 실패로 끝난다. 80년대들어 100억불 이상이나 되는 외채 상환을 위해 원유, 농산물 등을 전부 수출해버려 생필품난 등 국민들의 경제난이 가중되었다. 그와중에도 인민궁전( 평양 주석궁 모방), 고급아파트, 국립도서관, 방송국 건설 등 우상화 정책은 지속되면서 국민들의 불만은 심화되기 시작했다

    80년대 중반들어 동독인들이 동구지역으로 탈출하고 고르바초프로부터 페레스트로이카, 글라스노스트 충고 요구가 있었으나 호네커와 차우세스쿠 독재자들은 오히려 소련의 정책을 비웃는 등 정권유지에 대해 자신감을 나타냈다. 동독 폴란드 체코 헝가리 등 공산정권이 붕괴되는 89년 민중시위 발생 전까지도 차우세스쿠는 자국 통치에 더욱 주민통제와 억압의 극치를 보였으며 24년 집권기간중 약 7만명의 정적을 처형하는 인권말살 정책으로 정권을 유지했다 한다.

    차우세스쿠는 8월 12월 지방도시 티미쇼아라에서 반정부 시위가 발생하자 계엄을 선포해 진압을 지시하고 중동 국가를 공식 방문한다. 그러나 지방시위가 갑작스럽게 확산되었고 차우세스쿠가 해외 방문중 급거 귀국하여 티미쇼아라 사태는 외부 불법세력들의 소행이라며 시위사태를 수습하려 하였으나반정부 군중집회 규모는 날로 확산 확대되었다.

    차우세스쿠는 군 경찰 정보부 3대 권력을 장악한 절대권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결국은 관제데모중 반 차우세스쿠 구호가 외쳐지는 상황에서 발포명령에 대해 군부가 거부하는 사태로 급변하였다. 데모대가 방송국과 공산당 중앙본부를 점거하였고 차우세스쿠 부부는 중앙당사사무실 옥상을 통해 긴급 헬기로 도주하였으나 몇시간후 군에 의해 체포되고 억류 3일만에 새로이 부상된 정치세력인 구국전선의 특별법정개최 즉결 사형언도후 부부는 총살형으로 최후를 맞는다

    차우세스쿠는 70년대 초 북한을 방문하고 주체 우상화 주민통제 방식 등 북한식 독재체제를 그대로 도입하였으며 북한과 긴밀 우호관계를 유지했었다.

    북한은 아직까지도 개혁 개방을 거부하고 국제적 고립, 경제난을 겪으면서도 국제사회 반대에 불구 핵개발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최근 화폐개혁을 하였다고는 하나 주민들을 위한 정책이 아니라 김정일 가족 경제를 배불리는 데 그칠 것이란다. 특히 북의 3대세습 왕조 움직임은 토픽감이 아니라 할수 없다.

    북한은 보즈워스 미국 특사가 방북을 마친 바로 그 시간 무기수송기를 통해 불법 무기수출을 시도하다가 태국 당국에 억류당하는 국제망신을 당하고 있다. 유엔안보리의 대북제제 결의, UN의 북한인권결의안 채택 등 북의 국제위상은 날로 어려움을 더해 가고 있다.

    파멸로 가는 이상한 이중적 태도, 오리발식 억지 허위주장, 선량한 시민들을 선동, 날조하는 기만적 모략태도를 버리고, 북한은 남북대화 추진 등 진정성을 보여야 할 것이다. 크리스마스날 총살의 이슬로 사라진 차우세스쿠 부부의 비극을 거울삼아 북한이 하루빨리 개혁 개방으로 나와서 건전한 국제사회 일원이 될 것을 촉구한다.

    * 뉴데일리 독자인 네티즌 '신데렐라'님의 게시글 '북 공산독재체제 답습 차우세스쿠 붕괴(12.25) 20주년'입니다. 외부필진 및 독자의 글은 뉴데일리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