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대정신 주최로 광우병 파동을 재조명 하는 '거짓과 광기의 100일' 정책 토론회가 22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19층 기자회견장에서 열렸다. 이날 토론회에 참가한 홍진표 시대정신 이사는 '광우병 파동과 대책회의'라는 주제 발표를 통해 "지난해 5월 출범한 '광우병위험미국산쇠고기전면수입을반대하는국민대책회의'는 다른데 관심이 있지 않았고 이명박 정부를 초기에 약화시켜야겠다는 본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고 비판했다.

    광우병 파동과 대책회의

    홍진표 시대정신 이사

  • ▲ 홍진표 시대정신 이사 ⓒ 뉴데일리
    ▲ 홍진표 시대정신 이사 ⓒ 뉴데일리

     1.   대책회의의 등장

    5월 6일 ‘광우병위험미국산쇠고기전면수입을반대하는국민대책회의(이하 대책회의)’가 출범하면서 촛불시위는 본격화, 정례화 되는 새로운 양상에 접어들었다. 대책회의는 1,800여 개 단체가 모였다고 하지만, 예컨대 전교조의 경우 한 단체로 보지 않고 단위학교의 지회까지 해체하여 270여 개로 계산했기 때문에, 통상 대형 투쟁이슈가 발생할 경우 진보세력이 결성해 온 연대기구와 그 규모와 구성이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식품문제라는 특성상 여러 지방의 생활협동조합이 참여하였고, 한미 FTA 반대운동에 참여했던 영화와 애니메이션 관련 단체들이 그 연장선에서 가담했고, 이례적으로 대선기간 이명박 후보와 정책연대를 했던 한국노총도 그 이름을 걸었다.
     
    대책회의 참여단체들을 분석해 보면, 자체의 조직 기반, 대국민 인지도를 통한 발언권, 이념적 노선 또는 논리 중에서 최소한 두 가지 요소를 가진 주요세력은 한국진보연대(이하 진보연대)로 대표되는 친북운동권세력, 전교조, 민주노총, 전농 등 대형 이익단체, 참여연대, 민변, YMCA, 흥사단 등의 시민단체의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그런데 많은 단체들이 참여하는 연대기구가 구성되면 연대기구 차원의 새로운 결정구조가 만들어지고 이 구조의 결정에 개별단체들은 따르게 되는데, 효율성과 기동성이 우선되면서 대부분의 단체들은 이름만 걸게 되고 결국 집행부가 독주하게 된다. 특히 광우병 촛불시위의 경우 날마다 집회가 벌어지는 현장이 중심이 되면서 집행부의 권한 집중은 더 강화되었을 것이다. 대책회의는 진보연대 공동대표인 오종렬·한상렬 씨가 대표, 진보연대 대외협력위원장인 한용진 씨와 참여연대 박원석 씨가 공동상황실장을 맡았다. 결국 친북운동권세력을 대표하는 진보연대와 진보시민단체를 대표하는 참여연대 이 두 단체가 합작으로 대책회의를 주도하였다.

    이 대목에서 대책회의를 주동적으로 구성하거나 혹은 참여한 단체들의 동기와 문제의식이 무엇이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만약 대책위가 자연발생적인 촛불시위의 현장에서 민주적 절차를 통해 어떤 개인들의 참여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이런 질문을 던질 필요는 없다. 그러나 대책회의는 한미 FTA, 평택미군기지 이전, 이라크 파병 등을 반대하는 이슈에서 항상 등장했던 진보를 자처하는 세력들이 다시 모여 자임해서 만들었다.

    이들이 노무현 정권하에서 추진된 한미 FTA를 반대했던 세력들이라는 사실은 이들의 대책회의 구성 동기의 중요한 단서가 된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의 재개는 한미 FTA의 직접적 논의대상이 아니고, 사실 이와 무관하게 그전부터 협의되어 왔지만 그 전제조건 비슷하게 얽혀있었다. 그러나 이런 약간 복잡한 정보는 대중들에게 잘 전달되지 않는 속성이 있고, 대중들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한미 FTA 그 자체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이들은 바로 이런 점에 착안하여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운동이 한미 FTA 반대운동의 대중적인 확산의 고리가 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런 연계성 때문에 이들은 지난 2006년 3월 28일 발족한 <한미FTA저지범국민운동본부>를 원형으로 삼아 새로운 단체를 추가하여 5월 2일 첫 촛불시위 이후 단 4일 만에 대책회의를 매우 신속하게 조직할 수 있었다.

