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강인선 조선일보 정치부 차장대우 ⓒ 뉴데일리
    ▲ 강인선 조선일보 정치부 차장대우 ⓒ 뉴데일리

    지난 주말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 이문동의 떡볶이집을 찾아갔다. 정치인들이 서민적인 이미지를 보여주고 싶을 땐 점퍼를 입고 재래시장에 간다. 희망이나 미래를 강조하고 싶을 땐 어린이를 안고 사진을 찍는다. 너무 자주 봐서 식상한 공식이다.

    이 대통령도 그 진부한 공식대로, 며칠 전부터 강조했던 '중도강화론'과 '서민생활 배려'를 현장에서 보여주기 위해 하늘색 점퍼를 입고 반년여 만에 시장에 갔다. 청와대가 수시로 내놓는 홍보용 행사인가 했는데, 민주당이 거기에 힘을 실어줬다. 정세균 대표는 "대운하에 녹색을 갖다 붙여 녹색이란 말을 오염시키더니 중도, 서민이란 말도 오염시키려고 한다"고 비난했다. 이강래 원내대표도 "떡볶이 사먹으며 이미지만 바꾸면 중도고 서민이냐"고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민심이 심상치 않으니 궁여지책을 꺼낸 것"이라고 했다. 여기에 여러 정치인이 뛰어들어 가히 '떡볶이 정국'이라 할 만한 맵고 뜨거운 논쟁이 벌어졌다. 도대체 떡볶이가 뭐기에.

    '떡볶이 정국'은 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가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란 책에서 말한 '프레임(틀) 전쟁'에 딱 들어맞는 사례다. 지난 10년 미국에서 민주당과 진보세력이 담론을 주도하지 못한 이유를 연구하던 레이코프는 그들이 독자적인 틀로 세상을 보지 못하고 공화당과 보수세력이 만든 '프레임'에 휘말렸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고 하면 일단 코끼리부터 먼저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민주당이 "이 대통령은 '중도'도 아니고 '서민'도 아니다"라고 강조하면 할수록, 사람들 머릿속엔 '중도'와 '서민'이 더 강하게 남았다. '코끼리 공식'에 따르면, 긍정을 하든 부정을 하든 상대의 표현을 그대로 쓰면 저쪽 입장을 지지해주는 결과가 된다.

    '떡볶이만 사먹으면 그게 서민을 위하는 거냐'라고 비난하면, 사람들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길거리에서 파는 싸고 친근한 음식 떡볶이다. 서민들은 시장통에서 떡볶이를 사먹는 게 뭔지 안다. 그건 생활이고 체험이기 때문에 몸으로 이해하는 것이라 설명이 필요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공감한다. 결국 야당은 대통령을 공격함으로써 오히려 서민적인 이미지를 강화하고 싶은 대통령을 도와준 셈이다.

    이 대통령이 중도강화와 서민 우선을 강조하자 민주당에선 냉소적인 의견이 주를 이뤘지만, 한편에선 "느낌이 좋지 않다"는 이야기가 나왔다고 한다. 아마 프레임 전쟁에서 밀리고 있다는 감 때문에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그것도 민주당 지지세력이라 믿었던 '서민'이란 말을 빼앗기게 생겼으니 더 그랬을 것이다.

    물론 떡볶이집 방문 한번으로 서민의 마음이 어느 한쪽으로 쏠리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작은 사례는 무의식적인 공감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해준다. 레이코프는 최근작 '정치적인 마음(The Political Mind)'에서 "이성과 감정을 분리시켜 생각했던 데카르트적 세계관에서 벗어나라"고 충고한다. 적절한 감정이야말로 이성적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정책이 내 삶의 질을 더 낫게 해줄 것이란 '느낌'이 와야 지지해야겠다는 '이성적인 판단'도 가능하다.

    공감을 불러일으키려면 잠재의식을 건드려야 한다. 광고업계에선 이미 '마음속에 있으나 소비자 자신도 그 존재를 모르는 어떤 감정'을 찾아내는 기법을 사용한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이 대통령은 떡볶이집에 가서 어묵 하나 집어 먹은 것 가지고, 야당이 그토록 민감하게 반응할 줄은 몰랐을 것이다. 어쩌면 이 대통령이 임기 1년 반이 다 되도록 풀지 못한 '소통'의 문제를 떡볶이가 풀어줄지도 모른다. 기자회견을 해도, 주례 라디오 연설을 해도 국민과 통하지 않던 마음은 방법의 문제가 아니라 세상을 보는 프레임을 공유하지 못하고 그래서 공감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에 나온 한계였던 것이다.
    <조선일보 7월1일자 동서남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