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아일보 6일자 오피니언면 '광화문에서'란에 이 신문 허엽 문화부 차장이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19세기 미국 저술가 앰브로스 비어스가 쓴 ‘악마의 사전’(유소영 옮김·정민미디어)은 ‘비틀기’로 진실의 단면을 들춘다. 굴곡 많은 삶을 살았던 그의 싸늘함과 독설이 껄끄럽지만 풍자는 후련하다.

    그는 급진주의(Radicalism)를 ‘오늘의 문제에 투입된 내일의 보수주의’라고 썼다. 이 대목에서 수구로 불릴 만한 한국의 친북좌파가 떠오른다. 행정부는 ‘대통령이 당해야 할 주먹질을 대신 받아내도록 고안된 교묘한 추상적 존재’로 규정됐다. 장관이 국회에서 의원과 격하게 말싸움을 벌이는 풍경도 겹쳐진다.

    ‘집권 386 사전’에는 비어스처럼 비틀어야 제대로 보이는 말이 드러나고 있다. 개혁, 진보, 참여, (민주화)운동 등이 그것이다. 이 말들은 혈도(穴道·급소)를 누른 것처럼 상대를 꼼짝 못하게 하는 헤게모니가 있다. 집권 386은 이것을 쥐고 반대를 눌렀다. 정책 효과에 의문을 품은 공무원에게 “개혁하지 말자는 건가요?”라고 하면 ‘상황 끝’이다.

    진보의 뜻도 비틀어 보면 좌파의 동의어가 될 수 없다. 그 사이에는 거리가 분명하다. 진보는 진취적이며 젊고 앞서간다는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현 정권에서 좌파는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를 부르면서 우파에 진보의 상대어인 퇴보의 이미지를 덧씌웠다.

    기득권 지키기에 매달렸던 우파도 할말 없지만, 좌파가 득세한 한국 사회는 앞으로 나아갔는가. 좌파가 도덕적 정당성의 토대였던 과거에 매달리면서 그들이 내세운 진보는 사실상 ‘뒤로 돌아 앞으로 갓!’이 돼 버렸다.

    남시욱 세종대 석좌교수는 저서 ‘한국보수세력 연구’에서 한국에서 진보라는 말이 본격적으로 쓰인 것은 1990년대 후반 좌파통일운동단체가 우후죽순 결성되면서부터였다고 밝혔다. 이젠 정략적 목표를 품고 있는 ‘진보/보수’보다 ‘좌/우’로 구분하는 게 낫다. 그것이 ‘말만 진보’에 혹하지 않는 길이다.
    참여는 시민들이 공동체에 대해 주인 의식을 갖는 성숙한 사회의 특징이다. 현 정부는 스스로를 ‘참여정부’라고 불렀다. 지금 참여의 의미는 어떤가. 혹시 ‘뜻만 같은 이들의 모임’이 아닌가.

    참여를 내세운 이들의 현재 행태를 보면 그런 이미지가 현실로 다가온다. 일부 시민단체들이 이 정권에서 한자리씩 차지하면서 안타깝게도 참여는 시민 사회의 동력이 되지 못하고 있다. 참여에 대한 불신이다.

    운동의 뜻도 비틀어 봐야 한다. 운동권 출신으로 현 정권에 들어간 이들이 명분에 매몰돼 성과 없이 정쟁만 벌인 탓이다. 특히 원로 지식인 지명관 선생은 기자에게 “권력을 잡은 그들이 생계도 어렵지 않으면서 보상비를 주머니에 넣는 것을 보면서 뭐가 다르냐는 생각이 들더라”고 개탄했다. 그는 1970, 80년대 일본의 월간 ‘세카이’지에 국내 저항 지식인의 필독 칼럼이었던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을 연재했고 ‘5월 광주’의 실상도 전했다.

    ‘386 사전’에서 비틀어 봐야 할 말은 여럿 있다. 대통령에 대해 듣기 민망한 세간의 농담도 그런 것 중 하나다. 이 모든 게 ‘집권 386’이 개혁, 참여, 진보를 시대정신이라며 ‘남불자로’(남이 하면 불륜, 자신이 하면 로맨스)로 사용한 탓이다. 이 사전을 계속 들추자니 비어스의 사전 같은 냉기가 등 뒤로 엄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