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라는 두 단체가 친일파 3,090명의 명단을 발표했는데, 그 중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도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그가 자진해서 일본군에 들어가 장교가 되었기 때문이란다. 결론부터 말하면, 박정희를 친일파라고 매도하는 것은 나폴레옹을 친불파(親佛派), 워싱턴을 친영파(親英派)라고 매도하는 것과 같이 어리석은 짓이다.
     
      박정희가 태어났을 때 이미 한반도는 못난 조상들 탓에 일본 식민지가 되어 있었다.
      그는 사범학교에 들어가 소학교(초등학교) 교사가 된다. 그는 일본인들의 조선인 차별에 심한 반발을 일으켜 교사직을 때려치우고 역시 일본 식민지였던 만주로 가서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간다. 그리고 장교가 된다. 성적이 우수했던 그는 일본 육군사관학교에도 유학한다.
     
      프랑스의 혁명가요 황제였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가 지중해의 외딴 섬 코르시카(Corsica)에서 1769년 이 지역 명문 집안 아들로 태어났을 때 코르시카는 프랑스의 식민지였다. 코르시카는 인종도 언어도 프랑스와는 전혀 다른 이탈리아 섬이었다. 프랑스는 코르시카의 지정학적 이점 때문에 오래 전부터 이 섬을 탐내고 있다가 1768년 당시 이 섬의 주인이었던 이탈리아 Genoa(도시 국가)로부터 돈을 주고 사버렸다.
     
      코르시카인들은 당연히 분노했다. 그러나 코르시카의 저명한 변호사였던 나폴레옹의 아버지 Carlo Buonaparte(나중에 스펠링을 프랑스식으로 만들기 위해 U를 빼버린다)는 프랑스에 대항하여 코르시카 독립운동을 하기는커녕, 9살 난 아들을 프랑스로 유학보낸다, 그것도 보통 학교가 아니라 군인 양성 학교였다. 그 학교에서 성적이 우수했던 나폴레옹은 프랑스 육군사관학교로 보내진다. 육사를 나온 나폴레옹은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시작되었을 때 겨우 포병 소위에 불과했다.
     
      나폴레옹은 혁명의 북새통을 피해 고국 코르시카로 돌아가 그곳 방위병으로 잠시 근무한다. 그러나 그가 왕정을 전복하고 공화제를 세우려는 프랑스 혁명세력 자코방 당의 비밀 당원임이 밝혀지자 그는 코르시카 식민정부의 미움을 사서 코르시카에서 쫓겨난다. 그 후 나폴레옹은 조국 코르시카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는 프랑스가 자기 조국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 같다.
     
      그는 프랑스 군대에서 맹활약, 1799년 30세 약관에 쿠데타를 일으켜 프랑스 정권을 장악한다. 그리고 공화제를 뒤엎고 스스로 황제가 되고, 영국과 러시아를 제외한 전 유럽을 거의 다 석권하는 지배자가 된다. 그의 군사적 모험은 많은 유럽인들의 반발을 사서 집권 15년만에 몰락하고 말지만, 그가 남긴 정치적, 문화적 유산(프랑스 법전의 완성 등)은 프랑스 근대화의 밑거름이 되어 지금도 위대한 지도자로 칭송받고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칼한 것은 코르시카 사람들이 지금도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하려고 투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코르시카 사람 누구도 나폴레옹을 친불파로 매도하고 있지 않다.
     
      박정희가 일본 군대에 들어갔다고 해서 친일파로 매도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묻고싶다. 그럼 박정희가 시골 학교 교사로 얌전하게 평생을 보냈어야 당신들 속히 편하단 말인가? 일제 식민통치 시절 박정희 뿐만 아니라 많은 조선 젊은이들이 스스로 지원하거나 학도병으로 끌려가 일본 군대에서 복무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을 친일파로 매도하는 것은 코르시카인들보고 나폴레옹을 친불파라고 매도하라는 것과 같다.
     
      일본군대에 들어갔던 박정희 등 조선 젊은이들은 1945년 미국 덕분에 우리 조국이 일본 압제로부터 해방되자 신생 대한민국 국군 창설의 밑거름이 된다. 그리고 공산주의 국가 소련 군 대위 출신 김일성이 소련과 중국이라는 외세의 지원을 받고 1950년 대한민국을 기습 남침했을 때 백선엽(이 분도 이번에 친일파로 몰렸다)등 일본군 출신 국군 장교들이 전쟁 초기 북한군 저지에 큰 역할을 했다. 물론 미국의 참전이 없었으면 이들의 노력도 허사가 되었겠지만....(강정구라는 동국대 교수는 미국의 참전 때문에 그때 김일성이 한반도를 통일하지 못한 것을 원통해 하고 있다).
     
