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아일보 18일 오피니언면에 황상민 연세대 심리학 교수가 쓴 시론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숭례문이 방화로 처참하게 타버렸다. 국보 1호라는 문화재 하나 관리하지 못하는 우리의 처지가 새삼 놀랍고도 슬프다. 여기에 공무원들의 책임 공방, 핑퐁 놀이가 한창이다. 문화재청장, 소방방재청장, 서울시장 등은 각자 자신의 책임을 죄인인 양 사죄했다. 경비 책임을 다하려는 듯 경찰은 뒤늦게 경비업체를 압수수색하는 수선을 떤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일도 이것보다 나을 것이다. 숭례문 전소 후 바로 나온 대책이 복원이다.

    눈가림식 짝퉁 매뉴얼이 화(禍)잉태

    심지어 복원비 모금 이야기까지 나왔다. 이런 와중에 문화재청은 숭례문의 일부 잔해를 폐기물처리장으로 보냈다. 적어도 고위 공무원이나 방화범 모두 같은 마음인 것 같다. ‘복원하면 되잖아.’

    앞으로 문화재가 불타거나 망가지더라도 더는 놀랄 것 없다.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우리의 천박성을 다시 확인한다. 정말 복원만 하면 되는 것인가? 속에서 불이 난다. 어떻게 이런 일이? 큰일이 날 때마다 절로 나오는 탄식이다. 낙산사 화재 때도, 수원 화성 서장대 방화 때도, 또 얼마 전 태안 원유 유출 사고 때도 그랬다. 그때마다 우리는 인재(人災)라고 한탄했다. 누군가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누군가는 사표를 내면 책임을 다했다고 착각한다. 여기에 전문가들은 우아하게 시스템 부재를 논의한다. 그런 다음 모두 금방 잊어버린다. 적어도, 다시 인재라고 할 큰 사건이 날 때까지는.

    어이없는 사회 재난들이 계속될 때 우리는 ‘시스템 부재’를 지적한다. ‘시스템 구축’이 해결책인 양 이야기한다. 하지만 정작 그 시스템이 무엇인지, 어떻게 작동해, 어떤 결과를 만드는지는 관심 밖이다. 시스템 타령의 대표적인 예가 매뉴얼이다. 이번에도 ‘화재 위기대응 현장조치 매뉴얼’에 문화재 내용이 없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위기 매뉴얼이 있더라도 현장 업무에 무지하고, 시늉만 하는 훈련이라면 소용이 없다. 숭례문에 대한 구청의 관리 업무, 소방서의 화재 훈련도 분명 있었다. 한 번 휙 둘러보는 눈도장, 눈구경 훈련이었다. 화재 신고를 받은 소방관도 3분 만에 현장에 도착했다. 하지만 정작 화재가 난 건물 구조를 몰랐기에 방수 시설이 잘된 기와지붕에 그냥 물만 뿌렸다. 그동안에 건물 내부에서 불은 활활 타올랐다. 우리는 이미 짝퉁 시스템이 만들어진 사회에 살고 있다.

    짝퉁 시스템의 오작동 사례는 이미 태안 원유 유출 사고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해양 오염 사고 발생 사흘 내에 최대 2만 t의 방제 시스템을 구축했다고 정부는 자랑했다. 막상 그 시스템은 사흘 동안 1000t 정도의 기름도 수거하지 못했다. 짝퉁 시스템을 가진 우리의 자화상이다. 시스템 부재를 지적하고 이것을 보완하려는 노력은 지난 20년 동안 계속됐다.

    현장 나가지 않으면 또 태운다

    그사이 인재라는 사고와 재난도 계속 일어났다. 시스템을 매뉴얼로 알 때, 시스템은 단지 눈도장과 목도장의 표식이다. 문서나 어설픈 장비로 눈가림하는 짝퉁 시스템이다. 공무원들이 현장에 나가지 않고 서류로만 대충대충 합격, 통과 도장을 찍는 업무를 계속한다면 우리의 문화재는 계속 불타고 망가질 것이다.

    불타 버린 문화재를 복원만 하면 만사 해결이고, 책임을 다한 것이라고 믿는 지도자나 국민은 과거를 통해 미래를 볼 수 없는 눈뜬장님이다. 정말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물어보아야 할 때다. 뒷북이 아닌 ‘현재의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지금부터 확인하고 만들어야 하기에 우리가 할 일은 정말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