    우리 사회에서 “진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그들이 왜 한미 FTA를 반대하는지에 대한 원초적인 질문도 필요한데, 그들이 보호무역주의자라고 말하면 아주 깔끔한 답이 되겠지만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은 것 같다. 우선 한국은 칠레, 아세안, EU, 중국, 일본 등과도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했거나 추진 중인데 진보세력은 한미 FTA만을 특별히 문제 삼는다. 이런 비일관성은 한국진보의 특성 중의 하나인 반미주의로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미국의 상징성에 주목한 투쟁전술이라고 강변할 수도 있다. 한미 FTA 반대는 진보 일반의 가치추구의 당연한 귀결이라며 논의의 여지가 없다는 사람들도 있지만, 한미 FTA가 진보를 추구하는 노무현 정권의 핵심 사업으로 추진되었기 때문에, 이런 논리는 성립하기 어렵다.

    이들의 논리를 들여다보면 IMF 외환위기 이후 한국진보 일반이 공유하게 된 신자유주의 반대노선의 연장선에서 한미 FTA문제에 접근하고 있다. 이 글이 신자유주의반대론을 평가하는 데 목적이 있지 않기 때문에 한미 FTA가 신자유주의와 연결된다는 그들의 논리에 대해 더 이상 언급하지는 않겠다. 다만, 대책회의를 주도한 사람들은 보통사람들의 광우병 공포와는 차원이 다른 한미FTA반대운동의 확산이라는 동기를 갖고 있었다. 나아가 이들은 특정 정책에 대한 반대를 넘어 이명박 정권을 조기에 약화시킨다는 정치적 목적을 공유하고 있었는데, 이들에게 광우병 촛불시위의 조직화에 있어서 현 정권의 무력화는 한미 FTA 반대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매력적인 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진보세력 일반은 ‘한나라당의 집권 반대’라는 정파적 이해관계를 널리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촛불시위가 소강상태로 접어든 6월 30일 경찰이 진보연대 사무실을 압수 수색해서 확보한 ‘집행정책조직 책임자 연석회의’ 문건에는 “(미국과) 재협상이라는 목표만 갖고 단기에 승부를 걸려면 늪에 빠질 수 있다. 우리의 진정한 목표는 이명박 정부를 주저앉히는 것”이라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는데, 대책회의 내의 강경세력을 대표하는 진보연대는 여전히 정권타도 노선을 견지하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2. 대책회의의 역할
     
    대책회의와 관련해서 우선 이 연합단체가 촛불시위의 유지와 확대에 어느 정도 역할을 했는가라는 질문이 제기된다. 단순화시키면 촛불찬성론자들은 대책회의는 밑으로부터 분출되는 대중들의 요구를 받아 멍석을 까는 정도의 한정된 역할을 했다고 주장한다. 반면 촛불반대론자들은 대책회의의 주도성을 강조해왔다.

    대책회의에는 1천 8백여 개의 사회단체와 민주노동당, 창조한국당, 진보신당 등 정당들도 참여했는데, 이들이 독자적으로 대규모 집회를 장기간 유지할 사회적 영향력과 조직력을 가졌다고 믿기는 어렵다. 이는 2009년 1월 용산에서 벌어진 농성세입자들의 사망사건을 이슈로 삼아 벌어지는 시위와 비교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용산범대위는 민노당과 한국진보연대가 중심이 되어 운영하고 있는데, 광우병 촛불시위처럼 거의 날마다 집회를 시도하고 있지만 그저 수백 명 수준의 참여에 그치고 있다. 만약 용산범대위에 광우병대책회의 참여단체들이 모두 집결하더라도 집회의 규모는 크게 확대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점은 상식에 속하는 이치로서, 용산사건은 광우병 촛불시위와 달리 광범한 국민들의 관심과 호응을 얻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용산범대위가 벌이는 이른바 ‘그들만의 투쟁’에는 노무현 정권하에서 벌어진 평택미군기지 이전과 부안 방폐장 저지를 위한 장기간의 집회가 해당된다. 다만 이 이슈에는 이익관계를 가진 주민들이 다수 참여하면서 그 지역에서는 상당한 파급력을 미쳤지만, 본질상 전 국민적 관심사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광우병 촛불시위와 뚜렷하게 구분된다. 경험상 80년대 운동권 성향을 아직 유지하고 있는 민노당 및 한국진보연대세력에 참여연대, 환경운동연합 등의 시민단체까지 가세할 경우에 이해관계자인 주민들을 제외하면 집회의 규모는 결코 수천 명을 넘지 못한다. 당연히 이들 집회 참여자의 다수는 조직 동원된 사람들이다. 각종 집회에 최대의 동원력을 행사하던 한총련 등의 학생운동이 90년대 중반 이후 급격히 쇠퇴하면서, 자체의 동력만으로 수만 명의 집회를 만들어 내던 시대는 끝나버렸다. 90년대 중반 이후에는 한총련보다 오히려 민주노총, 전농 등의 이익단체가 조직 동원 능력을 더 갖게 되었지만, 이들은 이른바 노동자대회니 농민대회와 같이 자신들의 직접적 이해관계가 걸리는 경우에만 수만 명 규모의 총력 동원을 하는 한계를 갖는다.

