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완용 타령’에서 절벽을 본다

  • ▲ 류근일 본사 고문ⓒ
    ▲ 류근일 본사 고문ⓒ

       한미 FTA 비준 과정을 보면서 재확인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대화와 소통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이명박 시대가 어쭙잖은 ‘중도실용’과 장식용 ‘사회통합’ 운운을 내걸었었어도 돌아온 것은 국회의사당 최루탄 난동과 ‘매국노’ ‘뼈 속까지 친미’ 같은 험구(險口)였을 뿐이다. 이런 상대방과 소통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한미 FTA를 ‘식민지화’ ‘매국’으로 보는 것은 철지난 제국주의론, 종속이론의 잔재다. 조선왕조 말의 척화(斥和)의 잔재다. 제국주의 시대와 식민지 시대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오늘의 세계의 자유무역을 그와 똑같은 것인 양 몰아가는 일부의 ‘매국’ 운운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외마디 소리에 불과하다.

      소통이 불가능하다면 남은 것은 무엇인가? 투쟁밖엔 없다. 그들은 투쟁을 원한다. 대화를 원하지도, 가능하다고 보지도 않는 것은 오히려 그들이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타파와 쓸어내기와 변혁이다. ‘매국’과 무슨 공존인가? 그들이 이완용으로 낙인찍은 상대방을 사람 취급이나 할 것 같은가? 한미 FTA를 지지하는 쪽은 그들의 이런 자세에서 절벽을 봐야 한다.

      모든 정책현안에 반대는 물론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반대는 찬성 쪽도 존중해 줄 수 있는 일정한 논리적, 도의적 격(格)과 한계를 지켜야 한다. ‘매국’ ‘식민지화’ ‘뼈 속까지 친미’ 운운은 그런 격과 한계는 고사하고 총체적 적의(敵意)를 총체적 부정(否定)으로 난사하는 식이다.

      ‘합리적 진보’의 시각에서 비판하는 것도 일각엔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개방=이완용’은 불구대천(不俱戴天, 같이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이라는 소리다. 이건 ‘합리적 진보’의 비판이 아니라 내전적, 변혁적, 타파적 발상이다. 이완용은 비판의 대상이 아니라 박멸(撲滅)의 대상 아닌가?

      이게 우리의 현실이다. 꿈을 깨야 한다. 한미 FTA를 찬성하는 쪽은 상대방이 그들을 무엇으로 취급하는지를 똑바로 바라봐야 한다. 매국노 이완용, 그리고 매국노 이완용을 지지하는 사람으로 지목된 쪽의 투철한 현실인식이 필요한 시점이다. 상대방은 이완용과 공존할 의사가 있을 리 없는데도 그런 그들과도 어떻게 잘해볼 수 있다는 양 헛된 짝사랑 타령이나 하고 살 것인가? 찬물 먹고 정신 차려야 한다. 한미 FTA는 매국노도 이완용도 아니라는 투철한 확신을 견지한 채.

      중국과의 FTA도 언젠가는 논의될 날이 있을 터, 그런데 이를 찬성해도 ‘뼈 속까지 친중(親中)’ ‘친중 이완용’이라고 부를지 어디 두고 보자.

     류근일 /본사고문
    류근일의 탐미주의 클럽(cafe.daum.net/aestheticismclu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