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을공기가 차갑기보다 상쾌하다. 충신 신숭겸 묘소를 찾아가는 길은 드라이브만으로도 좋은 춘천 의암호를 지나 서면에 위치한다. 이제 막 겨울로 들어서기전 마지막 낙엽들이 우릴 반긴다.

    확트인 경치! 멀리 앞에 펼쳐진 춘천시내와 춘천을 빙 둘러싼 산들이 방문객을 편하게만드는 곳, 우리나라 4대 풍수지의 하나로 풍수학자들의 필수코스임을 떠나 풍수에 문외한인 나에게도 명당임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신숭겸의 처음 이름은 삼능산(三能山), 평산 신씨의 시조이다. 

    그는 궁예가 세운 나라인 태봉의 기장으로 있다가 궁예의 폭정이 날로 심해지자 뜻을 같이하는 신하들과 함께 궁예를 축출하기로 하고 왕건에게 점술가의 예언을 설명하면서 거사를 권한다. 서기 927년 후백제는 군사를 이끌고 경주를 침범했고, 왕건은 신라를 도와 후백제와 싸우려고 5천명을 거느리고 후백제를 공격하였으나 팔공산 공산의 미리사 부근에서 병력이 열세하여 대패하고 말았다. 신숭겸은 국가의 장래를 위해 왕건과 자신의 외양이 닮은 점을 이용하여 갑옷을 바꿔입고 태조를 탈출시킨 후, 스스로 적진을 향해 돌격했다. 후백제군은 장군을 태조로 오인하여 집중 공격을 가하였고, 신숭겸이 전사하자, 그의 목을 베어갔다.

    평소 아우로 아끼던 신숭겸의 죽음을 슬퍼한 태조는 그의 공을 기려 후백제군이 베어간 그의 머리 대신에 순금으로 머리를 만들어 후하게 장례를 지냈다. 그리고 금으로 만들어진 그의 머리가 도굴될 것이 염려스러워 춘천, 구월산, 팔공산에 똑같은 묘를 만들게 했다고 전해진다. 그것도 안심이 되지 않아, 이 곳 춘천에 만들어진 봉분은 3개다.

    특히 춘천의 이 묘역은 도선 국사가 왕건을 위해 잡아준 자리였다고 한다. 그러나 왕건은 자신을 위해 기꺼이 죽음을 택한 신숭겸을 위해 그 자리를 내주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숭겸의 충성은 고려는 물론 조선 때까지 충신의 표상으로 받을어졌으며, 고려 16대 예종은 신숭겸, 김낙 두 장군을 추모하기 위해「도이장가(悼二將歌)」를 지었다.

    묘역 입구의 홍살문을 지나 멀리 보이는 신숭겸의 세 봉분을 향해 걸어가면서, 묘지 주위 하늘을 향해 뻗은 소나무 군락지가 가슴 찡하게 다가온다. 푸르른 소나무는 신숭겸 장군의 변치않는 충심을 대변하는가.

    대학 시절 배낭여행의 첫 목적지 괘릉의 인상적이었던 소나무가 머릿속에서 오버랩 됐다.

    경주시내와 떨어진 외딴 곳이라 방문객이 적어 그 한적함도 좋았지만 봉분 주위로 자태 빼어난 소나무들이 무덤을 한껏 위엄있고 멋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소나무가 아닌 다른 수종으로 이런 분위기를 뿜어낼 수 있을까. 상상이 잘 안 간다.

    옛 충신의 넋이 깃든 묘소를 뒤로하면서, 현재까지도 봉분을 보살피는 듯한 소나무의 정신을 기억함과 함께 후손에게도 이 감흥을 남겨주고 싶다.