    광우병 촛불시위는 대책회의의 권위와 조직적 영향력의 범위를 벗어나서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2002년 여중생사망 촛불시위와 유사하다. 다만 여중생사망 촛불시위는 집회의 본격화 이전에 미군에 의한 고의적 타살이라는 반미친북세력의 거짓 선동과정이 있었고, 촛불시위의 점화 또한 상당한 기획이 작용했다. 이런 차이로 인해 여중생 촛불시위와 달리 대책회의가 광우병 촛불시위에 오히려 끼어들었다는 표현도 가능할 것이다. 이미 달리고 있는 버스에 승차했다고 해서 광우병 촛불시위에서의 대책회의 역할을 여러 흐름의 한 부분만으로 볼 수는 없다. 만약 대책회의가 없었다고 가정해보면 그 답은 명료해진다.

    대책회의는 무엇보다도 우선 집회의 계속성을 보장했다. 대책회의라는 집회를 주관하는 실체가 등장하면서 촛불시위는 기존의 자연발생성을 벗어나 지속될 수 있는 엔진을 장착한 것이다. 더구나 이 새로운 질주는 대책회의의 명칭에 포함된 ‘미국산쇠고기전면수입반대’라는 문구가 말해주듯이 쉽게 제동을 걸 수 없는 경직성을 갖게 된다. 이들은 ‘전면수입반대’를 내걸어 스스로 어떠한 퇴로도 만들어 놓지 않았으며, 심지어 대책회의 내부에서조차 그 누구도 브레이크를 걸 수 없게 되었다.
     
    6월 3일 이명박 대통령이 “국민이 원하지 않으면 30개월 이상 된 쇠고기를 수입하지 않겠다.”, 6월 21일 “30개월 이상 된 쇠고기 수입 금지”, “30개월 이하 쇠고기에서 뇌·눈·척수·머리뼈 제외” 등의 한미간 추가협상 발표 등 정부의 상당한 양보가 제시되었을 때 대책회의는 집회의 향방을 결정하는 키를 쥐게 되었다. 언론사의 여론조사에 의하면 한미당국의 추가협상 내용이 알려지기 시작한 6월 20일경부터 촛불시위 중단여론이 지속론을 압도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때 대책회의는 이 같은 “추가협상은 국민 기만일 뿐”이라며 집회의 지속을 고집하였고, 그 동력을 살리기 위해 6월 30일에는 대책회의의 참가단체인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시국미사를 열었고, 7월 2일에는 역시 대책회의의 참가단체인 민주노총이 총파업을 시도하였다. 촛불시위라는 대중적 압력을 통해 정부에 대해 30개월 이하의 쇠고기만 수입한다는 등의 양보를 끌어내는 성과를 얻어냈다고 한다면, 6월 21일 이후 약 50일 이상 더 지속된 집회의 후반부는 대책회의의 고집에 가까운 전략적 선택에 의한 ‘집회를 위한 집회’였다.

    이처럼 이념적, 정치적 전략을 가진 집단이 자생적인 대중운동에 개입할 경우 문제해결이 더 어렵게 된다. 전략집단은 애초부터 해당문제의 해결에는 별 관심이 없으며, 자기 이념의 선전이나 정치적 반대세력의 약화를 추구하여 심할 경우 문제가 해결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대책회의의 주류를 형성한 단체들이 주도했던 부안 방폐장 저지와 평택미군기지 이전 반대 투쟁의 경우에도 종국에는 ‘더 많은 보상’이라는 일정한 타협을 바라는 주민들과는 달리 이들은 계속 투쟁을 고집하였다. 이번에도 대책회의는 표면상 한미 간의 재협상을 주장했지만, 막상 재협상에 의해 그들의 요구조건이 상당히 관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촛불시위를 50여 일 더 끌고 가 대중들이 다 빠져나가고 자신들만 남는 처절한 종말을 택하였다.

