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철 국민주 사려고 하는데 형님, 돈 좀 빌려줄 수 있나?”

    피곤에 전 목소리였지만 그래도 밝은 기색이었다. 그러나 그게 마지막 동생과의 대화였다. 착한 막내였다. 공부도 곧잘 했다. 책을 좋아해 월급 대부분을 책 사느라 썼다. 그 밤 무슨 꿈을 꾸었는지 기억 못한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 지금도 믿어지지 않는 소식이 부산에서 전해졌다. 형이 잠들었던 그 새벽, 동생은 숱 검댕이로 변해 고통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얼마나 뜨거웠을까. 얼마나 아팠을까. 20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가슴에 묻은 막내 동생의 기억은 현재진행형의 아픔이다.

    대구시 신암동 사무실에서 만난 정유환(51)씨. 1989년 동의대사태 순직경찰 유족회 대표를 맡고 있다. 당시 순직한 고 정영환 경사의 형이다. 그가 내보이는 007가방 3개엔 저 세상으로 간 동생의 유품과 20여년 모아온 관련 자료들이 가득했다. 잊지 못해 아픈 생채기를 버리지 못하고 되레 쌓아간다.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뭘 바라고 시작한 유족회가 아닙니다. 매년 세 차례 유족들끼리 모여 서로 격려하고자 모인 것이 출발이었습니다”

    고인들의 기일이 된 5월 3일, 현충일, 1월 21일 경찰의 날 이렇게 세 차례 모였단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며 아픔 나누던 자리는 분노의 자리로 바뀌어갔단다. 정권이 바뀌며 경찰청 주관으로 치러지던 추모식은 3년 만에 중단됐다. 숨죽이고 있던 동의대 학생회 등은 말도 안 되는 억지주장으로 유족들의 가슴을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지난 2002년엔 민주화보상심의위에서 그들에게 빼낼 수 없는 대못을 박았다. 아들을 죽인 이들에게 “정의롭다” 말했다. 남편을 죽인 이들에게 “훌륭했다” 말했다. 동생을 죽인 이들에게 보상금까지 주었다.

    “민주화보상심의위의 심의 자체도 몰랐습니다. 객관적으로 심의를 하려면 당시 경찰의 수사 자료나 우리 유족들의 이야기도 청취해야 하지 않습니까? 경찰 측에 확인했더니 경찰에도 자료 요청이나 사실 확인이 없었답니다. 그냥 학생들 얘기만 듣고 일방적으로 결정한 겁니다. 공정성이라곤 애초부터 없는 결정이었습니다”

    기가 막힌 정유환씨 등 유족이 재심을 요구했다. 하지만 돌아온 답은 간단하고 차가웠다.
    “우리 보상심의위는 재심 절차가 없습니다”

    재심 없이 한번 결정하면 그대로 행정처분이 되는, 초헌법적인 절대권위의 기관이 심의위라는 것을 유족들은 그때 처음 알았다고 했다.

    돈 얘기는 껄끄럽지만 이것도 가슴에 쌓은 앙금의 하나라고 했다. 고 정영환 경사가 국가로부터 받은 순직 대가는 130여 만원. 당시 월 급여 33만원이던 고인의 4년 6개월 경찰근무 경력을 계산해 받은 돈이었다. 돈 가치가 20년 새 10배 올랐다고 해도 1300여 만원이다.

    “보상심의위가 동의대 학생들에게 지급한 평균 보상금이 2500만원이랍니다. 들리는 말에 따르면 중형을 받은 사람의 경우 수억 원을 줬다고 합니다”

    정유환씨는 한숨을 내쉬었다.

    민주화보상심의위 결정 이후 유족들은 헌법소원을 냈다. 대법 확정판결이 난 사건을 1개 위원회의 결정으로 뒤집는 것은 헌법 파괴라는 주장이었다. 3년을 끌던 헌법재판소 심의는 재판관 3명이 사퇴하는 우여곡절 끈에 나머지 9명이 5대4로 기각 결정. ‘유족은 이해당사자가 안 된다’는 것이 헌재의 논리였다. 유족이 안 된다면 영매 불러 고인의 혼과 대화하라는 얘기인지 납득할 수가 없었다.

    대통령에게 총리에게 탄원도 했다. 하지만 유족들의 간절함과 달리 돌아오는 답은 아예 없었다.
    돈 달라는 얘기가 아니었다. 훈장 더 달라고 떼쓰는 것도 아니었다. 나라를 위해 일하다 잃은 목숨, 그 명예만큼은 지켜달라는 최소한의 호소였다. 하지만 김대중 정부도, 노무현 정부도 차갑게 외면했다. 아니 오히려 가해자들을 풀어주고, 등 두드려줬다.

    “동의대 사건은 2심이 1심보다 형량이 높게 선고한 드문 경우입니다. 조사할수록 당시 학생들의 잔혹한 폭력이 드러났기 때문이죠. 1심에서 변론을 자처하고 나섰던 당시 노무현 문재인 등 13명의 변호인단도 1심 재판이 끝나자 모두 사퇴했어요. 사건의 출발이 시국사건이 아닌 학내 문제이고 도저히 승산이 없으니 발을 뺀 겁니다.”

    정유환씨는 “조금이라도 명분이 있었으면 변호인단이 왜 민주화투쟁 경력에 보탬이 될 변호를 중간에 그만두었겠냐?”고 물었다. 한나라당 전여옥 의원이 재심의 길을 여는 법안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에 유족들은 한줄기 빛이 보이는 느낌이었다고 했다. 사전에 유족 측과 아무 교감도 없었지만 무조건 고마웠다고 했다.

    “백주에 테러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놀랐습니다. 전 의원에 대한 테러이지만 저희 가슴에 비수를 꽂은 것이기도 하거든요.”

    정유환씨는 병문안이라도 가고 싶지만 오해를 받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마음으로 쾌유를 빌고 있다고 말했다.

    “전 의원 입법 추진을 계기로 동의대 사태에 대해 생떼를 쓰는 세력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고인들이 하늘에서 쉬지 못하고 다시 눈물 흘릴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메어옵니다.”

    정씨는 동생이 참사 하루 전 보내온 편지를 어루만지며 눈시울을 붉혔다.

    빛바랜 동생의 마지막 편지. 거기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이제 그만, 칼춤도 그만, 용공도 그만, 때려 부수는 데모도 그만. 우리 가슴에 모든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들일랑 진정 이제 그만, 그만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