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난 독립영화 안에서도 독립영화를 한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완전한 독.고.다.이. 영화인이다.

    협회나 단체 따위 가입을 안하고 오히려 그들에게 가운데 손가락 휘날리며 영화를 해왔다. 그들이 나에게 협회소속도 아니니 넌 독립영화인도 아니라는 욕을 해댈 때도 그러려니 하면서 웃어 넘긴 나임에도 불구하고 딱 한 번 서러워서 혼자서 눈물 흘린 적이 있었다.

    2년 전, 부산영화제 필름마켓에 내가 프로듀싱 한 영화 ‘도살자’를 팔기 위해 내려갔을 때의 일이다. 돈이 없어 정식 부스를 만들지도 못하고 브로셔를 마켓 안내데스크에만 꽂아두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영진위를 찾아가서 부탁을 했지만,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우리가 알아서 만든 영화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브로셔를 놓을 그 조그만 칸 하나 내줄 수 없는 영진위의 속셈은 과연 무엇이었는지 지금도 모르겠지만, 이 따위 영진위라면 차라리 없는 게 낫다고 생각하면서 이를 악문 적이 있었다.

    지금 발족된 4기 영진위는 제발 이런 만행을 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모든 것을 거부하고 독고다이로 활동하는 나 같은 영화인들은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영진위가 외면하고 그들의 손을 내친다면 다양한 영화의 생태계는 파괴될 것이다.

    어쨌든 그렇게 이를 악물며 기존의 시스템들을 거부하고 팔기 위해 몸부림쳤다. 미국과 프랑스 등 알고 있는 지인들을 총동원해 팔기 위해 사방팔방 뛰어 다녔고, 결국 미국과 계약을 함으로써 올 7월에 박찬욱 감독의 ‘박쥐’와 함께 개봉하게 된다.

    이 와중에 재미있는 현상이 두 가지가 발생했다. 제일 먼저 우리 영화에 관심을 보인 독일을 비롯해서 프랑스와 미국의 관계자들 모두 우리 영화를 보고 제일 처음에 한 말이 같았다.

    “한국에서도 이런 영화를 만들어요?”

  • ▲ 영화 '도살자' ⓒ 뉴데일리
    ▲ 영화 '도살자' ⓒ 뉴데일리

    쿠엔틴 타란티노가 아시아의 장르영화들만을 DVD로 출시하는 목적으로 만든 회사에서도 나온 말이 그거였다. 아예 그 회사는 우리 나라는 신경도 안 쓰고 있다가 우연히 우리 영화 ‘도살자’에 대한 소식을 들었고, 우리에게 연락을 해오면서 던진 한마디가 그거였다.

    미국의 ‘뉴욕아시아 필름페스티벌’에서도 한국영화 초청할 게 없어 걱정하다가 우리 영화를 보고 탄성을 연발하며 꺼낸 말이 그거였다. 그들이 왜 그런 똑 같은 말을 꺼내는가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바로 그들의 눈에도 얼마나 한국영화가 획일적이었나 하는 것을 대변해주는 말이다. 다양해야 할 문화적 가치로서의 한국영화에 먹이는 단 한마디의 치명타다.

    제일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땐 나름 뿌듯했지만 자꾸 듣다 보니 나중엔 쪽팔림의 쓰나미가 대퇴부를 후려치는 느낌을 받았다. 흔히 상업영화에서 뻑 하면 새로운 스타일이니 하면서 극찬을 해대거나, 독립영화의 새로운 시선이라고 말하는 영화들을 보면 솔직히 더 쪽팔려진다.

    도대체 새롭다는 것, 다양하다는 것의 말의 의미를 알기는 하는 걸까? 그 와중에 ‘주온’을 만든 시미즈 다카시 감독이 한국에 와서 관객들에게 “이젠 나도 지겨워서 안 만드는 영화를 한국은 왜 계속 만드는지 모르겠다” 라고 하는 말은 비아냥을 넘어 2연타석 쪽팔림의 쓰나미 안면 강타 되시겠다.

    외국에서는 그렇다 치더라도 왜 국내에서마저도 이런 소리를 들어야 될까? 아니, 좀 더 진지한 질문이라면 왜 그런 소리를 듣고도 관객들은 아무런 반론도 제시하지 못하는 걸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게 사실이니까.

    재미있는 또 하나의 현상은 바로 관객의 반응이었다. 부천영화제야 그렇다 치고, 미국 뉴욕 아시안 필름페스티벌의 반응은 나 역시도 놀라울 정도였다. 이명세 감독의 ‘M’과, 허진호 감독의 ‘행복’과 함께 상영이 됐는데 그 영화들의 썰렁한 반응과는 달리 전회매진에 기념 티셔츠까지 팔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국에선 인디스페이스에서 특별전 4회 상영에 유료관객 10명이라는 결과와는 달라도 너무 다른 반응이었다. 웃기게도 그 10명의 관객 중 내가 아는 사람이 7명이었으니…….

    물론, 그게 아쉽다거나 서운하지는 않다. 애당초 국내는 신경 안 쓰고 해외를 겨냥해 만든 영화였고 시작할 때부터 감독에게 내가 던진 말은 “한국은 버려라. 해외로 풀어 나갈 것이니 네 마음대로 만들어라” 였다. 오히려 나는 그 10명의 관객들에게 매우 감사함을 가지고 있다. 조그맣고 외면당하는 영화를 사랑하는 소수의 관객들임을 뼈저리게 느끼게 해주는 사람들이니 말이다. 우리가 그들에게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우리가 할 수 있는 얘기를 영화로 만들어 그들에게 보여주는 것뿐이다.