    둘째로 대책회의는 참가단체의 조직력과 기획력을 동원하여 집회의 확장을 가능하게 했다. 대책회의가 등장하면서 촛불시위는 서울의 청계광장 외에 전국 100여 개 지역으로 확산되었는데, 이는 전국적인 네트워크를 가진 대책회의의 작용이라고 보면 틀림없다. 또한 6월 4일 한나라당이 지방자치 재보선에서 참패하는 정치적 계기가 형성되자, 대책회의는 6월 5일부터 3일간 ‘72시간 릴레이 국민행동’을 추진하는 등 집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5월 29일 처음 촛불시위에 나타난 ‘유모차 부대’는 촛불시위 기간 내내 찬반 논란에 휩싸였는데, 미국 쇠고기 수입 반대를 주도한 주부 대상 커뮤니티 카페에서 아이디어가 나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대책회의의 5월 30일 긴급운영위원회 사업 계획에도 ‘유모차 행진 준비’라는 기획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볼 때 유모차 부대의 지속적 조직에 대책회의가 관여했을 가능성이 높다.

    3. 대책회의의 한계

    촛불시위를 높게 평가하는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가 “집회현장에서 대중은 운동권에 대해 비우호적, 심지어는 적대적 태도를 보이는 등 전반적으로 불신을 표명했다”고 지적하고 있듯이 대책회의가 비조직적 대중들의 광범한 참여에 의해 오히려 일정한 제약을 받았다는 흔적도 나타난다. 

    집회 전반을 통제할 수 없다는 대책회의의 역량의 한계는 집회의 가두시위화에서 표출되었다. 5월 24일부터 26일 새벽까지 열린 촛불시위는 처음으로 심야 가두시위로 번져 나갔고 이런 양상은 향후 대체로 계속되었는데, 이는 대책회의의 평화집회 견지라는 원칙적 방침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조직화되어 있지 않은 다중이 집회에 참가할 경우 주최 측의 완벽한 통제는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특히 시위대와 경찰이 대치하면서 몸과 몸이 부딪치면 감정이 격해지기 때문에 속된 말로 성질 급한 사람들의 튀는 행동이 나오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번 촛불시위가 가두시위로 번지는 과정은 우발적이기보다는 일부 세력의 조직적 시도의 결과로 추측된다. 당연히 이들은 공권력과의 충돌을 유발하여 갈등을 격화시키는 방법으로 촛불시위를 반정권투쟁으로 끌고 가려는 목적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평화적 집회가 가두시위로 전환되자, 집회의 주제와 무관하게 폭력 그 자체를 즐기는 일부 사회파괴세력들의 일탈도 나타났다.

    처음 가두시위가 시작된 24일 밤 약 3,000여 명이 모인 집회 참가자 내에서 “촛불만 들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목소리가 나왔고, 그 후 약 500여 명이 거리로 나서게 되었는데, 특정 집단이 “거리로 나가자!”는 내부 선동을 준비하고 이를 위해 일정한 조직역량을 투입한 것으로 보인다. 대책회의 내부에는 강온의 노선 차이로 인한 갈등도 적지 않았는데, 집행부의 한축을 형성한 친북계열의 진보연대는 정권타도 투쟁으로 가자는 입장이었고, 시민단체를 대표한 나머지 한축의 참여연대는 가능한 합법노선을 선호하였다. 이 진보연대 계열의 세력들은 집회 참여자의 일부를 끊임없이 가두로 끌고 가려는 강한 욕망을 가졌을 것이다. 주최 측인 대책회의는 때때로 “청와대로 가자!”는 구호로 집회를 정리했는데, 이는 이런 내부 갈등의 타협의 산물일 것이다. 즉 이 구호는 편의대로 해석하여 구체적인 행동구호로 볼 수도 있고, 그저 상징의 전달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대책회의의 촛불시위의 정치투쟁화 시도 또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대책회의는 6·10항쟁 21주년, 6월 13일 ‘효순·미선양 6주기’, 6월 15일 ‘6·15 남북공동선언 8주년’ 등을 촛불시위의 집중점의 계기로 삼았는데, 6·10 항쟁 외에는 별 효과를 보지 못했다. 6·10 항쟁은 80년대 민주화운동의 상징이라는 점에서 널리 호응을 받았지만, 특히 6·15 공동선언은 촛불시위와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진보세력 그들만의 자의적인 발상일 뿐이었다. 실제로 6월 13일과 6월 15일 집회현장에서 대책회의는 자신들이 설정한 계기들과 관련된 특별한 이벤트를 거의 할 수 없었다. 결국 대책회의 집행부 내에 반미친북 경향이 상당히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촛불시위가 그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은 것은 대책회의의 장악력의 한계를 말해준다.  

