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루먼이야말로 호국의 은인...미군 참전 결정했고 한국 포기 여론에 굴하지 않았다
  • 서울수복 61주년을 맞아 
      
    트루먼과 맥아더와 리지웨이를 잊으면 은혜를 모르는 민족이 된다. 
    趙甲濟    
     

  • ▲ 트루먼 대통령ⓒ
    ▲ 트루먼 대통령ⓒ
    어제(9월28일)는 1950년 9월28일 서울수복 61주년이 되는 날이다.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 원수가 지휘하는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한 것이 9월15일이었다. 미군과 한국군을 주력(主力)으로 하는 유엔군이 낙동강 전선에서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하고 있는 사이 맥아더는 간만의 차가 심해 상륙작전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인천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북한군의 背後(배후)를 차단했다. 유엔군이 서울을 수복한 것은 9월28일, 국군 3사단이 38선을 돌파하여 北進(북진)을 시작한 것은 10월1일이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맥아더의 神話(신화)가 한국인들의 가슴속에 남게 되었다.
    한국인들은 6·25 전쟁 하면 우선 맥아더를 연상한다. 아직도 많은 한국인들은 트루먼 대통령이 맥아더가 하자는 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북진(北進)통일을 하지 못했다고 오해한다. 그들은 맥아더가 중공군의 개입 후 한반도를 포기할 생각을 가졌고, 트루먼 대통령이 사방에서 오는 한국포기 압력을 견뎌냈다는 사실을 잘 모른다.
     
    맥아더는 한국을 구한 면도 있지만 한국을 絶體絶命(절체절명)의 위기로 몰아간 책임도 있다.
    맥아더의 ‘성공 뒤 실수’를 분석해보면 여러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오만은 반드시 代價(대가)를 치른다는 교훈이 첫째이다. 
        
    1. 맥아더는 정보판단에서 실패했다.
    그는 유엔군이 북진(北進)해도 중공군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誤判(오판)했다. 중공군이 개입을 준비하고 있다는 정보보고는 차고 넘칠 정도였다. 유엔군은 중공군이 만주로 이동하는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정보원이 중공군과 섞여서 같이 걷기도 했다. 맥아더는 1950년 10월15일 태평양상 웨이크 섬에서 트루먼 대통령을 만났을 때도 “중공군의 개입은 없을 것이다. 있다고 하여도 사상최대의 살육을 당할 것이다”고 보고했다. 맥아더의 정보참모는 찰스 윌로비였다. 이 사람은 맥아더가 이미 내린 판단과 어긋나는 정보, 즉 중공군이 대규모로 개입을 준비하고 있거나 이미 했다는 보고를 묵살했다.
     
    2. 맥아더는 정직하지 못했다.
    1950년 10월 하순 중공군은 매복하고 있다가 북진(北進)하는 국군을 쳤다. 수개 사단이 壞滅的(궤멸적) 타격을 입었다. 동시에 수많은 중공군이 포로가 되었다. 그럼에도 맥아더는 중공군이 대규모로 개입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미 약 30만 명의 중공군이 압록강을 넘어 들어와 布陣(포진)하고 있었는데도 맥아더 사령부는 그 10분의 1 정도로 추정했다. 맥아더는 명백한 사실이 등장했는데도 자신의 오판(誤判)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북진(北進)을 중단하고 새로운 전략을 수립하여야 했음에도 그는 한 달 뒤인 11월 하순 또 다시 무모한 총공격 명령을 내린다.
     
    3. 행동이 극단에서 극단으로:
    11월 하순, 중공군은 매복하고 있다가 함정으로 걸어 들어오는 유엔군을 총력으로 기습했다. 맥아더는 뒤늦게 현실을 인정한다. 맥아더의 엉터리 정보판단과 부정직한 태도로 해서 수많은 유엔군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중공군의 기습을 당한 유엔군은 싸우면서 퇴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맥아더는 서울까지 총퇴각 명령을 내린다. “크리스마스는 고향에서 보내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던 맥아더는 중공군의 한 번 기습에 놀라 싸우지도 않고 후퇴한다. 행동이 극단에서 극단으로 돌변한다.
     
