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검찰에 불구속 기소되면서 동국대 교수직에서 직위해제된 강정구씨가 17일 스승의 날을 기념해 강연에 나서 또 한번 논란을 불러일으킬 전망이다.

    ‘국가보안법 폐지와 학문의 자유 수호 강정구 탄압반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라는 긴 이름을 붙인 단체가 동국대 학림관 소강당에서 주최한 이날 강연에서 강씨는 ‘나의 삶, 나의 학문론’이라는 주제로 가지고 자신이 좌파성향을 가지게 된 배경에 대해 설명했다. 강연에는 70여명의 학생들 및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강씨는 우선 자신의 삶에 대해 주변사람들의 평을 예로 들어 설명했다. 그는 “원광대 이재봉 교수가 ‘글을 어렵게 쓰면 수구꼴통들이 이해를 못해 표적이 안될텐데 글을 너무 고지식하고 쉽게 쓰는 탓에 주장이나 결론이 너무 명확한 나머지 수구의 표적이 된다’고 하더라”면서 이 교수의 평에 일단 수긍했다. 그는 ‘글투가 점잖치 못하다’는 이 교수의 지적에 대해서도 “나라의 상황이 절박하게 다가오고 사회를 제대로 인식했을 때 과연 부드러운 말투가 나오겠느냐”고 반문한 뒤 “적절한 어휘는 논란이 되더라도 써야 한다고 본다. 왜 말을 점잖케 해야 하는가. 말을 꼭 고상하게 쓰는 게 바람직한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고 말했다.

    그는 평택사태와 관련, “이 문제의 근원은 자발적 노예주의에 기원한다”고 주장하면서 “2003년 용산 기지를 평택으로 옮기는 구성단이 결성될 당시 미국과 협상 전에 10가지 원칙을 정했는데 그 중 하나가 이종석 통일부 장관과 노무현 대통령은 반미주의자이므로 이들의 개입을 최소화 한다는 것이었다”면서 “협상대표단이 과연 대한민국의 협상 대표단이 맞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강씨는 “가난하고 힘들었던 어린 시절의 삶이 세상의 불평등이나 문제의식을 바라보는 데 영향을 끼쳤다”고 소개하면서 “과거 김종필씨가 ‘박정희는 그야말로 경제를 부흥시켜서 대한민국을 부유하게 만들었고 전두환이 그것을 계승했고 노태우는 민주화의 전기를 마련했으며 문민정부인 김영삼 때는 그것을 이어갔다’는 말을 했는데 정말 정통성을 짓밟아도 이렇게 짓밟을 수 있는거냐”며 맹비난했다.

    강씨는 또 조선일보가 예술의 전당에서 열었던 ‘이승만 전시회’를 놓고 “초등학생까지 동원해서 관람하게 하는 등 나라를 일으켜 세운 국부로서 이승만 되살리기 운동을 하는, 역사를 배반하는 움직임에 분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면서 “당시 내가 토론회를 개최해 이승만에 대한 민족사적 평가를 했는데 조선일보와 정면 배치됐다”고 말했다.

    그는 남북정상회담과 관련, 또 한번 증오심을 표출했다. 그는 “6.15 공동선언 이후 2차 남북정상회담이 논의되고 구체화되는 시점에서 지금의 한나라당과 조선, 중앙, 동아 등 일부 보수언론에서 제기한 게 김정일 사과론인데 도대체 김정일이 왜 사과를 해야 한다는 것이냐”며 “정상회담에 사과하라는 합의는 없다. 느닷없이 사과를 요구하는 것은 공동성명에 위배된다. 김대중은 방북 할 때 사과 안 하는데 왜 김정일은 사과해야 하느냐 이는 상호주의의 위배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남쪽은 과연 잘못한 게 없느냐”고 반문한 뒤 “과거에는 간첩하면 북에서 남으로만 보내는 것으로 알고 그것이 보편적인 인식이었다”면서 “남파공작원과 북파공작원의 숫자를 비교해보면 확률상으로 남쪽이 더 많이 보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과연 남쪽은 잘못 없고 북쪽만 잘못 있다고 할 수 있겠느냐”고 주장했다. 강씨는 또 “한국전쟁에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100만명 정도의 사상자를 내고 한달 내로 끝났을 것이고 냉전체제로 돌입하지 않았을 것”이라면서 “미국의 개입으로 399만명의 사람들이 죽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이래 놓고도 미국을 생명의 은인이라고 하는 것은 전쟁에서 죽은 사람들에 대한 모독”이라는 논리를 폈다.

    한편, 이에 앞서 이날 오후 2시에는 동국대 졸업한 동문 일부가 강씨의 교수직 직위해제 철회를 요구하며 졸업장을 반납하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동국대에 95년 입학했다는 한 졸업생은 강연에 앞서 인사말을 통해 “학교측에서 졸업장을 받지 않았고 총장과 부총장도 만나지 못했다”면서 “학교가 강씨를 왜 직위해제 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답을 들을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