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일보 8일자 오피니언면 '시시각각'란에 이 신문 김두우 논설위원이 쓴 '칼날 위에 선 중도'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한국의 정치사에서 '중도'의 이미지는 부정적이었다. 굴복의 정치수사적 표현쯤으로 여겨졌다. 박정희 정권 말기인 1970년대 후반 야당 지도자였던 이철승씨는 '중도통합론'을 주장했다가 국민으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했다. 이후 정치인에게 중도란 말은 금기가 됐다. 30년이 지난 지금 '중도 개혁'이니 '중도 실용'이니 '신중도'니 하면서 중도를 외치는 목소리가 도처에서 들린다.

    왜 그럴까. 올해가 대선의 해이기 때문이다. 진보 내지 좌파세력의 집권 성적에 대한 국민의 실망이 깊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건 전 총리, 민주당, 정동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 여당 내 통합신당 창당론자 등이 새 판을 짜기 위해 중도를 외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현실정치의 상황을 떠나서 본다면 중도는 정도(正道)요, 대도(大道)요, 우리가 가야 할 길이다.

    중도는 중용이다.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잡는 것이다. 진보와 보수, 좌와 우의 극단을 피하고 충돌하는 두 개의 가치의 조화를 추구하는 것이다. 친미와 반미, 친북과 반북, 자유와 평등, 성장과 분배, 이상과 현실의 어느 한쪽을 절대시하면서 다른 쪽을 적대시하는 것은 중용이 아니다. 또 중도는 산술적 중립이나 기계적 중간이 아니며, 회색인의 도피처도 아니다. "이쪽도 괜찮아, 저쪽도 오케이" 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나아갈 길에 대해 고민하지 않거나 몸 보신을 최우선시하는 기회주의자의 비겁한 처세술일 뿐이다.

    그래서 중용은 어렵다. "칼날 위를 걸을 수는 있지만, 중용은 능숙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배명삼 영산대 교수는 중용을 낚시 찌에 비유했다. 찌가 바람과 물결에 따라 요동하는 것은 순응하는 것임과 동시에 바로 서려고 노력하는 과정이다. "흐르는 시간 속에서 변화하는 공간 속에서 곧추선 상태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중용이다. 바람과 물결에 순응만 하거나 요동조차 않으려 하면 찌는 쓰러지고 만다. 정치에서 찌는 국리민복이요, 미래에 대한 희망이다.

    중도는 조화다. 성장과 분배, 자유와 평등으로 양분할 수 없다. 성장이 필요하다고 복지를 도외시하거나, 복지를 확대한다고 성장을 외면하는 건 중도가 아니다. 시대와 국민의 요구에 따라 우선순위는 바뀔 수 있지만 다른 쪽을 완전히 포기해서는 안 된다.

    지금 중도의 정치를 외치는 이들이 좀 더 일찍 그러지 않았다는 것은 아쉽다. 대선에 임박해서야 중도라니 얄밉기도 하다. 그래도 지금이라도 중도를 선택한 것은, 진심이기만 한다면, 다행이다. 이 기회에 중도 진보의 노선을 굳게 세운다면 한국 정치사는 발전할 수 있다. 문제는 오히려 보수진영이다. 보수는 1997년과 2002년 대선에서 패배한 뒤 한때 중도로 다가올 듯하더니 어느새 본래 자리로 돌아가 버렸다. 현 정권의 실정에 대한 반사이익만으로도 집권할 수 있다는 오만에 사로잡혀 버렸다.

    보수가 이상적 비전으로 삼아야 할 우선적 내용은 자유주의적 가치다. 다원주의와 관용, 인권과 자율 등이다(박효종, '한국자유주의의 위기'). 그런데 북한 인권에 대해서는 목소리를 높이면서 정작 한국 사회 마이너리티의 인권에 대해서는 왜 침묵하는가. 좌파의 '우리 민족끼리'를 친북이라 욕하면서 국가지상주의의 극단에 서 있지 않은가. 가진 것을 빼앗기기 싫어 성장지상주의를 외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에 대한 반성없이는 집권한다 해도 분열을 치료할 수 없다.

    2002년 5월과 2006년 12월 여론 조사를 비교한 결과 스스로 진보라 생각하는 국민은 24.9%에서 18.6%로 6.3%포인트 줄고, 중도는 38.6%에서 45.1%로 6.5%포인트 늘어났다. 그런데 보수는 34.7%에서 36.3%로 1.6%포인트 증가하는 데 그쳤다. 변화와 반성을 모르는 보수, 무능한 진보에 대한 실망의 결과일 것이다. 대선은 이제 시작이다. 누가 더 중도에 다가설지의 경쟁이다. 그 세력에 45%의 '중도'국민이 표를 더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