    현 정부를 끌어내린다는 대책회의 내의 일부 강경노선 또한 결국 비조직적 대중들에게 접수되지 않았다. 촛불시위가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라는 주제에서 벗어나, 反정부투쟁 그 자체가 목적화되자, 점차 대책회의 그들만의 투쟁으로 축소되었던 것이다. “민주적 절차에 따라 선출된 정부를 출범 직후에 교체한다는 것은 대중적 설득력이 없다.”는 김종엽 한신대 교수의 주장처럼 좌파 내에서도 이른바 反이명박 투쟁전선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정권타도노선은 적절하지 않다는 견해도 적지 않았다.       

    4. 누가 촛불을 들었는가?

    광우병 촛불시위의 전개 양상과 참가자들의 구성에 대해 한마디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집회가 약 100여 일에 걸쳐 장기간 진행되었고, 정부의 대응과 대책회의의 맞대응, 국민 여론의 변화 등 여러 요인들이 영향을 주면서 국면의 변화들이 있었다. 예컨대 ‘광우병 촛불시위는 비폭력평화운동의 전형이었다.’, ‘탈정치적 생활운동이었다.’, ‘광우병 공포가 참여의 동력이었다.’ 는 진술과 그 역의 진술 모두 자신 있게 그렇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만큼 현실은 훨씬 복잡하고 다양했다. 특히 촛불시위가 특정 단체의 조직원들의 참여로 한정되지 않는 열린공간이었다는 사실은 몇 가지 이미지로 촛불시위를 단순화시키기 어렵게 만든다.
     
    우리가 광우병 촛불시위의 실체에 접근할 때 미국산 쇠고기에 대해 광우병의 위험이 높다고 믿게 된 사회현상과 그에 의해 파생된 촛불시위를 구분해서 보지 않으면 종종 혼란을 겪게 된다. 대규모 군중들이 모이는 집회의 형성과 지속과정은 사람들의 인식행위에 비해 더 많은 복합적 요소들이 개입되고, 우발적 변수들도 따르게 된다.

    특히 앞서 지적했지만 광우병 위험보다는 반정부 투쟁 그 자체에 관심을 가진 대책회의가 등장하면서 촛불시위는 시간이 흐를수록 미국산 쇠고기 수입이라는 본래적 주제와 멀어져 갔으며, 이에 연동되어 집회 참가자의 구성과 그들의 참여 동기도 변화를 겪는다. 촛불시위를 대책회의가 주관하면서 점화 당시 참가자의 주류였던 중고생들이 점차 빠져나가고 성인들의 참여가 늘어나는 구성의 변화가 나타났다. 집회의 책임을 자임한 대책회의는 당연히 초기에 조직력을 가동하는 열의를 보였을 것이며, 성인들이 대거 등장하자 자연스럽게 중고생들은 빠져 나갔을 것이다.
     
    촛불시위의 참가자는 일단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경찰 추산으로 2만 명 이상의 대규모 군중이 참여해 집중점을 형성했던 5월 31일(토), 6월 1일(일), 6월 5일(목), 6월 6일(금), 6월 7일(토), 6월 10일(화), 7월 5일(금)에 특별히 참여한 사람들과 수천 명 수준의 일상적 집회에 참여한 사람들이다. 일상적 집회에는 상대적으로 관심과 열의가 높고, 야간에 집회가 열리는 만큼 다음날 출근 부담이 덜한 사람들이 많이 참가했을 것이다. 실제로 지난 5월 2일부터 8월 15일까지 106일간 현장 검거된 총 1,397명을 직업별로 보면 이들 10명 중 2.4명은 대학생, 2.1명은 무직자, 1명은 자영업자였다. 이들을 합치면 연행자 10명당 절반 이상이 정상적으로 출퇴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었다.

    일상적 집회에 참가한 사람들 또한 대책회의 참여단체에 의해 조직된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로 나눌 수 있겠는데, 흥미롭게도 용산사건이 이 중 조직화된 사람들의 규모를 대체로 짐작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해 주었다. 용산사건 이후 연일 500여 명 규모의 도심시위를 벌이고 있는데, 이 중 대다수는 광우병 촛불시위의 적극 참여자임이 밝혀졌고, 특히 200여 명은 전문 시위꾼으로 경찰이 명단을 확보하고 있다고 한다. 이들은 대체로 민노당, 진보연대, 진보신당 등의 조직원들인데, 이들과 무관하게 실업 등의 이유로 사회불만 세력화된 일종의 룸펜들의 존재도 확인되었다.

    촛불시위를 높이 평가하는 입장에서는 대중들이 다양한 경로를 통해 자발적으로 참여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이른바 관제집회나 금전이 지급되는 용역집회가 아닌 이상 모든 집회의 참가자는 자발적이라는 점에서 아무런 차이는 없다. 차라리 80년대 합법적 집회공간이 열려 있지 않은 상황에서 검거의 위험을 감수하고 참여했던 사람들의 자발성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자발적 참여의 의미는 조직동원이 아니라는 점을 의미할 것이며, 바로 위에서 언급한 몇 개의 집중점에 다수가 모일 수 있었던 요인은 비조직 대중의 참여일 것이다.

