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민일보 21일자 오피니언면 '이진곤 칼럼'에 이 신문 이진곤 주필이 쓴 글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복수정당제는 의견의 차이를 전제로 한 제도다. 당연히 경쟁하는 상대 정당을 서로 인정하고 존중한다는 의식의 바탕 위에서만 (복수)정당정치는 가능해진다. 제도의 틀 안에서 성립되어 적법하게 운영되는 정당이라면 정강이나 정책목표 또는 활동방향과 행태가 감내하기 어려울 만큼 다르더라도 결코 상대방의 존재의의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차이가 클수록 경쟁 정당 존립의 가치가 더 크다고 믿어야 한다. 

    상식을 가지고 왜 이러느냐고 하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떠들어 알리려는 것이다. 상식을 ‘이상(理想)’으로 강조해야 하는 상황을 정상이라 할 수는 없다. 그런데 우리 정치권은 너무 오래 그 분위기에 젖어,극히 ‘비정치적인’ 사고,언행,방식 등을 ‘정치적인’ 것으로 믿고 있다. 거기서 그치는 게 아니라 그런 작태들이야말로 프로다운 정치기량이라고 으스대기까지 한다. 

    특히 위험한 것은 정치적 경쟁을 ‘선악의 대결’로 몰아가는 극단적 투쟁성이다. 언제나 자신을 선의 편에 두고 상대를 악의 편에 세워 단죄한다. 이런 사람일수록 언설이 단호하고 명쾌하다. 그만큼 선동의 효과도 커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런 의식은 비극적 상황을 초래할 위험성을 안고 있다. 사회 전체를 선과 악의 사활을 건 대결장으로 만들고 말 수 있다는 뜻이다. 

    집권당인 열린우리당의 정세균 의장이 일전에 “소수 기득권 세력만을 위한 수구 우파가 다음에 집권을 한다면 그것은 역사의 후퇴이며 심지어 재앙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당정 워크숍의 기조발제를 통해 한 말이다. 악의 화신 ‘수구 우파’에 대한 서슬퍼런 단죄였다. 물론 사정이 있기는 했다. 사학법 개정안 국회 통과를 빌미로 한나라당이 장외투쟁에 들어갔으니 강력한 반박 또는 견제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렇다해도 섬뜩하다. 우리가 역사를 후퇴시키고 나라와 민족에게 재앙을 안길 수 있는 세력들과 함께 살고 있다니! 정 의장이 알려줬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국민들은 그처럼 무시무시한 악의 세력이 우리 사회에 재앙을 안기고자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줄도 모르고 아무 생각없이 살아가지 않겠는가. “이제라도 알았으니 국민적 경계망을 구축하자!”는 사회운동이 일어날 법도 하다. 

    그 전에 할 일이 있다. 악의 세력, 수구 우파가 누구인지를 물어봐야 하겠다. 정 의장은 ‘소수 기득권 세력만을 위한’ 집단을 ‘수구 우파’로 지칭하고 있다. 그렇다면 ‘소수 기득권 세력’은 누구인가. 정치적·사회적 용어로는 ‘남보다 많은 부, 남보다 높은 지위를 차지한 사람들’을 가리킬 터. 그런데 그 속에서 정 의장이 보이니 문제다. 국회의원에 집권당 의장까지 맡고 있는 인사를 빼고 누구를 거기에 넣을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수구 우파가 아닌 진보 우파(이런 이름이 있을 수 있다면) 혹은 개혁 좌파라는 뜻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표현이 너무 거칠다. 경쟁 정당과 그 리더들을 재앙의 근원으로 매도해버린 후 정 의장은 도대체 누구와 정치를 할 것인지―.

    “박근혜·이명박 씨가 대통령이 된다고 나라가 망하지 않는다. 열린우리당도 국민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면 야당을 하는 것이고 야당을 못할 이유가 없다.”

    같은 당 유시민 의원의 언급이다. 지난달 이해찬 총리를 따라 중동을 순방하던 중 기자들에게 한 말이라고 전해졌다. 물론 야당의 유력 주자들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전제된 말이긴 하다. 그래도 ‘유 의원의 말’로는 예상밖이고 그래서 당 안팎으로 파장이 일기도 했다. 대단히 격렬하거나 시니컬한 발언으로 극단적 지지자와 반대자를 함께 몰고 다니는 유 의원이지만 민주 의식은 뚜렷해 보인다.

    민주정치는 선택의 정치라는 것을 그는 분명히 하고 있다. 즉 민주정치는 선이 악을 단죄하고 제거해가는 과정이 아니라 정기적인 선거를 통해서 끊임없이 더 나은 대안을 찾아가는 과정임을 강조한 셈이다. 평소의 인상과는 달리 ‘독선’도 없다. 누구든 국민의 지지를 받으면 집권을 할 수 있고 어느 정당이든 국민이 외면하면 야당이 된다는 상식을 확고한 신념으로 바탕에 깔고 정치를 하면 그게 곧 민주정치다. 

    “나만 옳다. 따라서 나와 내 동아리가 아니면 안 된다.” 미숙 정치의 전형적인 의식이 그것이다. 우리 정치가 오래 겪어온 굴곡도 주로 이런 사고에 기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