    4. 변명만 했다.
    유엔군이 평양~원산에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중공군의 南進(남진)을 저지했더라면 38선까지 밀리지 않았을 것이라고 보는 이들이 많다. 맥아더는 중공군과 접촉을 피하게 하곤 총퇴각을 명령하여, 서울을 싸우지도 않고 내어준 뒤 수원 이남(以南)까지 물러났다. 미군 역사상 가장 긴 후퇴였다. 맥아더는 이 사이 변명만 했다. 그는 중공군의 개입이 없을 것이라고 오판(誤判)했던 점에 대해선 사과도, 인정도 하지 않고, 유엔군이 제대로 싸우지 못하는 것은 만주 폭격을 트루먼 정부가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워싱턴을 향하여 증원군을 보내주지 못하겠으면 한국에서 철수시켜달라고 협박했다. 대만 군대를 중국본토에 상륙시키자는 제안도 했다. 당시 대만 군대는 軍律(군율)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엉터리들이었다. 이들이 중국 본토(本土)에 상륙하면 싸우기도 전에 항복할 가능성이 높았다. 맥아더는 중국을 공격하자는 제안도 했다. 한국전선(戰線)에서는 싸우지도 않고 중공군에 땅을 넘겨주고 있으면서 중국과 정면대결하자고 한 것이다.
     
    5. 맥아더는 서부전선과 동부전선의 작전 지휘를 분할했다.
    서부전선은 8군 사령관 워커 중장, 동부전선은 10군단장 알몬드 장군이 맡았다. 맥아더는 알몬드를 편애했다. 통합작전이 불가능해졌다. 한미(韓美)연합사가 해체된 상태에서 전쟁이 일어난다면 똑같은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국군과 미군의 통합작전이 어렵게 될 것이다.
     
    6. 맥아더의 속셈은 중국을 수복하여 '아시아의 시저'가 되는 것이었다.
    그는 중공군이 개입한 것을 기회로 삼아 전선을 중국본토로 확대시키려 했다. 트루먼은 이를 허용할 수 없었다. 그런 擴戰(확전)을 뒷받침할 만한 군사력이 없었다. 맥아더는 극동만 보고 있었지만 트루먼은 자유세계 전체를 지켜야 했다. 그때 소련은 原爆(원폭)실험에 성공한 상태였다. 미국은, 가장 많은 인구를 가진 중국을 상대로 전면전을 치를 수 있는 힘도 국가적 의지도 없었다. 트루먼은 맥아더가 하자는 대로 중국을 친다면 소련이 중국 편에서 개입할 것이고, 핵무기를 쓰는 3차 대전으로 확대될 것이라고 보았다.
    트루먼이 확전(擴戰)을 결심했더라면 핵(核)을 쓰는 3차 대전이 일어났든지 월남전보다 훨씬 큰 규모의 미중(美中) 전쟁이 중국 본토에서 계속되었을 것이고 결국은 미국이 이기지 못했을 것이며, 미군철수 과정에서 한반도는 포기되었을 것이다. 트루먼이 勝者(승자)도 敗者(패자)도 없는 제한전을 통하여 한국에서 확보한 것은 남한과 평화였다. 한국과 미국은 휴전 뒤 한미(韓美)동맹을 구축, 이 평화의 시기를 선용(善用)하여 북한군의 재(再)남침을 저지하고 한국의 번영과 북한의 몰락을 불렀다.
     
    7. 위기에 빠진 한국을 구한 것은 교통사고로 죽은 워커 8군 사령관의 후임 리지웨이 장군이었다.
  • ▲ (워싱턴=연합뉴스) 박상현 특파원 = 1950년 전장을 순시하는 맥아더 사령관. 가운데 인물은 리지웨이 사령관ⓒ
    ▲ (워싱턴=연합뉴스) 박상현 특파원 = 1950년 전장을 순시하는 맥아더 사령관. 가운데 인물은 리지웨이 사령관ⓒ

    그는 1951년 2월 반격작전을 펴 3월15일 서울을 수복하고 중공군을 38선 이북(以北)으로 밀어 올렸다. 맥아더는 리지웨이가 반격작전을 시작하기 전에 한국전선으로 날아와선 기자들 앞에서 자신이 반격을 명령하는 형식을 취하여 부하의 功(공)을 가로채려 했다.
     