    이런 집중점에 참가했던 사람들의 구성과 동기에 대해 조사한 엄밀한 자료는 존재하지 않으며, 이의 파악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다만 몇 가지 흐름은 감지할 수 있는데, 이를 정리해보자. 우선, 광우병 불안 또는 공포에 의한 참가자들이 있다. 이들이 단순히 공포만으로 집회에 참가한다고 볼 수는 없고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추진하는 정부에 대한 어떤 분노가 있었을 것이다. 권력에 의해 어떤 불의가 자행되고 있다는 인식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항의 수단 중의 하나인 군중집회의 참여로 이어지기 용이하다.

    둘째로는 경찰의 시위 진압에 대한 비판적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80∼90년대 학생운동 경험자들은 공권력의 행사 그 자체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는 정서적 경향이 있으며, 불법시위에 따른 경찰의 진압이 이루어지면 그 시시비비를 따지기 전에 공권력을 가해자로 몰아 버린다. 시위대가 내세우는 주장의 옳고 그름은 물론이고 그들이 선제적인 폭력을 행사하더라도 이들의 결론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 촛불시위가 가두시위 등으로 격렬해지자 경찰의 과잉진압이 이슈화되기 시작했는데, 이는 권위주의 정권 시대의 가두시위 경험자들의 정서를 크게 자극했을 것이다.
     
    셋째로 정부의 촛불시위 대응에 반감을 갖고 집회장으로 달려온 사람들도 적지 않다. 촛불시위에 대규모 군중이 처음 모인 5월 31일은 정부가 5월 29일 ‘미국산 쇠고기 수입 위생조건 고시’를 발표한 것이 계기가 되었음에 틀림없다. 이처럼 예를 들어 이명박 대통령이 “초를 누가 사줬는지 밝히라”는 데 화답하듯, 김경한 법무장관은 “뒤에서 종용하는 세력이 많다. 배후세력을 엄정히 처벌하라”고 지시하였고, 이에 어청수 경찰청장은 “시위대의 경로를 볼 때 치밀한 계획에 따라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고 말하는 등, 이른바 배후설도 촛불을 더 타오르게 만들었다는 평가가 가능하다.
     
    흥미로운 사실은 촛불시위가 범국민대책위의 주도하에 본격화, 정례화 되면서부터 미국산 쇠고기가 아닌 다른 이슈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의 시위 참가가 늘어났다는 점이다. 신동아 2008년 7월호에는 촛불시위 연행자들에 대한 인터뷰가 실려 있는데, 광우병 위험 때문에 시위에 참가했다는 사람들 외에도 ‘사는 게 힘들어서’, ‘수돗물 민영화 반대’, ‘전경의 과잉진압에 격분해서, ‘대통령의 국민을 섬기는 태도 부족’ 등 그 동기가 매우 다양했다.

    6월 10일과 같은 촛불시위의 최대 집중점에 참여의 큰 흐름을 형성했던 사람들은 80년대와 90년대 중반까지 학생운동에 직간접으로 참여했던 경험자들이었다. 이때 각 대학별, 학번별로 학생운동권 출신들의 동기회를 집회장에서 열자는 문자 메시지와 e메일 등이 엄청나게 유통되었다고 한다. 이들은 지난 2002년의 여중생추모 촛불시위, 탄핵반대 촛불시위에 가족단위나 대학동기들과 함께 참여했던 경험을 갖고 있으며, 과거 민주화투쟁의 기억이 중요한 참여 동기인 경우가 많았다. 80년대와 무관한 청소년들이 촛불시위 점화의 역할을 했고, 역시 80년대 운동권과 거리가 먼 사람들의 참여도 적지 않았지만, 집회의 계속성을 보장한 대책회의와, 몸과 마음 모두 시위에 잘 준비되어 있는 운동권 경험자들의 존재는 이번 촛불시위가 큰 틀에서는 80년대의 유산이라는 점을 말해준다. 

