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형구(刑具)를 좌우에 벌려두고 심문을 받을 때 여러 악형(惡刑)을 써서 몇 번이나 죽을 지경에 이르렀고 정신이 혼미해져…."

    14일 법원도서관(관장 이동명)이 발간한 조선고등법원판결록 제7권에는 일제 강점하에서 대한광복회를 주도적으로 이끌다 사형선고를 받은 채기중 선생에 대한 참혹한 고문의 흔적이 드러난다.

    1913년부터 독립군 양성을 위한 군자금 모금에 주력했던 선생은 대한광복회의 일원으로 활발하게 활동하다 친일 부호를 살해한 혐의로 기소됐고 결국 사형이 확정돼 1921년 48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선생은 현재의 대법원 격인 고등법원에 상고하면서 "공주경무부도 형구를 좌우에 벌려두고 `여러 가지로 변명하지 말고 묻는 대로 답하고, 조금이라도 서로 다른 점이 있으면 즉시 맞아 죽을 것'이라고 협박했으며 재판소에서도 심신이 혼미하여 몸을 가누기 어려웠다"고 토로했다.

    그러나 고등법원은 "기록 중 경찰관서에서 피고인을 심문하면서 고문 또는 위협을 가하였다는 것과 같은 흔적은 존재하지 않는다"며 선생의 주장을 일축하고 사형을 확정했다.

    3ㆍ1만세운동으로 촉발된 시위에 참가했다가 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된 이들의 상고이유에서도 일제의 잔혹한 탄압에 대한 증언이 담겼다.

    서울 남대문역 앞 만세시위에 참여했던 어대선 선생은 상고이유서에 "군중이 만세를 높이 불러 피고인이 그에 참가하려 하자마자 경관이 격분하고 발검하여 남녀학생을 난타하여 유혈이 낭자하고 거의 죽는 상황을 목격했다"고 적었다.

    같은 시위에 나갔다 기소된 백관형 선생은 상고이유를 통해 "일본은 러시아와의 선전포고 중 한국 보호를 언급했는데 을미사변이 있었고 경술년에 강제로 총독정치를 시행해 천지를 속였다"며 "옛 땅을 회복해 인도(人道)를 세우는 것은 금수의 부류를 면하려는데 있으니 어찌 (조선의) 부흥을 도모하려고 한 자를 처벌할 수 있겠는가"고 꾸짖기도 했다.

    책에는 1910년 평양법원 판사로 발령을 받았다가 경술국치 후 일제의 식민지 관리가 되지 않겠다며 관직을 버리고 만주로 떠났던 박상진 선생이 채기중 선생과 같은 혐의로 기소돼 사형 확정 판결을 받은 기록도 함께 실렸다.

    법원도서관은 1909년부터 1943년 사이에 있었던 민ㆍ형사 사건의 판결을 2004년 번역하기 시작했으며, 현재 1920년 판결까지 모아 국역본을 발간했다. (서울=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