    8. 맥아더는 文民우위의 전통을 무시했다.
    그는 유엔군 사령관으로 있으면서 공개적으로 트루먼 행정부의 정책을 비판했다. 대통령의 발언중지 명령도 무시했다. 트루먼 대통령이 抗命(항명)한 그를 해임한 것은 당연한 정도가 아니라 너무 늦었다는 평을 받았다.
     
    9. 웅변 뒤의 몰락:
    맥아더는 귀국하여 영웅 대우를 받고 미(美) 의회에서 감동적인 연설을 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여론의 십자포화를 맞았다. 그러나 이것이 맥아더의 마지막 攻勢(공세)였다. 그 직후 열린 미(美) 의회 청문회에서 맥아더는 민주당 의원들의 집중공격을 받고 무너졌다. 그는 거짓말하는 장군, 무책임한 장군, 세계 정세를 아주 좁게 보는 장군이라는 인상을 남겼다. 맥아더가 공개적으로 피력했던 핵심적인 주장들이 사실이 아니란 점이 폭로되었다. 맥아더는 한때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으나 이 청문회 이후 여론의 지지는 사라졌다. 1952년 선거에선 아이젠하워 장군이 공화당 후보로 나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아이젠하워는 한때 맥아더의 副官(부관)이었다. 그는 맥아더보다 훨씬 원만하고 민주적인 사람이었다.
     
    10. 맥아더의 정보판단이 얼마나 엉터리였는가를 증명하는 에피소드가 있다.
    모택동(毛澤東)은 당초 한반도로 出兵(출병)하는 중공군 사령관에 林彪(임표)를 임명하려 했다. 임표(林彪)는 稱病(칭병)하곤 이 제의를 거절했다. 모택동은 彭德懷(팽덕회)를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맥아더는 중공군과 싸우면서도 수개월 간 사령관이 임표(林彪)라고 오판했다. 자신이 상대하는 敵將(적장)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싸운 것이다. 요사이 한국전사(韓國戰史)를 쓰는 미국인들 중엔 맥아더가 인천상륙 작전 직후에 죽었더라면 영원한 영웅으로 남았을 것이라고 아쉬워하는 이들도 있다. 그랬더라면 한국은 통일되었거나 휴전선이 평양~원산으로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11. 맥아더의 실패는 거의가 명예를 추구하는 그의 권위주의적 성격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측근들을 ‘예스맨’으로 채웠다. 그들은 맥아더가 싫어하는 보고를 하지 않았다. 그들은 일본의 황제나 다름없는 맥아더를 둘러싸고 안락한 도쿄에 앉아서 한반도 지도를 상대로 하여 전쟁을 지휘했다. 嚴冬雪寒(엄동설한)의 한국전선은 맥아더와 그 측근들에겐 실감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맥아더는 전쟁을 지휘하면서 하루도 한국에서 잔 적이 없다. 맥아더는 언론(言論) 타기를 너무나 좋아했다. 그의 쇼맨십은 그의 무덤이 되었다.
     
    12. 워싱턴의 美 국방부, 合參(합참)도 맥아더의 실패에 책임이 있다.
    미국 군부의 지도층을 형성하고 있던 장군들은 거의가 맥아더의 훨씬 후배들이었다. 그들은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인기가 치솟은 맥아더를 견제하려 하지 않았다. 맥아더가 이해할 수 없는 戰略(전략)을 펴도 이를 방치했다.
     
    13. 한국인들은 맥아더를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강하다.
    맥아더의 그늘에 가려서 두 사람이 과소평가 받는다. 트루먼과 리지웨이이다. 미군의 참전을 결정했고, 중공군 개입 후에도 한국 포기 압력을 거부했던 트루먼이야말로 정말로 한국을 살린 사람이다. 트루먼의 동상, 거리이름, 공원이름도 없다. 많은 한국인에게 맥아더는 이순신, 트루먼은 원균이다. 영웅을 만들기 위해서 꼭 惡黨(악당)을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한국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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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 때 맥아더가 하자는대로 하였더라면 
    가디스 교수: 한반도는 원폭투하장이 되고 제3차대전으로 갔을 것
     