      비록 일본군에 들어가긴 했지만 박정희가 모모 여당 국회의원의 아버지들처럼 악질적으로 우리 동포를 괴롭혔다는 소리는 아직 듣지 못했고, 그는 1970년대 한국 경제발전의 기초를 다진 훌륭한 대통령으로 지금도 존경받고 있다. 최근 발표된 여론조사에서도 박정희는 가장 훌륭한 한국 대통령으로 뽑혔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로 칭송받는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도 영국 식민정부가 좌지우지하던 버지니아 민병대 장교였다. 그의 전기를 보면, 워싱턴은 정규 영국 군대보다 식민지 버지니아 민병대 대원들이 나쁜 대우를 받고 있는 것에 격분, 영국에 대한 적개심을 키웠고 결국은 독립운동에 앞장서게 되었다 한다. 워싱턴이 식민지 군대 장교였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친영파라고 부르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은 정신나간 사람 취급을 받을 것이다.
     
      박정희도 나폴레옹처럼 저지른 과오가 많지만, 누가 뭐래도 박정희는 대한민국 발전에 공이 많은 지도자였다. (필자는 1968년 당시 중앙정보부를 간접적으로 폄하하는 글을 신문에 썼다는 이유로 남산에 끌려가 24시간 잠도 못 자고 얻어맞은 일이 있는데, 그때는 박정희를 이를 갈며 증오했었지만 지금은 그의 과오보다 공적이 더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를 용서하고 있다.)
     
      박정희를 친일파로 매도하는 사람들에게 부탁한다. 그를 매도하기보다는 우리 민족의 3분의 1을 공산주의 독재 체제하에서 죽을 고생을 하게 만든 김일성의 과거사나 좀 자세히 들추어 내기 바란다.(황장엽씨는 최근 한 강연회에서 북한 사람들이 남한 사람들의 3분의 1만큼만 살게되어도 지금 죽어 여한이 없겠다고 말했다 한다. 필자도 북한 여행할 때 안내원이 하도 불쌍해서 신고 갔던 나이키 운동화를 벗어주고 왔다).
     
      김일성이 1930년대 만주 일대와 한반도 북부에서 약간의 항일 게릴라전에 가담한 것은 사실이지만, 북한 정권은 그것을 지나치게 과장하여 마치 그가 대단한 영웅이나 되는 것처럼 미화하고 있다. 북한 역사책을 보면 김일성이 일본과 싸워 이겼기 때문에 조선이 해방된 것처럼 대서특필되어있다. 북한에서 그렇게 하는 것은 이해할수 있지만, 남한에서, 그것도 일부 자칭 학자들이 김일성을 찬양하고 있다는 사실에는 경악을 금할수 없다. 최근엔 돌(도올이던가?) 김용옥이란 사람은 북한 사람들도 믿지 않는 "구호나무"를 김일성 찬양 자료로 사용했다는데―그것도 청소년 교육방송을 통하여―참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북한이 김일성을 얼마나 과장해서 미화하고 있는가는 아래 사진을 보면 금방 알수 있다. 이 사진은 필자가 1995년 재미동포 북한 방문단에 끼여 소위 평양 평화축전 구경을 하러 갔을 때 혁명박물관이라는 곳에서 찍은 것이다. 필자는 이 사진을 보고 처음엔 놀라고 나중엔 웃었다. 해방되던 날 서울 역전 광장에서 찍은 이 유명한 사진에 북한의 선전선동 일꾼들은 원래 있던 구호를 지우고 "김일성 장군 만세"라는 구호를 한글로 적어 넣었다.(당시엔 한글을 많이 쓰지 않았다). 그것도 기술적으로 하지 못하고―위조지폐는 잘 만들어내는 북한 기술자들이 이것은 왜 이렇게 엉성하게 했는지 모르겠다―누가 봐도 가짜라는 걸 분명히 알수있게 써넣었다. 김용옥이 김일성을 찬양하는 방송 프로에서 왜 이 귀중한 자료는 쓰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그가 아직 평양 혁명박물관 구경을 하지 못한 모양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