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민일보 25일자 오피니언면 '이진곤 칼럼'란에 이 신문 이진곤 주필이 쓴 '이념 양극화가 더 문제다'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아무리 세상이 시끄럽고 생활이 고단해도 과거가 아닌 이 시대에, 전쟁기가 아닌 평화기에 태어나 살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고 축복이다. 무슨 대단한 깨달음의 계기가 있었다는 게 아니다. 케이블 TV OCN이 매주 일요일 밤에 방영하는 ‘로마’를 보던 중에 문득 든 생각이다. 

    지난 시간엔 도망간 마그누스 폼페이우스를 뒤쫓아 이집트 원정에 나선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13세를 압박, 지배권을 장악해가는 과정이 그려졌다. 카이사르 앞에 이집트측이 내놓은 것은 쟁반에 담긴 폼페이우스의 목이었다. 밀랍 인형이겠지만 똑바로 보기가 거북하다. 이런 장면은 이어졌다. 카이사르에 의해 처형당한 폼페이우스 암살자와 이집트 왕의 신하 2명도 성벽에 효수되었다. 그런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던 게, 그리고 전쟁의 시기를 살지 않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물론 근대적 전쟁이 더 처참할 수는 있다. 특히 2차 대전 막바지에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가 참담하게 경험했던 원자탄의 폭발은 인류 절멸을 가능한 현실로 예감케 했다. 그러나 개별 인간에게 더 큰 공포를 주는 것은 전근대적 전쟁이 보여준 1대 1의 살해다. 이라크 무장 저항단체들이 이를 보복 수단으로 삼은 이유도 다르지 않다고 본다.

    우리는 그런 면에서는 천국에 사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그런데 순조롭기만 한 삶은 쉽게 권태를 안기는 듯하다. 빈곤 계층이 여전히 많기는 해도 국가적으로 말하자면 1980년대 이래 지금까지는 명실상부한 번영의 시대였다. 그렇지만 정신적으로는 어느 때보다 삭막해졌음을 너무 자주 고통스레 느끼게 되는 시절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18일 신년 연설을 통해 우리가 당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로 (경제적)‘양극화’를 지적했다. 옳은 인식이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이념적 ‘양극화’ 현상이 아닐지 모르겠다. 이념의 분화 자체는 나쁘다 할 게 전혀 없다. 오히려 이념의 다양성이야말로 민주사회의 전형적 징표다. 문제는 명분과 구호만의 분화일 뿐이라는 데 있다. 정치적이고, 대개는 전투적이기까지 한 구호와 수사가 범람하고 있지만 콘텐츠는 양측 모두 허약하다. 정치의 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치세력간 이념 대결을 두고 하는 말이다.

    길게 설명할 것도 없다. 노 대통령이 한나라당을 향해 대연정을 제의한 것 자체가 각각 진보 혹은 보수를 표방하는 정치세력간의 차이가 미미하다는 것을 뜻한다. 사실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은 이념 스펙트럼 상의 가까운 이웃이다. 그런데도 정책의 차이를 과장하면서 사생결단하고 있다. 정권 쟁탈전을 호도하려는 것이겠다. 사정은 이해할 수 있다고 해도 그 폐해가 너무 크다. 이 탓에 우리 사회가 진보-보수로 갈려 마치 불구대천의 원수나 된 양 싸우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고 앵무새처럼 ‘통합’을 말할 생각은 없다. 획일에로의 환원이라는 인상을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서로 다른 생각을 하나로 모으는 노력이 아니라 서로를 인정·존중하는 의식과 태도다. 공존 상생의 지혜를 배우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는 다양한 이념 주체들로서 어울릴 수가 있다.

    다행히 (이념적) 타협형 혹은 공존형 시민단체들이 속속 출범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신보수’ 단체들에 이어 신진보나 중도를 표방하는 단체들도 등장하고 있다(국민일보 1월23일 7면). 이들이 특별하게 새로운 이념을 표방하는 것은 아니라 해도 이념 투쟁의 교조성을 과감히 탈피할 여지를 가졌다는 점에서 희망적이다.

    우리가 서로 아끼지 않으면 누가 우리를 아껴주겠는가. 이념적 양극화의 벽을 넘어서면 경제적 양극화 해소의 길도 더 확연히 보일 것이다. 특히 정권과 정당들은 이념 논쟁의 구도 속에 주저앉음으로써 경제적 양극화 극복의 책임을 회피하려 한다는 인상을 주지 말아야 할 것이다. 국민의 삶보다 이념적 우월성을 앞세우는 정치세력이 설 자리는 갈수록 좁아질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