    趙甲濟   
      
    6.25 남침전쟁 때 맥아더는 공(功)보다 과(過)가 더 크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인천상륙작전의 공(功)이 크긴 하지만 중공군 개입 움직임을 알고도 덮어버린 점, 1950년 10월말의 첫번째 중공군 기습을 '정찰활동' 정도로 과소평가하고 한 달 뒤 다시 진격하다가 대반격을 부른 점, 중공군 남진(南進) 개시 후 "중국 폭격, 원폭 사용 등 대규모 지원을 해주지 않으면 한반도에서 철수해야 한다"고 한국포기론을 건의한 점 등이다. 유엔군이 압도적 병력으로 개입하였으므로 인천상륙작전이 아니라도 북진(北進)은 기정사실이었다. 트루먼 대통령이 맥아더의 원폭(原爆) 사용 건의를 거절하여 한반도의 통일을 막았다고 오해하는 사람들에게 아래 글을 권한다.
     
    <1950년 11월30일 워싱턴에서 트루먼 대통령은 기자회견을 열고 있었다. 중공군은 북한지역에서 총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맥아더 장군이 지휘하는 유엔군은 남쪽으로 총퇴각중이었다. 트루먼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항상 그러했던 것처럼 군사적 상황에 대처하기 위하여 무슨 조치라도 취할 것이다."
     
    한 기자가 물었다. "원자폭탄의 사용까지 포함한 말씀입니까?"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모든 무기를 다 포함해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전선(戰線) 사령관이 무기의 사용권을 갖고 있습니다. 관례에 따라서."
     
    이틀 뒤, 트루먼 대통령이 위임한대로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은 미(美) 공군에 명령하여 다섯 개의 원자폭탄을 남진(南進)하는 중공군을 향해서 투하하도록 했다. 15만 명의 중공군과 공산군에 포로로 잡힌 수 미상의 미군과 한국군 병사가 죽었다. 중공군의 남진(南進)은 저지되었다.
     
    유럽의 NATO(북대서양조약기구) 국가들이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미국 정부가 자신들과 사전에 협의하지 않은 데 대해서 분노했다. 직후 미국은 유엔 안보리에서 거부권을 행사하여야 했다. 6개월 전에 있었던 한국방어 유엔결의를 취소시키자는 제안에 동맹국들도 동조했기 때문이다.
     
    스탈린의 소련은 모택동의 중공(中共)으로부터 원자폭탄을 사용하여 보복해달라는 압력을 받았다. 소련이 모택동의 요구를 거절하면 국제공산주의 사회에서 소련의 리더십은 결정적인 타격을 받을 것이다.
     
    소련은 미국 정부에 최후통첩을 보냈다. 48시간내에 한반도에서 모든 군사적 행동을 중지하든지 '가장 심각한 결과를 각오하라'는 것이었다. 12월4일 시한(時限)이 지났다. 두 대의 소련 폭격기가 블라디보스톡에서 이륙했다. 원시적이지만 작동가능한 원자폭탄을 싣고 있었다.
     
    목표는 미군의 보급기지인 인천과 부산항이었다. 원폭이 투하되었다. 약30만 명이 죽었다. 보급기지의 기능은 사라졌다. 맥아더는 즉각 일본에 있던 미군 폭격편대에 대해서 블라디보스톡과 심양, 그리고 하르빈에 원폭(原爆)을 투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원폭투하가 이뤄지자말자 일본에선 반미(反美)데모가 일어났다. 일본은 소련 폭격기의 행동반경 안에 들어 있었다. 영국, 베네룩스 3국, 프랑스는 NATO에서 탈퇴한다고 발표했다. 소련은 서독(西獨)의 프랑크푸르트와 함부르크에 원폭(原爆)을 투하했다.
     
    물론 위의 글은 사실이 아니다. 트루먼 대통령의 기자회견만이 사실이다. 트루먼은 영국 정부 등의 항의를 받고 위의 기자회견 내용도 취소해야 했다. 그는 "한국에서 원자폭탄을 사용할 계획이 없다"고 공언했다.>
     
    위의 글은 동서냉전사(冷戰史)를 다룬 미국 예일대학의 존 루이스 가디스 교수의 '냉전(冷戰)-새로운 역사'에 실려 있다. 이 책은 냉전을 가장 권위 있게 정리한 명저(名著)로 꼽힌다. 미국이 한국전쟁 때 중공군의 남침을 저지하기 위하여 원자폭탄을 썼어야 했다는 주장을 하는 이들에게 참고가 될 만한 假想(가상)이다.
     