    5. 타 이슈로의 전이

    광우병 촛불시위가 본격화되면서 이 공간을 활용하여 다른 이슈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이는 마치 큰 시장이 열리자 너도나도 물건을 팔려고 나오면서 시장이 더 커지는 것처럼 촛불시위를 확대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현재 우리 운동은 소위 ‘5대 의제(건강보험, 공기업 민영화, 수돗물 민영화, 교육자율화, 대운하, 공영방송)뿐 아니라 한층 진보적인 의제를 포함한 다양한 과제들에 직면해 있는데, 이들 과제의 해결 하나하나가 우리의 민주주의를 지키는 동시에 세계자본주의의 변화에 얼마간 기여를 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라는 주장에서도 알 수 있듯이 진보 일반에서는 이런 현상을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광우병 이외에도 다른 이슈들이 다수 등장하였다는 현상을 평가하기 이전에, 우선 그 작동 메커니즘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런 현상이 “촛불항쟁의 밑바닥에는 탐욕스런 시장만능주의에 맞서는 민주주의, 건강한 삶이 위태로워진 시대에 맞서 생명과 인권을 존중하는 민주주의가 있다.”는 주장처럼, 즉 촛불시위에 참가한 사람들이 점차 정치의식화 되어 다른 이슈들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기보다는 애초 다른 이슈에 이해관계가 있던 사람들이 촛불시위의 공간을 활용했다고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대책회의가 이슈의 확산을 주도했다. 6월 15일 대책회의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에 덧붙여 다섯 가지 의제의 추가 제시를 통해 이명박 정부를 전방위로 포위한다는 전술을 선택하였고, 이를 놓고 촛불의 ‘변질론’과 ‘진화론’의 논쟁이 제기되었다. 대책회의의 박원석 상황실장은 7월 6일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명박 정부가 추진하는) 대운하, 의료 민영화, 공기업 민영화 등에 대해 1차적인 제동이 걸렸다”고 강조했고, 이 점은 그들의 실제 관심사가 어디에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이른바 5대 의제가 유재건의 주장처럼 “시장만능주의”의 예들이고 미국산 쇠고기 수입문제와 설사 관련이 있다 하더라도, 일반 국민들은 이런 추상적 접근을 통해 이념적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촛불시위의 의제확대적 해석은 진보세력의 주관적 희망에 불과하다고 보인다. 광우병 이외의 이슈들은 세 가지 측면에서 촛불시위와 연결을 맺은 것으로 분석된다. 첫째, 애초부터 이런 이슈들에 관심을 가졌던 개인들이 촛불시위의 장에 모였다는 것이다. 초기 참여자들인 중고생들의 경우 0교시 수업 부활 같은 현 정부의 정책에 대한 불만이 일정한 참여의 동기로 작용했으며, 앞서 『신동아』의 연행자 인터뷰에서도 ‘수돗물 민영화’가 참여 동기로 등장하고 있다.

    둘째, 이런 개별적인 사례와는 달리 특정 이해집단들이 촛불시위의 공간을 이용하는 차원에서 자신의 이슈를 들고 나온 경우이다. 대표적으로 민노총, 공기업 종사자들의 가족들, 화물연대 등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과는 무관하게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는 이명박 정권을 흔들어 놓아야 한다는 이해타산에서 촛불시위에 참가하였다. 대책회의의 참가단체인 화물연대는 고유가에 따른 이익의 감소를 보상하라고 파업을 하다가 미국산 쇠고기 운송거부를 선언했는데, 축산농가와는 달리 화물 운송과 같은 특정 직업군의 종사자들이 직접적인 이해관계도 없이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를 조직적으로 공유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이들이 파업전술 차원에서 촛불시위에 접근하였다는 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또한 촛불시위의 중반부터 공기업 종사자들의 가족들이 대거 참가했는데, 현 정권의 힘이 빠지면 공기업 민영화도 무산될 수 있다는 기대가 작용한 것이다. 민주노총 또한 대책회의의 핵심 참여단체로 총파업을 시도하는 등 조직동원을 통한 촛불시위 강화에 전력하였다. 민주노총은 현 정권을 약화시켜야 자신들의 기득권을 침해하는 노동정책을 견제할 수 있다는 정치적 계산서를 갖고 있었다.

    셋째, 이익집단은 아니지만 평소에 자신들이 진행하던 운동 이슈들을 촛불공간에 풀어놓은 사례들이 있다. ‘대운하반대시민연합’은 대책회의의 참가단체인데 시위현장에서 “대운하 반대!” 구호가 높은 빈도로 등장했다는 점에서 가장 성공적으로 촛불시위를 활용하였다. 물론 대운하 반대에는 대책회의도 전체 차원에서 큰 관심을 보였는데, 대운하건설이 반대여론이 더 우세한, 이명박 정부를 상징하는 정책이라는 점이 고려되었을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촛불시위의 절정기인 6월 19일 사실상 대운하 포기를 선언하여 촛불시위의 대형 이슈 하나를 제거하였다.

