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법관의 양심이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위험하고 불리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유죄면 유죄, 무죄면 무죄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다. 1950년대 말, 서울지방법원의 류병진 판사는 자유당 정권의 서슬 푸른 위세와 당시의 고압적인 전후(戰後) 사회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진보당 사건 피고인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단지 조봉암 피고인에게만 총기 불법소지등 비(非)정치적인 공소사실과 관련해 5년형을 선고했을 뿐.
     
    법관의 참 용기란 그런 것이다. 온 세상이 한 쪽으로만 흘러가도 자신만은 법적 소신에 따라 다른 한 쪽으로 판결을 내리는 것. 이에 비한다면 오늘의 '소장 판사'들은 과연 어떤가?
    그들은 우선 신영철 대법관이 문제의 이 메일을 보냈을 당시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그런 사실이 밖으로 새어나오면서부터 비로소 떠들기 시작했다. 여론을 등에 업고서야 말을 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이게 과연 위험을 무릅쓴 사즉생(死卽生)의 고독한 결단인가?

    류병진 판사는 자신의 목숨을 건 판결 때문에 세상의 핍박을 받고 법관 연임제에 걸려 판사직을 떠나야 했다. 오늘의 소장 판사들은 과연 그런 핍박의 위험에 몰려 있는가? 아마도 정반대일 것이다. 그들에게는 오히려 포퓰리즘 세상의 출세가 보장돼 있는지도 모른다.

    둘째, 그들은 집단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왜 그들은 혼자서 광야의 소리를 지를 줄 모르는가? 왜 떼거지로 움직이는가?
    그것은 법관의 자세가 아니라 운동적, 정치적 자세 아닌가?. 스피노자는 안경 렌즈를 닦으며 이른바 대세라는 것을 거부한 상태에서 자신의 철학을 담아냈다. 법관도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 집단의 힘을 동원해서, 그리고 그때 그때의 유행적 대세에 힘입어 여론 몰이를 하는 것-이것 하나만으로도 소장 판사들의 행동양식은 비(非)법관적이고, 반(反)법관적이다.

    소장 판사들은 지금 '촛불'식으로 사고하고, 행동하고 있다. 바로, 주관적인, 대단히 주관적인 양심 위주로 흥분해 있다.
    적중(的中)은 객관주의 일변도에도 있지 않지만, 주관주의 일변도에도 있지 않다. 소장 판사들은 '법관의 독립성'이라는 것을 '법관의 주관주의 마음대로'로 환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어떻게 법을 자신의 주관주의적 취향에 맞아야만 하는 것인양 말하는가? 법은 개개인의 다양하고 상이한 양심을 초월하는 측면도 아울러 포괄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신영철 대법관 행위가 100% 옳았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신 대법관에게도 그 나름의 '책잡힐 구석'은 있었을 수 있다. 그러나 그의 흠결이 소장 판사들의 또 다른 흠결을 정당화 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또 하나 반드시 집고 넘어가야 할 사항-그것은 다름 아닌, 이용훈 대법원장, 바로 그이다. 노무현은 확실히 그 자신을 위해, 그리고 그 자신에 맞게, 사람을 골라도 너무나 잘 골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