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일보 19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손장환 기획취재 에디터가 쓴 '에디터 칼럼', "괴담 공화국"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괴담(怪談)은 말 그대로 '괴이한 이야기'다. 사전적 의미에 충실한 괴담이 가장 많은 나라는 아마 일본일 것이다. 일본은 '800만 신(神)이 있는 나라'로 불린다. 모든 것에 요정이나 요괴가 있다고 믿는다. 돌의 요정, 물의 요정, 숲의 요정 등. 몇 년 전, 한국에서도 인기가 많았던 일본 만화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바로 800만 요정 이야기가 나온다. 치히로가 일하는 여관에 밤마다 800만 요정이 쉬러 온다는 내용이다. '이웃집 토토로'의 토토로는 도토리나무의 요정이다. 1970년대에 인기를 끌었던 '요괴인간'은 2006년 일본에서 리메이크되기도 했다.

    1904년, 라프카디오 헌이란 영국의 저널리스트가 『괴담』이라는 소설을 발표했다. 일본인 아내로부터 전해 들은 일본 전래민담을 소재로 한 괴기소설로 일본에서는 괴담을 아름다움으로 승화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65년에는 고바야시 마사키 감독이 이 내용을 바탕으로 '괴담'이란 영화를 찍어 칸 영화제에서 특별상을 받았다. 귀신이나 요정 이야기는 어느 나라에나 있지만 그 다양함에서 일본을 따라갈 수 없다.

    한국은 어떤가. 처녀귀신, 몽달귀신, 구미호 이야기가 대표적이고 다양한 도깨비 이야기도 전해 내려온다. 꼭 10년 전인 98년에 '납량 특집'이나 '전설의 고향' 수준을 뛰어넘는 괴담 영화가 등장했다. '여고 괴담'이다. 무명 배우들에다 여름도 아닌 5월에 개봉한 이 영화는 예상을 깨고 2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 당시로서는 엄청난 '대박'을 터뜨렸다. 어느 학교에나 있을 법한 평범한(?) 귀신 이야기였지만 입시에 한을 품은 여고생의 복수라는 내용이 학생들의 공감대를 이끌어냈다는 분석이었다.

    요즘 우리 사회에는 온갖 괴담들이 돌아다닌다. 물론 귀신 이야기는 아니다. 확인되지 않은, 실체가 없는 이야기라는 뜻의 신종 괴담이다. 광우병 괴담으로 시작된 괴담 시리즈는 수돗물 괴담, 독도 포기 괴담으로 이어지더니 사라졌던 여대생 사망 괴담까지 다시 고개를 치켜들고 있다.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떠도는 수많은 괴담은 IT 강국답게 전파 속도도 엄청 빠르다. 일본에 800만 신이 있다면 한국에는 800만 괴담이 있다고 해도 어색하지 않다. '괴담 공화국'이다.

    괴담 진원지는 대부분 인터넷이다. 예전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카더라 방송'이 이젠 인터넷상에서 문자로 돌아다닌다. 그럴듯한 글이 뜨면 '펌질'로 순식간에 퍼진다. 대처할 시간이 없을 정도다. 인터넷은 동시간대에 쌍방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는 유용한 도구다. 즉각적인 토론이 이뤄지면서 여론을 형성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의 인터넷은 토론의 장이 아니라 대결의 장이다. 나와 다른 의견은 무조건 '알바'로 치부해 버린다. 다수 의견과 소수 의견으로 나뉘는 게 아니라 승자와 패자로 나뉜다. 쌍방이 아니라 일방이다.

    인터넷의 위력이 커지면서 의도적으로 사실을 왜곡하는 사례도 빈번해졌다. 광우병 괴담은 MBC PD수첩의 왜곡 보도 이후 급속하게 번졌다. 그래서 'PD수첩 괴담'이라는 변형으로 나타났다. 촛불집회 도중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여대생이 죽었다는 괴담은 경찰의 발표 이후 사라졌으나 한겨레 신문의 1면 광고로 다시 불씨를 지피고 있다.

    지금 돌고 있는 괴담들은 아직도 힘이 있다. 정부가 아무리 해명을 해도 괴담을 사실로 믿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는 얘기다. 괴담이 힘을 얻을 때는 분명히 이유가 있다. 정부 불신이다. 정부의 발표보다 인터넷에 올린 개인의 글을 더 믿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위기다. 미국 쇠고기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도 않았는데 금강산에서는 우리 관광객이 북한군의 총격으로 사망하고, 일본이 또다시 독도 문제를 들고 나와 온 나라가 벌집 쑤셔놓은 상황이 됐다.

    정부의 위기관리 능력이 또 도마 위에 올랐다. 지금까지 보여준 능력으로는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 힘들다. 개인이든 국가든 위기상황에서 위험을 최소화하려면 평소에 위기상황을 예상하고 훈련을 해야 한다. '시나리오 플래닝'에 따른 훈련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MB 정부의 시나리오 플래닝은 거의 없었다. 촛불집회든, 금강산 총격이든, 독도 문제든, 국제유가 급등이든 마치 뒤통수를 얻어맞았다는 표정이다. 허둥대는 모습이 역력하고, 대책은 굼벵이인 데다 시원하지도 않다.

    갑자기 “이 사람, 믿어주세요”가 생각난다. 믿어달란다고 순진하게 믿어줄 시대가 아니다. “괴담이니까 믿지 마세요” 한다고 괴담이 없어질 리 없다. 보여주는 수밖에 없다. 지금이라도 시나리오를 짜고 국민의 상처를 싸매줘야 한다. 어차피 시간은 걸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