    아울러 조․중․동을 공격하고 공영방송을 지킨다는 차원의 운동이 광화문에 소재한 신문사들을 습격하고 조직적으로 광고주를 협박하는 단계까지 진행되었다. 조․중․동 메이저 언론사들을 반대하는 운동은 노무현 정권하에서 민관 합작으로 활성화 되었는데, 촛불시위를 계기로 재등장하였다. 과거 80년대 시위 현장에서 특정 언론사의 기자들이 취재 거부나 폭행을 당하는 등, 자신들이 벌이는 시위에 대한 언론사의 논조와 관련 시위자들이 다소 감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은 통상적이었다. 그러나 신문사 습격이나 광고주 협박과 같은 극단적인 행동은 이례적인 일이다. 특히 지난 정부에서부터 보수신문에 대한 반대운동을 벌여온 단체들은 ‘언론소비자주권 국민캠페인’ 카페를 개설하여 해당 언론사에 광고한 기업에 전화를 걸어 광고 중단을 요구하도록 선동했다. 이들은 기업체의 광고 담당자 전화번호뿐만 아니라 전화 요령 등을 상세히 소개한 글을 반복적으로 띄웠는데, 협박 전화를 많게는 하루 1,000여 통씩 받은 기업들도 있었다고 한다. 한편 지난 2월 19일 서울중앙지법은 작년 6월 조선·동아·중앙일보에 광고하는 기업들에 광고 중단을 요구하며 욕설·협박을 퍼부어 업무를 마비시켰던 네티즌 24명에게 전원 유죄를 선고했다.

    다른 한편 공영방송사들은 MBC PD수첩의 광우병 보도를 필두로 시종일관 촛불시위의 홍보기관을 자처했는데, 그로 인해 촛불시위대로부터 지지를 받아내는 이익을 챙겼다. MBC는 민영화 논란의 견제, KBS는 정연주 사장체제의 유지라는 나름의 이해관계가 걸려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촛불시위의 활용이 더욱 절실하였을 것이다.

    촛불공간을 자기 이념의 선전의 장으로 활용한 <다함께>라는 특이한 집단도 있었다. 이들은 국제사회주의자 경향(International Socialist Tendency) 즉 트로츠키주의를 신봉하는 그룹인데 김광일 운영위원은 대책회의의 집행부에 참여하여 구속되었다. 이들은 촛불시위가 벌어지면 참가자들에게 자신들의 선전물을 배포하는 데만 모든 관심을 기울였고, 이로 인해 단체이기주의라는 측면에서 집회참가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광우병 이외의 의제들 중 그 이전에 이미 널리 이슈화된 대운하문제, 특정 집단의 이해관계가 걸린 공기업 민영화를 제외한 수돗물 민영화 및 건강보험 민영화는 광우병 괴담과 거의 비슷한 수준의 거짓정보들을 통해 심각히 왜곡되기 시작했다. 수돗물 민영화는 지자체가 한국수자원공사에 관리를 위탁하는 시스템 구축이 그 핵심인데, 엄밀하게 말하면 한국수자원공사가 공기업이기 때문에 민영화라고 규정할 수도 없다. 2008년 12월 기준으로 전국 164곳 중 13곳의 지자체가 한국수자원공사에 상수도 관리를 위탁하였으며, 그 첫 단계인 기본협약을 맺은 지자체는 53곳이다. 수도사업의 전문화와 효율화를 위해 노무현 정부 때부터 이미 검토가 시작된 이 문제가 촛불시위 국면에서 왜 이슈화가 되었는지 의문이지만, 가정집의 수도 사용료가 수십만 원에 이를 것이라는 괴담 수준의 선동이 인터넷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적지 않은 국민들이 영향을 받았다.

    건강보험 민영화 또한 표현 자체부터 사실의 왜곡이다. 이는 주식회사 병원인 영리법인 병원의 설립을 허용하고 국민건강보험에서 지원되지 않는 MRI와 같은 고가의 의료검사들과 보철, 임플란트 같은 치과치료 등, 기존 의료보험의 사각지대에 한해 사보험 상품을 적극 허용하자는 주장으로 이 또한 노무현 정권하에서 이미 검토되었던 정책이다. 여기에 의료보험공단 노조가 반대하고 있는데, 나중에라도 국민건강보험체계로 들어올지 모를 영역이 사보험으로 가는 것, 사보험과 간접적이나마 경쟁이 이루어지는 것이 싫다는 철저히 자기이해추구의 논리에 따른 것이다. 나아가 진보세력들은 자신들의 이상인 무상의료 원칙을 침해한다는 것이 반대의 이유였다. 이 이슈 또한 마치 국민건강보험 전체가 해체되고 민영화되는 것처럼 거짓 선전이 난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