    트루먼은 맥아더가 하자는 대로 하면 제3차 전쟁이 터진다고 생각하여 한반도에서 무승부 전략을 세웠다. 그 뒤 휴전선으로 분단된 한반도에서는 '어느 체제가 민족을 행복하게 만드느냐"라는 명제를 내건 새로운 형태의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 이 전쟁에서 남한은 이기고 있으나 내부의 적(敵)이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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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을 사모아 群島로 옮겨라"

    1950년 12월 미국은 한국 포기 계획을 세운다.

    趙甲濟

    1982년에 나온 '한국전 비화(韓國戰 秘話)'(조셉 C. 굴든. 타임스 북스)는 약 700페이지의 대작(大作)이다. 1950년 11월 말 중공군의 총공세 직후 미국 정부의 당황한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맥아더 사령관이 총퇴각을 명령하자 미국 국무부와 국방부(합참)는 한국을 사수(死守)할 것인가, 유엔군을 철수시킬 것인가로 연일 회의를 한다. 맥아더는 만주 폭격, 대만군 투입, 중국 해안 봉쇄, 증원군 파견을 요청하고 이게 받아들여질 수 없다면 한국에서 철수하는 게 좋겠다고 건의한다. 트루먼 행정부는 "미리 철수하면 안 된다. 싸우다가 질 경우에 한하여 철수를 허가한다"는 입장이었다.

    미국 합참 기획부서는 한반도에서 미군이 철수할 경우에 대비, 한국군과 한국인들의 처리 문제로 고심하였다. 합참은 일단 한국인(군인 포함) 32만8,000명을 해외로 데리고 가기로 한다. 문제는 이들을 어디로 옮기느냐였다. 일본은 제외되었다. 조총련이 활동적이고 한일(韓日) 민족감정이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고 보았다. 미국령 사이판과 티니안도 제외되었다. 미군 기지의 안전이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미(美) 합참이 잠정적으로 결정한 곳은 서(西)사모아 군도(群島)의 두 섬, 사바이와 우폴루였다. 두 섬은 약 800평방킬로미터이고, 인구가 1평방 마일 당 68명이었다. 합참은 이곳에 30여 만명의 한국인을 이주시켜 '뉴 코리아'를 만든다는 계획을 확정하였다. 이 계획을 비밀에 붙인 것은 새어나갈 경우 정치적 심리적 악영향을 끼칠 것이기 때문이었다.

    1950년 12월 유엔군이 중공군에 밀려 남하(南下)하는 가운데 트루먼 대통령은 국가비상사태까지 선포하고 최악(最惡)의 경우를 상정한 계획을 세웠다. 막후에선 중국을 달래 휴전을 얻어야 한다는 움직임도 일어났다. 당시 워싱턴의 고위층에서 진행된 회의록 어디를 읽어봐도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이나 한국군의 의견을 묻는 장면이 보이지 않는다. 한국인의 운명이 한국인의 개입 없이 논의되고 있었다.

    1951년 1월 서울을 빼앗긴 국군과 유엔군은 수원까지 후퇴하였다. 이 무렵 유엔은 미국의 동의하에 중국에 현위치 휴전을 제의한다. 이때 중국이 이 휴전안을 받아들였다면 한반도는 수원~울진 선(線)에서 분단되고 한강 유역과 서울은 북한으로 넘어갔을 것이다. 중국은 부산까지 밀고내려갈 수 있다고 오판(誤判), 유엔의 휴전제의를 거부하였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알았더라도 손을 쓸 수 없었겠지만) 우리의 운명이 몇 번 지옥 문턱까지 갔다가 살아돌아오곤 하였다.

    한국 사수(死守)냐, 포기냐의 고민을 일거에 해결해준 사람은 매튜 리지웨이 신임 미8군 사령관이었다. 교통사고로 죽은 워커 중장 후임으로 부임한 그는 1951년 2월 반격작전으로 나와 서울을 수복, 전선을 38선 북쪽으로 밀어올렸다. 이때부터 한국포기론은 들어가고 휴전협상이 시작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