    작은 영화에는 작은 수의 관객만 들면 된다. 순환의 구조만 성립될 수 있다면 굳이 상업영화판으로 기어 들어가 재활용 쓰레기의 가치도 안 되는 순수 100% 폐기 처분될 영화를 만들지 않아도 될 테니 말이다. 오히려 작은 영화가 크게 히트 치면 ‘워낭소리’ 같은 잡음이 들리게 된다.

    그게 나쁜 현상은 아니지만, 문제는 그걸 버틸만한 문화적 다양성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서 발생되는 그런 현상은 문화적 순수를 아주 쉽게 변질시키거나 왜곡시킬 확률이 더 높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재미있는 현상에서 내가 느낀 것은 하나의 결론으로 모아진다. 바로, 영화적 ‘다양성의 부재’가 그것이다.

    상업영화는 너무 뻔한 영화들만을 양산해 내고 있고, 독립영화는 자신들이 독립영화를 하는 것인지, 예술영화를 하는 것인지, 언더그라운드 영화를 하는 것인지 모르는 것 같다.

    확실한 건 이제 시작하는 어린 영화인들의 형태는 상업영화를 모방하는 것이 많다는 것이고 뿌리가 되야 할 독립영화의 왜곡이 심각한 수준에 도달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런 상태에서 관객들은 ‘독립영화는 예술영화다, 고로 지루하다’는 데카르트도 개겨보지 못할 논제를 각인한 상태에서 조그만 영화에 대한 외면과 함께 그저 아그들 코 묻은 돈이나 빼먹으려는 자본에 지배당한 상업영화의 천편일률적인 영화에 의식을 잠식당해 버린 것이다. 그렇게 다양한 영화를 봐야 할 관객의 욕구는 철저히 뭉개져 버린 것이다.

    하지만 늘 그렇듯 언제나 희망은 존재한다. 관객들의 의식이, 욕구가 다양한 영화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기 시작했고, 한국영화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내가 ‘도살자’를 해외에 팔려고 뛰어 다닐 때 나를 비웃고, 내가 팔았을 때 운이 좋았다 치부하는 해보지도 않고 자신의 쓰레기 같은 영화관만을 정당화하려는 비겁한 의식을 뜯어 고치지 않는 한은 절대 그 관객들의 욕구를 채우지 못할 것이다.영화가 뭔지 좆도 모르는 투자자 놈들의 배때기 기름은 채워줄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 ▲ 영화 '타네이션' ⓒ 뉴데일리
    ▲ 영화 '타네이션' ⓒ 뉴데일리
    그런데 넓게 보면 그것도 아니다. 왜? 결국 다양한 영화의 욕구를 충족시켜야 하는 시대에 뒤쳐진 그런 마인드의 인간들은 돈만 잃고 영화판 떠나게 될 테니 말이다. 1000개가 넘는 영화사의 난립과 영화판의 자금난은 그 대표적 예이다. 자신들만의 확실한 색깔을 가지지 않은 영화사가 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이제 21세기에 맞는 의식적 형태로의 진입이 영화인들에게 필요하다.이미 1인 미디어 시대로의 진입은 시작되었다.미국의 1인 작품인 ‘405’와 ‘타네이션’ 같은 영화들은 그 자체 내에 다양한 의식의 흐름이 바탕을 깔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헐리웃 영화가 무서운 이유는 그들의 자본의 힘이 아니라 다양한 영화를 만들 인력과 시스템을 무서울 정도로 흡수해 버리기 때문이다. 다양한 상상력의 흡수는 그 하나의 상상력만으로 끝없이 재생산 가능한 루트를 제공하기도 한다.

  • ▲ 영화 '405' ⓒ 뉴데일리
    ▲ 영화 '405' ⓒ 뉴데일리

    이제 한국영화판에 ‘다양성영화’라는 논제가 던져졌다. 이 논제의 중점은 그래서 다양성이라는 말로 대변되는 개개인의 무한한 상상력을 끌어내어 영화로 만들어지게 하는 의식적 형태의 새로운 변화가 필요하다.

    그것은 기존의 모든 영화적 관념들을 철저히 부셔버리고, 새로운 담론과 영화학을 제시해야 만이 가능하다.
    그런 의식의 확장 작업은 영화인들과 관객 모두가 함께 해야 할 것이다.영화인들은 새로운 것에 대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관객들은 끊임없이 자신들의 문화적 욕구를 요구해야 한다.

    이 것이 잘 이루어져야만 ‘한국에서도 이런 영화를 만드느냐?’는 낯뜨거운 말도 듣지 않을 것이고, 외국 감독이 한국에 와서 ‘그딴 영화는 그만 좀 만들라’는 대퇴부 후끈거리는 말도 듣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 영진위는 그런 다양한 시선의 영화들을 지원하고, 관객과 만나게 해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내가 부산 마켓에서 당했던 것처럼 어떠한 지원 없이 직접 만들어 찾아간 영화인들의 조그마한 손길조차 거부하고 외면하면 안 된다.

    오히려 직접 나서서 그런 영화인들에게 길을 만들어줌으로써 개개인의 상상력이 자생적으로 살아날 수 있도록 인프라와 시스템의 확립을 만들고 구동시키는 영진위의 역할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점이 바로 지금이다.

    그리고, 그것이 다양성영화의 하드웨어적 핵심이다. 그래야만이 ‘다양한 상상력의 창출’이라는 소프트웨어적 핵심이 살아날 수 있다. 제작지원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배급지원이 더 중요하고 절실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나는 지금 우리 영화 ‘도살자’가 해외에서 반응이 좋아 역으로 국내로 돌아와 관객과 만나길 희망하고 있다. 이 얼마나 ‘절망적인 희망’인가? 이제 이런 희망 따윈 버리고, 그저 이 안에서 신명 나게 영화를 만들 수 있게 해주면 고맙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